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는 빗장을 열면서 그가 자신을 내보낸 다음 문을 잠가버릴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를 먼저 내보내고 뒤따라 나갔다. - P75

가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얹고 냉장고 깊숙이에서 케이크를 꺼냈고 기지개를 켜면서이제 그의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 P81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12월이었고, 또 한 해의 막이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너무 나이가 들기 전에하고 싶었다. 분명 실망스러우리라 생각했다. - P84

"당신 같은 타입 알아요." 그가 말했다. "야성적이죠. 당신은 야성적인 중산층 여자예요." - P89

"당신," 그가 말했다. "탐험에 소질 있던데요." 그가 소파등받이 뒤에서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 P95

그날 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빌려주는 사람처럼 게걸스러웠다. 그가 하지 않을 일은 없었다. - P98

그는 손에서 힘을 뺐지만 미안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낮의 빛이 다 빠졌다. 황혼이 하늘을 물들이고 대낮의 빛을어둠으로 바꾸려고 꼬드겼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 동안걸으면서 일요일의 고요함을 느끼고 얼음장 같은 바람 때문에 나무가 긴장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P105

자꾸 바뀌는 빨간 숫자를 보았다. 고양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사과 씨처럼 새까맸다. 그녀는 남극을,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를 생각했다. 그런 다음 지옥을,
그리고 영원을 생각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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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지만 그전에 마치 바위를 타넘듯 순식간에 내 왼 발등으로기어올라, 잠깐 동안 내 발목을 한번 휘감았고, 그러고 나서 어떤이유에서인지 방향을 바꾸어 수풀이 아닌 강물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지듯 들어가, 살아 있는 듯 현란하게 반짝이는 무지갯빛의파편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조금의동요도 보이지 않았기에 자신은 남몰래 감탄하고 있었다고. 하지만나는 맹세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수면에서 어른거리던 작고 환한 빛 조각 하나가 살짝 고개를 치켜들듯 허공으로 떨어져나와 홀로 빠르게 멀어져가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P195

또한 불행한 사건이나 죽음은 반드시 살인사건이 아니라도 일어나며, 신기하게도 악의나 부주의와는 무관해 보이는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는 느낌을 그는 받았다고 했다. - P198

했다. 내 눈이 오직 눈먼 거울인 것처럼 생각하라고, 눈먼 탐정이내게 말했다. 그러면 정반대의 것이 비친다. 지금 여기가 아닌 그무엇이 보려고 애쓰지 말라고 눈먼 탐정은 말했다. 정반대의 것은 우리의 눈에 스스로를 저절로 비추기 때문이다. - P207

그가 준 동전을 한 손에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눈물을 닦으면서 길가 바위에 앉아 있다. 멀리 내게는 들리지 않는 곳에서, 학교가 시작하는 종소리는 이미 울려퍼진 다음이다. 나는 떨어져나왔고, 나는 멀어진다. 기나긴 하루가 될 것이다. 석양 없는 저녁과개 없는 밤이 찾아올 때까지. 먼길을 갈 것이다. - P222

슬픔에 잠긴 채 길을 가던 두 남자는 어스름 속에서 홀로 걸어가는 한 행인으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 슬퍼하느냐고. 남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스승이죽었고, 그것도 아주 참혹하고 비참하게, 그러므로 그의 죽음을슬퍼한다고 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들은 길 위에서 만난 그 행인이 바로 그 스승인 것을 알아차린다. 죽은 자와의 예고 없는 해후.
두 남자 중 한 명의 이름은 클레오파스라고 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인근의 마을, 클레오파스의 고향인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다. - P223

익숙한 인식이나 감정의 회로를 이탈하며 헤매는일은 미지에의 모험에 근사하다. 그러하니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손에 넣는 일(소유)이라기보다, 자기(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놓고, 약간의 불안과 설렘을 감각하며낯선 세계의 윤곽을 더듬어보는 사건에 가깝다. - P227

. 하지만 그 모든 반복과 변주 속에서도 모든 만.
남과 작별은 처음과 같지 않은가. 우리는 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듯 만나고,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는 듯 헤어진다. - P232

. 때론 전모를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감각하는 일인지 모른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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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수, 이거 확실한거야?"
"저쪽 변호사가 직접 보낸 거야. 한국 오자마자 그동안 모아둔 자료 싹 제출했나 봐. 결과 뻔하다고 빨리 합의하자고 압박하는데……."

아빠, 저 서울 왔어요! - P76

"재이가 나한테 이러는 거 처음이야. 나한테 뭘 하자는 얘기를 평생 안 하던 애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거라고, 잘은 몰라도 보내기 전에 고민 많이 했을 거야." - P79

아빠 노릇 하지 마. - P86

"내가, 아니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 P91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이에요. 다 빠바쎄니아."
재이의 입 모양을 따라 수한이 천천히 따라 말했다.
"다빠, 빠바쎄니아."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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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순간에 곁에 존재한 준이치. 나와 다른 종이지만 함께한 모든 순간에 ‘곁에 있음‘을 가르쳐준 고양잇과 동물. 그 ‘있음‘을 알면서 떠나려고 했던 내 선택을 후회한다. 반성한다. 사죄한다. 나는 이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죽음으로 어쩔 수 없이 떠나게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떠나지않고 존재할 것이다. - P204

아니, 이게 몸이 되게 무겁지 않아?
뭐 뜨지도 않고, 아예 몸이 땅에 붙은 거 같다니까.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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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장르적‘이거나 ‘감정을 지시하는 식으로 음악을 쓰는 데 너무나 노련해서 너무나 잘 알아서 닳고 닳았다 - P182

<아바타>를 눈을 가리고 본다고 생각해보라.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지금 어떤 장면이 나오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맞힐 수 있을 것이다. 액션인지, 로맨스인지, 감동인지를. 하지만 매번 성공할 수는 없다. - P182

하지만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침묵하고자 한다면 완벽한침묵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관은 그 어떤 공간보다도 방음이 잘되는 곳이니까. 그래서 ‘무음‘은 비일상적 사운드이다. - P196

움직이던 사람은 ‘시작‘ 사인이 떨어지면 ‘얼음‘ 상태로 멈춘다. 그래야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노이즈를 만들어낸다니까. 그리고 촬영이 시작된다. - P188

영화 속에서 가족의 일상 대화와 비일상적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해야 이 대목이 우리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때로 가족과도 못 할 이야기를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를 타인과 나눈다. - P191

영화관 바깥의 삶이 스크린 위의 삶과 겹친다. 그것은 전혀 같지 않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어떤 것은 영영 이해하지 못한 채 남겨질 테고, 어떤 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되어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겨질 것이다. 그리고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영화관을나선다. - P191

이 엔딩의 뜻이 무엇인지 정답을 찾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내 삶의 90분 혹은 180분을 어떻게 대신 살아냈는가를 체험하는 데 있다. 복선도 중요하고 줄거리도 중요하지만 자기 전 불쑥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들은 줄거리 때문이 아닐 때가 많다. 영화가 보게 만든 빛, 듣게 만든소리, 따라 짓게 만든 표정과 웃고 울게 만든 리듬. 공명하는 순간을 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볼 수있을 것이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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