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진짜 괌에 한번 와 내가 비행기표 사줄게."
윤미가 말했다.
"괌! 괌이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 데였지?"
숙희가 물었다. - P120

숙희와 윤미는 아줌마처럼 되고 싶지 않은 아줌마였다. 그게 그들을 친하게 만든 원동력이라 해도 무방했다. - P131

이제 육십대 중반까지 겨우 십오년 남았을 뿐이었다. 얼렁뚱땅하다가는 아무것도 준비해놓지 않은 채 어이쿠, 시간이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네요, 하고 말해버리고 말리란 것도 이제는너무나 잘 알았다. - P134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이 민망하게 느껴지긴 했어도 아예 밖으로나다니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경험상 홍대는 불쾌했고 을지로나 이태원은 상대적으로 괜찮았다. 찬영이 알고 있는 홍대의 몇몇 장소에서 숙희는 젊은이들이 기꺼이 참아내는 멋진 괴로움 유행하는 카페의 불편한 의자 따위를 견딜 수 없어했고 찬영은 더러운 자취방에 애인을 초대한 것처럼 노심초사하며 숙희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은 어딜 가나 눈길을 끄는 커플이었다. - P137

여성의 수많은 부류 중에서 미혼 이모보다 비웃음을 사는 부류가있을까?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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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고요?"
"그렇습니다. 제공되는 일기를 1차 자료로 사용해 소설을 쓰시면 됩니다."
자서전 같은 걸 의미하는 걸까, 나는 따분하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 P11

최고의 시절은 지나갔다 하더라도 여전히 품위를 간직하고있는 듯한 느낌의 남자였다. 다만 한 가지, C가 그동안 내 마음속에서 꽤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채로 기억됐기 때문에, 이 왜소한초로의 신사가 바로 그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 P13

"작가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말,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C는 상대방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불쾌감에 전혀 상처받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영혼을 팔지 않겠느냐는 제안이라도 받은듯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말은 계속됐다. - P17

바다와 근접한 삶의 쓸쓸한 측면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물에 빠져 죽는사람이 이렇게나 많은지 알지 못했다. 한 주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사고 소식은 외지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지 않는 모양인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는 듯했다. 다들 해맑은 얼굴로 도착해서자신들이 얼마나 운좋은 하루를 보냈는지 깨닫지 못하고 다시 해맑은 얼굴로 떠났다. - P25

소설은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철저히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터였다. 현실 속의 여자라고 볼 수 없는 ‘필요 이상으로 매혹적인‘ 여자들이 가볍고 비정하고 개연성 없는 태도로 오직 남자주인공의 성적 대상이 되거나 그들의 운명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서사적 장치 정도로만 등장할 뿐이라고들 했다. 나는 온라인에떠도는 끔찍한 리뷰를 반복해서 읽었고, 그것들은 모두 비수처럼내 심장에 박혔다. 이미 죽었는데도 몇 번씩이나 더 찔리는 심정이었다. 나처럼 인지도 없는 작가에게도 그렇게나 많은 리뷰가 생성된다는 현실이 공포스러웠다. 그렇게들…………… 할일이 없나? - P33

"미친 거기 경쟁률 진짜 낮았나보다."
나는 있는 힘껏 기분 나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하지만 말이란게 습관대로 퉁명스럽게 나가긴 했어도 어떤 가능성이라는 것에 불을 지핀 이상 이미 마음은 부산에 어느 정도가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한 달 치 스케줄을 어떻게 조정하면 좋을지 재빨리 가늠하고 있었다. 충분히 너덜너덜한 이야기라 더 고칠 게 있을는지는잘 모르겠지만...... 왠지 부산에 가고 싶었다. 거길 가야만 했다. - P49

객실 복도는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3607호가 있는 라인은 오션 뷰가 아니라 시내 쪽을 바라보는 북향이었다. 실망스런 마음으로 흘끔 창밖을 내려다보니 삼십육층의 높이가 과히 심란했다. 지상 보도블록은 보이지도 않았고, 하늘 높이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맞은편에 보이는 산봉우리의 고도가 내가 서있는 높이보다 더 낮아 보일 지경이었다. - P51

