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나의 성스러운 그 사진 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 책은 나의 눈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자마자 저절로 사라져버렸다. 사진들은 이제 얇은 막이 되어내 망막의 한 층을 만들었다. - P147

바다와 가파른 절벽 사이에는 내가 탄 비행기가 착륙할자리가 없다. 갈매기와 비행기는 닮은 점이 없다. 갈매기는 물고기를 먹고 비행기는 인간을 삼킨다. - P149

키르케는 남자들을 돼지로 변신시켰다.
어쩌면 이것은 꿈 텍스트일 것이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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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던 길로 되돌아간다는 건 확실한 죽음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었지요.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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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소설을 쓰리라 마음먹었을 즈음에 한소공의 마교사전을 읽었다. 책 속 마교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 ‘죽었다‘고 말하는 대신 ‘흩어져버렸다‘고 표현한다. 물과 흙으로,
혹은 바람으로, 구름과 안개와 공기로 흩어져버린 사람들의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소설을 쓰는 건정말로 세상에 흩어진 것들을 모으는 일인 것 같다. 슬프고 무섭고 귀엽고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반들반들 윤이나게 닦고 이어서 엮어본다. 모아서 잇다보면 원래 그 자리에있었던 것처럼 딱 들어맞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연이 만들어낸 기적처럼.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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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야기는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나는 이문제로 오래 고민해 왔다. 혼자 정리한 바를 말하자면 이야기가상처를 대하는 태도는 회피하기, 덧씌우기, 마주하기로 꼽을 수있다. - P290

그러나 큰유진의 이야기는 상처가 혼자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아픔을 나눌 수 있음을 여러 형태로 보여 준다.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나아가 아예 상처와 무관한 사람과도 상처를, 아픔을 나눌 수 있다. 상처는 홀로 만드는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다. 상처를 주고받은 경험은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 P293

이야기는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는 이들을 옹호하지 않지만,
이들을 성실하게 그려 냄으로써 상처를 나눈다는 것이 간단치않은 일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큰유진과 작은유진의상처가 단순화된 이야기 장치, 곧 ‘아직 치유 전이다. 지금 치유중이다. 이제 치유되었다.‘라는 도식을 꿰는 앙상한 줄기가 되지않을 수 있었다. - P299

내가 다시 쓰는 작가의 말」에서 「유진과 유진』을 쓴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된 건 딸아이 덕분이야. 그 아이는 이제 언제어디서든 할 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당당하고 멋진 여성으로 성장했단다. 우리는 가끔 아빠가 끝까지 범인을 잡아내고,
엄마가 욕설을 퍼부으며 파리채를 휘두르고, 끝내는 그놈을 감옥에 보낸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곤 해. - P304

딸아이가 말하더구나. 엄마가 자기 잘못이 아님을 처음부터말해 주었고, 엄마 아빠가 더 사랑해 주었고, 아빠가 가해자를잡아 벌주었기 때문에 그 일이 자신에게 아무런 억울함이나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고. 이제는 놀다가 넘어진 일만큼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라고. 그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 주라고.
또 다른 유진과 유진아, 네가 겪은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네게 무슨 일이 있었든 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야. 어떤 상황에서도 그 사실을 잊지 말렴.
.
2020년 늦가을이금이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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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 그게 문제가 될까?
차인석이 묻자 규한이 목소리를 높였다. - P233

석주가 조심스레 우려를 표하자 규한이 말했다. - P233

석주는 망국의 밤」의 출간 과정이 순탄치 않으리라고 직감했으나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얼마간 바꿔놓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 P234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모조리 고쳐버리면 그 글은 뭐가 되는 겁니까? 논란을 피하겠다고 원고를 누더기로 만드는 게작가를 위하는 건 아니지요. - P240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래요. 이 원고는 이제 홍선생 것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 P242

서로를 원망하진 않았다. 언쟁하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대역을 수행하는 것처럼 덤덤했다. 모든 게 너무나 조용하고 매끄러워서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마웠다는 인사와 잘 지내라는 말을 형식적으로 건네면서도 석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원호가 듣고 싶었던 말인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말인지도. - P251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석주는 늘 했다. 이따금 부담감으로, 압박감으로 돌변하곤 하던 그 기대를 놓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를 탐독하고 완성하는 데 많은시간을 할애했다. 그래서 일상을 돌보는 데 서툴렀고 힘껏 붙잡아야 할 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날, 석주는 처음으로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그것은 닮은꼴의 하루가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는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것 같았다.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 P263

석주는 낯익은 그 모습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오래전선배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떨림과설렘, 서투름과 투박함, 선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 한번시작하면 멈출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백지와 같은 자신의삶에 높이와 깊이를 만들고 명암을 부여한 바로 그것. - P271

책을 좋아하나요?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맞다. 그건 오래전 사랑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그것이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지도 모른 채, 그저 속수무책 그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던 석주에게 누군가 건넸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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