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 P489
이날을 기다렸다. 늘 이날을 기다렸지. 이 병을 샀을 때부터언젠가 올 이날을 고대했다. 마셔 보자. 37년 전에 병입한, 31년산 캠벨타운 위스키가 어떤 맛을 내는지. 온더록스 잔에 아버지는 넉넉히 위스키를 따라 내게 건넸다. - P491
오면서 밟아 왔던 그 언 눈이 아니라 싱싱하고 보들보들한 새 눈이었고, 이 눈 덕분에 불길은 얌전하고 착실하게 이 증류소만을 태워줄 터였다. 고생 끝에 낙이 있었다. - P509
톡, 톡, 톡, 톡. 자른 손톱을 줄로 갈고 15분 정도 따뜻한 수건을 덮은 채 마사지를 받은 나는 나른한 기지개와 함께 바버숍의자에서 일어섰다. 마사지를 해줬던 여자가 재킷을 가져와 뒤에서 입혀줬다. 나는 재킷을 입고 느슨히 했던 넥타이를 바짝당겨 맸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어떻게 봐도 방화범처럼 보이지 않는,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기품 있고 다소 권위적이지만 섬세하고 앳된 인상의 남자, 내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아버지의 분신, 같은 성을 물려받은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혈족이 거울 속에 있었다. - P524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나는 하진한테 가야 했다. 수갑을 차고 철창에 갇히더라도, 하진의 저주를 받고 성대가 찢어질 것 같은 하진의 절규를 듣더라도, 그 때문에 내가 한 번도느껴 본 적 없는 고통과 후회를 느끼고 차라리 내 손으로 모가지에 칼을 쑤셔 박고 싶어지더라도 이러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얘기를 맞추고 내 거짓말을 짜맞추고 그런 걸, 그따위걸 나는 할 수 없었다. 가야 했다. - P536
나는 기다렸다. 하진이 나아지기를, 다시 일어서기를 하진은 그럴 수 있는 여자니까. 이전까지, 그 모든 일에도 꺾이지 않고 더 올곧고 옹골차게 자신을 길러 냈던 사람이니까. 처음부터먼저 성큼성큼 다가왔던, 한창 말다툼 중에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내가 안아 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안아 주던,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 삶까지 강력하게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이니까. 그게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든 게 재가 돼도 재가 될 수 없는 것을가진 내가 사랑한 하진. - P553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안 했죠. 준연은 두 손을 드러내 보였다. 하진과 사랑을 하지도 않았고 해원 씨한테 하진을 놓아 달라고도 안 했고 하진에게 해원 씨가 나한테 와서 그런 짓까지했다는 말도 안 했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전. 아무것도 한게없는데, 다 해원 씨 혼자 벌인 일이죠. 다. 전부 다 해원 씨 혼자 - P564
우린 악연인가요? 오늘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나요? -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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