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비하면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얼마나벽돌 같고 성벽 같은가. 나를 보기 위해서는 거울을볼 게 아니라 당신을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게아니었을까. 당신의 절대성, 당신의 있음, 당신의 자리가 있어 출현하고 지탱되는 내가 있다는 것. 내가당신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발상은 우리의 삶을, 관계를, 미래를, 어떻게 회전시킬 수 있을까. - P61

세상 모든 이름들 말이다. 체계가 있든 없든 설명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름은 그 자신의 비밀을 품기 위해 존재하는 게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당신의 이름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으려나. - P66

그 순간 무형의 삶은 깜빡, 하고 빛난다. 얘야,
삶이란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에잡히기도 한단다. 지금 여기 네 손안에 분명하게 들려 있잖니, 하고. - P83

‘모루’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 건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의 책 《슬픔의 위안》(현암사, 2012)을 통해서였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우리가 쓰고자 한 것은‘grief‘, 즉 ‘슬픔‘이었다고 고백한다. 슬픔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그들은 사별을 경험한 이들과 수많은인터뷰를 진행해왔고, 그 고유한 슬픔이 어떻게 한사람을 통과해가는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폈다.
그리고 이 책을 썼다. 요약하자면, 슬픔과 위안이라는 두 단어 사이의 거대한 협곡을 끝끝내 건너가는이야기였다. - P87

썩게 하는 힘. 감정이든 사람이든 시간이든 썩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마음들은바로 그 순간에만 말이 된다. - P89

유루증(流淚症)에 걸린 강아지 사진을 보았다. 눈 주변에 적갈색의, 무언가 흐른 듯한 자국이 선명했다.
《내 강아지를 위한 질병사전》(작은책방, 2014)에 따르면 유루증은 코로 흘러내려야 하는 눈물이 배출되지못해 눈으로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상태를 말한다. - P191

이 글은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엄마를 위해 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눈물이 있을지라도 우리 삶의 구체성으로 말미암아이 페이지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될 거라고. 귀퉁이를 접어 두고두고 펼쳐보며 엄마의 아팠던 시간, 그림자의 그림자까지 끌어안겠다고 - P95

수전 손택과 조너선 콧의 대담(《수전 손택의 말》, 마음산책, 2020)을 읽던 중에 인상적인 구절을 마주쳤다. "내악마들을 빼앗아가지 말라, 천사들도 함께 떠날니까." 릴케의 시구라 했다. 릴케의 시에 이런 구절이있었던가? 그 즉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었다. - P112

"잘 살자.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아야지." 그러자녀석은 뻔뻔하게 내 앞으로 빈 밥공기를 내민다. 허기로 가득한 눈. 나는 저 눈을 오래도록 알아왔다. - P116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 에드워드는 어떤가. ‘사랑을 만질 수 없는 남자‘라는 포스터 속 카피에서부터 이미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 화면에 뾰족한 가위손을 가진 그가 등장했을 땐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 P119

연습하는 손은 게으른 손을 이길 것이고 호기심 가득한손은 나태한 손을 앞설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오늘당신은 어떤 손을 가졌습니까. 그 손안엔 무엇이 있습니까. 따뜻합니까. - P121

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생각될 때에도 당신과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끝끝내 반짝이는 세계, 당신의 빈야드가. - P1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바로 그 위대한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그렇게말하는 선생이 있었다 그다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은 ……과………" - P71

수업은 정오에 시작하고 오후 세시면 끝난다두 시간이나 남은 강의를 나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책을 읽고, 낙서를 하며, 가끔 강의를 들었다 - P71

뜨겁던 총신이 식었고 어느새 새들도 울지 않았다나는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 P76

예쁜 것이 예뻐 보인다비극이 슬퍼서희극이 웃기다 - 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의 이름은 춘희姬이다. - P9

마당으로 통하는 부엌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마침 멀리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색연필 코너에 서 있다. 색연필 코너는 연필 코너의바로 다음 블록이다. 복돼지 문구점의 블록은 골목만큼 길고 뱀처럼 가는 모양으로, 매우 좁지만 탄성이 있어 아무리 커다란 사라시라도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며 문구를 제대로 고를 수 있다. - P298

그러니까 내가 음식을 먹고서 하루를 더 살아가는 게 이 세계와주변에 누가 되는 게 거의 확실해졌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할 수 있는 밥상, 가장 낮은 밥상의 맛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구수한 맛이란 먹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맛. - P2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열량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생육 일수의 일평균기온을 적산한 것‘ 사전이 설명하는 적산온도는 실용적인 의미가 강하다.
반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적산온도는 경직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 P27

이제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으로 나의 주악을 찾고자 한다. ‘간단하면서도 짜임새가 있다‘는 뜻의 간결. 당분간 내 삶의 모토는 그것이다. 분별과 선택, 집중의 시간이 성큼 다가와 있다. - P34

신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지구라는 화단에 심긴삽수들일 것이다. 심는 마음이야 똑같았겠지. 결말은예측 못 해도 누구에게나 시작은 공평한 손길, 다정한 눈길이었을 것이다. - P39

튤립을 보면서 혼자 오래 감상에 젖었더랬지. 그래. 너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꽃피우고, 그렇게 시들거라 응원하게 되더라. 같은 마음으로네게도 또 한번 응원을 보낼게.
- 〈월간 여름〉 2021년 3월 호에서 - P52

그의 수상 소감에는 놀라운 지점이 있었다. 그는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비올라에 있어 위대한 날이에요"라고 말했는데 두 표현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광스러움과 위대함이라는 단어의 어감이나 의미 자체도 다르지만 그보다는 그러한 영예를 누구의 몫으로 돌리느냐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는 영광의 주체를 자기 자신이 아닌 비올라에게로 돌렸다. 위대하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나의 연주가 아니라, 이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는 비올라의위대함이라는 듯이. - P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