그때 내 어금니에는 벨벳 같은 게 부드럽게 씹히면서 짓이겨졌는데 그게 장미 씹는 순간임을 단번에 알았다 그때나는 이 시를 이미 만나고 있었다 - P19

나는 왜 사랑한다고 말 한번 못했지 - P16

처음 집에 와서 짐을 막 풀었을 때우리는 수도꼭지를 돌리고 손등을 적시다 울었다 - P29

그래서 괜찮다 내게는 맑은 난류가 있다사회로부터 사랑을 받은 기억이 있다 - P29

서정: (불교) 서서의 승려들이 가는 변소학교를 마치면 단숨에 달려갔던 곳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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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안나푸르나에 갔을 때 안나가 탄 경비행기가 해발삼천 미터쯤 되는 산 근처에서 회항한 적이 있었다. - P121

안나는 생각했다. 혹시 삶 전체가 어떤형태의 격식을 갖춘 표정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자신이 잃을것이 그로 인해 생겨난 오해와 적응으로 이루어진 또하나의공허한 표정일 뿐이라면 그것을 진정한 상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27

남자가 그 얘기를 해주었을 때 안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첫 관심이 기뻐서만은 아니었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순간에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독한 결말은 아닐 것 같았다. - P131

안나는 아파트 창가에서 유치원 버스를 내려다볼 때처럼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자칫 호감을 트집같이 표현하는 섬세하지 못한 참견쟁이 노인처럼 보일 수도 있으므로 오래 바라보지는 않는다. 아이들이란 늘 인사하고 싶은 존재이다. - P155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깨달은 게 있다. 몸이란 삶의 조건이지만 한편으로 죽음의 조건이기도 하다. 삶을 수행하는 과정은 그것을 완전히 끊어내는 죽음이라는 한순간을 향해 있다. 삶과 죽음은 동행한다. 경선의 경우, 어딘가 있으려니 했•던 죽음이 훨씬 더 가까이에서 삶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 P158

경선에게 P는 자신만의 것이면서 완전히는 가질 수 없는불안정한 텍스트 같았다. 거기에 경선이 원한 매혹이 있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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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렇게 경선의 맨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라. 여전히 피부가 희고 고운 편이지만 눈가와 뺨에 촘촘하게 잔주름이자리잡고 광대뼈 근처에 잡티도 많이 올라와 있다. - P76

안나는 다시 손을 들어 여전히 찡그려져 있는 경선의 미간을 조심스럽게 펴준다. 이 순간에도 경선은 자신의 얼굴이 늙은 환자의 증상을 나타내는 표지로만 읽히기를 원치 않을 것같아서이다. - P78

경선이 체중 조절에 민감한 것은 몸이든 머리든 둔한 것을혐오했고 그 두 가지를 치명적으로 둔하게 하는 술을 조절할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몸을 움직이는 일 가운데 경선이 좋아하는 건춤뿐이었다. - P79

나이가 들어 기력이 달리면서 욕망 또한 거기 맞춰 둔해진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 감당할 만큼만 몸이 욕망하는 것이다. - P50

마치 극장의 관객처럼 지정된 좌석의 어둠속에 앉아 매일같이 세상의 하루라는 영화를 보는 거라고 여겼다. - P81

병실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또 일터이기도 하다. 환자와 간병인 모두 자기 인생의 하루를 살아가는 중이었으며 모든 삶이 그렇듯 매일이 똑같지는 않았다. - P85

"몸이 기능을 안 하는데도 욕망은 생겨나는 거지. 그리고 그걸 충족시키려고 오히려 환상이 더 강해져. 그게 딱 지금 내가겪는 고통의 정체야." - P89

두 간병인은 안나 자매에 대한 인성 평가도 마친 상태였다.
언니는 다정하고 동생은 속이 깊으며 서로를 배려한다는 것이다. 안나의 얼굴에 떠오르는 의아한 표정을 보았는지 최순영은 자신들처럼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고 상대해온 사람의 눈은틀림없다고 못박았다. - P91

