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안나푸르나에 갔을 때 안나가 탄 경비행기가 해발삼천 미터쯤 되는 산 근처에서 회항한 적이 있었다. - P121

안나는 생각했다. 혹시 삶 전체가 어떤형태의 격식을 갖춘 표정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자신이 잃을것이 그로 인해 생겨난 오해와 적응으로 이루어진 또하나의공허한 표정일 뿐이라면 그것을 진정한 상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27

남자가 그 얘기를 해주었을 때 안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첫 관심이 기뻐서만은 아니었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순간에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독한 결말은 아닐 것 같았다. - P131

안나는 아파트 창가에서 유치원 버스를 내려다볼 때처럼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자칫 호감을 트집같이 표현하는 섬세하지 못한 참견쟁이 노인처럼 보일 수도 있으므로 오래 바라보지는 않는다. 아이들이란 늘 인사하고 싶은 존재이다. - P155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깨달은 게 있다. 몸이란 삶의 조건이지만 한편으로 죽음의 조건이기도 하다. 삶을 수행하는 과정은 그것을 완전히 끊어내는 죽음이라는 한순간을 향해 있다. 삶과 죽음은 동행한다. 경선의 경우, 어딘가 있으려니 했•던 죽음이 훨씬 더 가까이에서 삶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 P158

경선에게 P는 자신만의 것이면서 완전히는 가질 수 없는불안정한 텍스트 같았다. 거기에 경선이 원한 매혹이 있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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