다른 객실로 옮기는 것은 열시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해서 나는여유를 부리며 스크램블드에그와 구운 베이컨, 아스파라거스, 해시 브라운, 버터 바른 토스트, 오렌지와 청포도를 되도록 천천히먹고, 조식 마감 전까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제임스 엘로이의책을 읽었다. 직원들이 가끔 나를 주시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고개를 파묻고 책에 집중하려 했다. 꽤 사치스러운 일이다. 불행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읽으며 푸짐한 아침을 먹는다는 것은 내가발 디딘 지금 이곳의 안전을 재차 확인하려는 이기적인 방식의 위안이다. 악취미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했다. 작업에 도움이될 거라는 핑계를 대면서. - P56

여전히 엘리베이터 벽면에는 컬러 프린트된 아쿠아리움 광고가붙어 있었다. 매일 광고 이미지를 보다보니 이미 그곳에 갔다 온기분이 든다고 내가 현에게 얘기했을 때, 그는 곁눈으로 광고지를흘깃 보더니 "솔직히 아쿠아리움은 애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나는 현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가 가만히 고개를끄덕였다. 우리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을 테니 평생 아쿠아리움에 가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거야. 단지 속으로만 그렇게 대꾸했을 뿐. - P69

이 순간을 잊지 못하게 되리란 것도 알았다.
내 말에 손감독은 울음을 숨기고 싶지도 않다는 듯 더 소리 내어 흐느꼈다. 손감독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나도 휴대폰을 붙들고 울었다. 우리는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잃은 부부 같았다. - P73

난희는 졸업 후 단 한 번 대학 강사 자리를 제안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안한 사람과의 데이트를 거부하자 그 자리는 대뜸 취소되었다. 난희의 어머니는 딸의 마음이 어떻든지와는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전화번호를 들이밀며 결혼만이 네 살길이라는 식으로매 순간 난희가 단지 한 명의 여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도록만들었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서만큼은 딸의 성별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P84

그로부터 며칠 후, 난희의 예상대로 정화는 작별 인사 없이 시카고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서로를 딱히 좋아하지 않아도 단지 그들이 어울리던 시절을 떠올리고 싶어 친분을 유지하기도 한다. 각자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일종의 보험처럼 기능하는 관계로남을 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아마 내 멋대로 살다가 죽겠지."
포기하는 기분으로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는데, 이상하게 힘이났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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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답장하며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P10

이곳 올드독코퍼레이션은 빈티지 의류 마니아를 위한 중고 마켓 겸 커뮤니케이션 앱 ‘올드독‘을 만드는회사다. 직원들은 자기 직장에 대해 질문받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무신사와 당근마켓 사이의 IT 스타트업." 오스틴은 이 회사의 초창기 멤버 중 하나였다. - P11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때로는 내가 맡은 직무보다, 왕복 세 시간을 쏟아야 하는 출퇴근길보다, 농담 한마디를 받아치는 일이더 힘겨울 정도로. - P13

나는 그게 정말인지 오스틴에게 물었다.
"제가 예쁜 걸 잘 알아봐요‘ - P18

"여기 올드독 거래 게시판 보면, 옷을 산더미처럼쌓아두고도 20년 전에 나온 파타고니아 신칠라를 사려고 50만 원을 태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 대표는빈티지 패션을 가지고 친환경이니 대안적 패션이니하는데, 누가 그걸 믿겠어요. 그냥...... 예쁜 거에 눈이회까닥하게 하는 것 같아요." - P19

"그 여자가 차였는지 찼는지 어떻게 알아요?"
"딱 보면 알죠. 딱 봐도...... 페미 같잖아요. 페미니까차인 거죠."
"네?"
"머리가 짧으니까요." - P24

"그 사람에게 부탁하면 어때?"
"그 사람은 호모포비아야." - P29

사람이라면 그 공연을 통해 수치심을 덜어낼 수● 있을까? 자기 몸을 긍정한다는 것이 그런 다정한 경험을 통해 성취될 수 있는 일일까? 누구도자신에게 매혹되지 않는데, 오로지 다정함만으로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을까? 그 대안적인 스트립쇼는 프릭쇼와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저는 이 질문들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던 것 같아요. - P39