문 하나짜리 조립식 옷장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물건이겹겹이 쌓인 소형 철제 행거가 겨우 비집고 서 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큰 물건은 거울뿐이다.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있는 그 거울에는 좁은 방의 모습이 모두 담긴다. - P95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래서 난 귀여운 할머니 같은 말도 싫어. 늙으면 수동적이고 퇴행적인 거 말고는 매력을 부여할 방법이 없다는 거야?" - P105

주치의가 건네는 진단서에 적힌 경선의 병명은 ‘상세 불명의 악성 신생물‘이다.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는 수납 창구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의사가 떠난 뒤경선은 숟가락을 들어 흑임자죽을 떠먹기 시작한다. 한 숟갈삼킨 뒤 보험 같은 거 없는데, 라고 한마디한다. - P107

그때에는 잘 몰랐지만 경선이 기다린 건 어떤 한 계절이 아니었다. 계절의 주기와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실험하고 느껴보고 싶었다. - P113

"나이들면 말 없는 사람이 인기 많아져."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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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경선은 갑자기 안도한다. 마지막처럼 느껴지는안나와의 작별이 지금이 처음이 아니란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시는 가족들을 볼 수 없고 결코 예전의 삶으로는 돌아갈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던 순간. 그것은 오래전에도 겪어본 적 있었다. - P65

안나는 자신이 홀로 죽고 잊히리란 걸 알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누구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된 적이 없으니 죽음 또한누구도 안타깝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억울함이나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시간차가 있을 뿐 모든 존재는 사라지고 잊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으니까. - P69

그때 안나가 느낀 것은 아마 시간의 무자비한 일회성, 그리고 소멸의 감각인지도 모른다. - P71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차이로 삼을 만큼 신체가 섬세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징이 모호해졌다거나 평가의 기준이 달라졌다는 뜻만은 아니다. 조건에 둔해진 것은 더욱 아니다. 관심의 시효가 다한 것뿐이다. 노인이라는 일반화가 너무 강력해서 개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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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다섯 살 생일날 아침, 안나는 아파트 오층 창가에 앉아버스 정류장이 있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혼자 커피를 마시고있다. - P9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는 안나에게 어떤 삶이 남아 있을까. 그것은 평생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에 잠을 자며 어쩌다 관심을 보이는 것이라고는 간식 캔밖에 없는 늙은 고양이에게 왜 사는지 묻는 것처럼 세속적이고 무지한 질문이 아닐수 없다. - P13

나쁜 결과만 가져오는 건 아니다. 지금 화분은 마치 집열판처럼 안나의 아침 풍경에 온기를 입히고 있다. 그 정도의 무위와 단조로움이면 자신에게 충분한 생일 아침이라고안나는 생각한다. 보정 - P15

안나와 경선이 만난 곳은 약속했던 파스타 식당이 아니다.
병원 대기실이다. - P27

자주 만나지 않는 사이에서는 변화가 압축된 형태로 눈에띈다. 매일 보는 자신의 얼굴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시간의 흐름을 한꺼번에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안나는 자신에게는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늙음이 왠지 모르게 경선에게는 뜻밖이고 또 어느 정도 부당한 느낌마저 든다. - P29

"그 이산가족은 옷을 벗어야만 찾을 수 있는 거니?"
"간병인 앞에서도 벗는데 가족한테 왜 못하겠어." - P48

다은은 옆 의자 위에 올려놓았던 종이 쇼핑백 두 개 중 하나를 안나에게 건넸다. 다니엘의 하룻밤 외박을 위한 물건들일것이다. 초밥집 상호가 찍힌 다른 쇼핑백은 경선을 위한 것이분명했다. 경선이 점심과 비슷한 식단으로 저녁까지 먹고 난뒤 솔직히 남이 차려준 밥 항목에 병원 밥을 끼워주기는 뭔가아쉽다고 뒷말을 하더니 어느새 다은에게 문자를 보낸 모양이었다. - P49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덜어지는 건 아니다. 무의 세계에 동행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태어남과 함께 몸에 새겨진생존의 본능이 있듯이, 필멸자로서 죽음에 연착륙하는 본능의장치가 인간에게 내장돼 있는 건 아닐까. 어디에서 그걸 찾아야 하는 걸까.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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