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신호라도 되듯 안나는 핸드폰 화면을 켜서 가까운중국 음식점을 찾기 시작한다. 다니엘이 호텔 로비 구석에서우산이 여러 개 꽂혀 있는 우산꽂이를 봤다고 말하자 경선이손님들에게 빌려주는 물건일 거라고 대꾸한다. ‘우리의 첫‘게임은 끝나 있다. - P248

안나와 경선은 전 국민이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 텔레비전드라마에 유독 부잣집 이야기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 P250

매혹은 사라지고 사랑은 개조되며, 삶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죽음을 찾아간다. 이것은 훗날 찾아보았던 그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평이다. 안나가 작가가 되었다면 이런 문장을 썼을지도 모른다. - P255

"경선 할머니, 안나 할머니! 우리 다 옆집에서 사는 거 어때요? 제가 집을 많이 지어갖고요.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들이랑동네에서 다 같이 사는 거예요." - P266

어머니는 딸이 자신만큼 늙은 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딸은어머니가 보지 못한 모습으로 늙었을 때 거기에서 어머니의모습을 본다. 어쩌면 경선도 이 이야기에는 공감할 것이다. 봄빛이 이렇게 환한 날에는 햇볕 아래에 앉아 눈을 감고 웃는 누군가가 뜻밖에도 젊고 예뻐 보이더라는 이야기라면 특히나 좋아할 것 같다. - P269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이제 노인으로 보이기 싫은 시기에 이르렀다. 노인으로 대해지는 게 불만스러운 마음 안에는스스로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세상의 잣대에 맞춰야 했던 데 대한 분함과 심술도 있을 것이다. - P277

P는 몰랐을 것이다. 경선에게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가난과 고독에 견주며 그보다는 낫다는 데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태도가 무례를 넘어 사악함이란 걸 깨닫고 울었던 날도 있었다. - P282

이따금 P의 옛 약속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어떤 시간은 생활의 때묻은 이력으로 채워진 채 흘러간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또다른 어떤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의 세계 안에서 흘러간다. 삶이란 그처럼 의미가 다른 여러 개의 시간이 겹쳐져 흘러가는 게 아닐까. 몸의 일상은 현실의 시간대에서 변해가지만, 언젠가 포착한 적 있었던 꿈과 이상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도착지를 향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는 시원이나 본행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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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면 그대는 항상 오미자물을 우려서 한 사흘은냉장고에 차게 두었다 크고 실한 수박을 사고 체리를 씻고착실하게 속을 다 파내는 것이다 - P19

그때 내 어금니에는 벨벳 같은 게 부드럽게 씹히면서 짓이겨졌는데 그게 장미 씹는 순간임을 단번에 알았다 그때나는 이 시를 이미 만나고 있었다 - P19

늙은이는 항상 밭에 물을 주다가새파란 물뿌리개로 내 바지에 뿌렸다아 왜 이래 할머니! 하고 소리 지르면아 꽃 같아서 그려, 하고 싱긋 웃었다 - P22

그러니까 비밀은 나무에 있어요 오래된 단지는 수목도나이가 많지요그런 단지에는 새들도 많이 삽니다 아침이 오면 창가가방앗간 같지요 - P28

그래서 괜찮다 내게는 맑은 난류가 있다사회로부터 사랑을 받은 기억이 있다 - P29

었그게 내 마지막 인장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약속했고 지켰고 사랑했다 ‘우리‘의 ‘우‘
는 뒤집어보면 호떡 같다 누르기 직전의 부드럽고 몽실몽실한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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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진짜 싸우는 건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냥요. 그냥 알아요. - P217

"이 병따개 여기서 산거야. 다니엘 너도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사. 내가 돈을 물 쓰듯이 쓸 거니까." - P221

다니엘의 초등학교에는 학년이 바뀌기 전에 위 학년 선배들이 아래 학년의 같은 반 같은 번호 후배들에게 편지를 쓰는 프로그램이 있는 모양이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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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어쩌겠어, 싫어도 살아야지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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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다은은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다. 이틀째 벗지 않은 잠옷 차림에, 콘택트렌즈 대신 안경을쓰고 긴 머리는 대충 하나로 묶었다. - P189

경선은 놀이동산 같은 상업적 시설물은 취향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또 이 여행에는 자신의 회복을 기원하는 목적도 있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장소에는 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 P191

그 생각을 하고 나서야 다은의 시선이 사진 속 경선의 얼굴로 가서 오래 멈춘다. 경선의 유일한 여행 준비는 미용실에 간일이다. 낯설긴 하지만 쇼트커트가 잘 어울린다. - P195

오래전 안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여행은장소뿐 아니라 시간의 이동인 것 같다고. 처음 와보는 장소인데 언젠가 살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풍경과 마주치면 그 순간시간의 회로가 교란된다고.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때로 전생까지 거슬러 상상해보게 되는 그 데자뷰의 전율이 현생에서도망친 데서 오는 해방감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자신의지난 생이 상영되는 극장 안에 한 발 들어선 설렘이었다고 말이다. - P203

"늙어서 그래. 손이 건조해서 종이가 잘 안 넘어가. 나도 어릴 때는 늙은이들이 돈을 세면서 왜 그렇게 손에 침을 퉤퉤 뱉는지 이해를 못했단 말야."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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