하려는 대신, 그 감정을 ‘나도 안다‘고 주장하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계 안에서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한지 물으신다면, 저는 간극을 극복하고 연대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 틈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떤 형태의 틈인지확인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 P45

노동이라든지 투쟁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무척 멋들어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엽서를 다옮겨 적은 뒤 맨 밑에 보낸 이의 이름도 꾹꾹 눌러었다. 성식이 형. - P54

"울지 마쇼. 태수 씨의 지령이오."
"태수씨?" - P56

내 생전 남의 대변을 사진으로 찍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병원 생활이라는 게 그랬다. 개인의 모든 식생에 집중하게 되었고 작은 변화하나에도 심장이 내려앉거나 자그마한 희망을 품게되었다. - P67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들어서." - P73

차장님, 평생 차장님으로 남아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차장님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럴것 같지?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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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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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초반부의 예술론에 취하듯 홀리고 나면 후반부 미친남자의 판소리가 광광 울려 퍼집니다… 그야 말로 미친 사랑의 노래 이 책은 소설보다 장시에 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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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 P489

이날을 기다렸다. 늘 이날을 기다렸지. 이 병을 샀을 때부터언젠가 올 이날을 고대했다. 마셔 보자. 37년 전에 병입한, 31년산 캠벨타운 위스키가 어떤 맛을 내는지. 온더록스 잔에 아버지는 넉넉히 위스키를 따라 내게 건넸다. - P491

오면서 밟아 왔던 그 언 눈이 아니라 싱싱하고 보들보들한 새 눈이었고, 이 눈 덕분에 불길은 얌전하고 착실하게 이 증류소만을 태워줄 터였다. 고생 끝에 낙이 있었다. - P509

톡, 톡, 톡, 톡. 자른 손톱을 줄로 갈고 15분 정도 따뜻한 수건을 덮은 채 마사지를 받은 나는 나른한 기지개와 함께 바버숍의자에서 일어섰다. 마사지를 해줬던 여자가 재킷을 가져와 뒤에서 입혀줬다. 나는 재킷을 입고 느슨히 했던 넥타이를 바짝당겨 맸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어떻게 봐도 방화범처럼 보이지 않는,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기품 있고 다소 권위적이지만 섬세하고 앳된 인상의 남자, 내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아버지의 분신, 같은 성을 물려받은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혈족이 거울 속에 있었다. - P524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나는 하진한테 가야 했다.
수갑을 차고 철창에 갇히더라도, 하진의 저주를 받고 성대가 찢어질 것 같은 하진의 절규를 듣더라도, 그 때문에 내가 한 번도느껴 본 적 없는 고통과 후회를 느끼고 차라리 내 손으로 모가지에 칼을 쑤셔 박고 싶어지더라도 이러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얘기를 맞추고 내 거짓말을 짜맞추고 그런 걸, 그따위걸 나는 할 수 없었다. 가야 했다. - P536

나는 기다렸다. 하진이 나아지기를, 다시 일어서기를 하진은 그럴 수 있는 여자니까. 이전까지, 그 모든 일에도 꺾이지 않고 더 올곧고 옹골차게 자신을 길러 냈던 사람이니까. 처음부터먼저 성큼성큼 다가왔던, 한창 말다툼 중에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내가 안아 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안아 주던,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 삶까지 강력하게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이니까. 그게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든 게 재가 돼도 재가 될 수 없는 것을가진 내가 사랑한 하진. - P553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안 했죠. 준연은 두 손을 드러내 보였다. 하진과 사랑을 하지도 않았고 해원 씨한테 하진을 놓아 달라고도 안 했고 하진에게 해원 씨가 나한테 와서 그런 짓까지했다는 말도 안 했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전. 아무것도 한게없는데, 다 해원 씨 혼자 벌인 일이죠. 다. 전부 다 해원 씨 혼자 - P564

우린 악연인가요?
오늘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나요? -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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