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하지만 그전에 마치 바위를 타넘듯 순식간에 내 왼 발등으로기어올라, 잠깐 동안 내 발목을 한번 휘감았고, 그러고 나서 어떤이유에서인지 방향을 바꾸어 수풀이 아닌 강물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지듯 들어가, 살아 있는 듯 현란하게 반짝이는 무지갯빛의파편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조금의동요도 보이지 않았기에 자신은 남몰래 감탄하고 있었다고. 하지만나는 맹세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수면에서 어른거리던 작고 환한 빛 조각 하나가 살짝 고개를 치켜들듯 허공으로 떨어져나와 홀로 빠르게 멀어져가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P195

또한 불행한 사건이나 죽음은 반드시 살인사건이 아니라도 일어나며, 신기하게도 악의나 부주의와는 무관해 보이는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는 느낌을 그는 받았다고 했다. - P198

했다. 내 눈이 오직 눈먼 거울인 것처럼 생각하라고, 눈먼 탐정이내게 말했다. 그러면 정반대의 것이 비친다. 지금 여기가 아닌 그무엇이 보려고 애쓰지 말라고 눈먼 탐정은 말했다. 정반대의 것은 우리의 눈에 스스로를 저절로 비추기 때문이다. - P207

그가 준 동전을 한 손에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눈물을 닦으면서 길가 바위에 앉아 있다. 멀리 내게는 들리지 않는 곳에서, 학교가 시작하는 종소리는 이미 울려퍼진 다음이다. 나는 떨어져나왔고, 나는 멀어진다. 기나긴 하루가 될 것이다. 석양 없는 저녁과개 없는 밤이 찾아올 때까지. 먼길을 갈 것이다. - P222

슬픔에 잠긴 채 길을 가던 두 남자는 어스름 속에서 홀로 걸어가는 한 행인으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 슬퍼하느냐고. 남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스승이죽었고, 그것도 아주 참혹하고 비참하게, 그러므로 그의 죽음을슬퍼한다고 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들은 길 위에서 만난 그 행인이 바로 그 스승인 것을 알아차린다. 죽은 자와의 예고 없는 해후.
두 남자 중 한 명의 이름은 클레오파스라고 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인근의 마을, 클레오파스의 고향인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다. - P223

익숙한 인식이나 감정의 회로를 이탈하며 헤매는일은 미지에의 모험에 근사하다. 그러하니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손에 넣는 일(소유)이라기보다, 자기(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놓고, 약간의 불안과 설렘을 감각하며낯선 세계의 윤곽을 더듬어보는 사건에 가깝다. - P227

. 하지만 그 모든 반복과 변주 속에서도 모든 만.
남과 작별은 처음과 같지 않은가. 우리는 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듯 만나고,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는 듯 헤어진다. - P232

. 때론 전모를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감각하는 일인지 모른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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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수, 이거 확실한거야?"
"저쪽 변호사가 직접 보낸 거야. 한국 오자마자 그동안 모아둔 자료 싹 제출했나 봐. 결과 뻔하다고 빨리 합의하자고 압박하는데……."

아빠, 저 서울 왔어요! - P76

"재이가 나한테 이러는 거 처음이야. 나한테 뭘 하자는 얘기를 평생 안 하던 애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거라고, 잘은 몰라도 보내기 전에 고민 많이 했을 거야." - P79

아빠 노릇 하지 마. - P86

"내가, 아니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 P91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이에요. 다 빠바쎄니아."
재이의 입 모양을 따라 수한이 천천히 따라 말했다.
"다빠, 빠바쎄니아."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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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순간에 곁에 존재한 준이치. 나와 다른 종이지만 함께한 모든 순간에 ‘곁에 있음‘을 가르쳐준 고양잇과 동물. 그 ‘있음‘을 알면서 떠나려고 했던 내 선택을 후회한다. 반성한다. 사죄한다. 나는 이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죽음으로 어쩔 수 없이 떠나게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떠나지않고 존재할 것이다. - P204

아니, 이게 몸이 되게 무겁지 않아?
뭐 뜨지도 않고, 아예 몸이 땅에 붙은 거 같다니까.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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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장르적‘이거나 ‘감정을 지시하는 식으로 음악을 쓰는 데 너무나 노련해서 너무나 잘 알아서 닳고 닳았다 - P182

<아바타>를 눈을 가리고 본다고 생각해보라.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지금 어떤 장면이 나오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맞힐 수 있을 것이다. 액션인지, 로맨스인지, 감동인지를. 하지만 매번 성공할 수는 없다. - P182

하지만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침묵하고자 한다면 완벽한침묵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관은 그 어떤 공간보다도 방음이 잘되는 곳이니까. 그래서 ‘무음‘은 비일상적 사운드이다. - P196

움직이던 사람은 ‘시작‘ 사인이 떨어지면 ‘얼음‘ 상태로 멈춘다. 그래야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노이즈를 만들어낸다니까. 그리고 촬영이 시작된다. - P188

영화 속에서 가족의 일상 대화와 비일상적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해야 이 대목이 우리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때로 가족과도 못 할 이야기를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를 타인과 나눈다. - P191

영화관 바깥의 삶이 스크린 위의 삶과 겹친다. 그것은 전혀 같지 않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어떤 것은 영영 이해하지 못한 채 남겨질 테고, 어떤 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되어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겨질 것이다. 그리고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영화관을나선다. - P191

이 엔딩의 뜻이 무엇인지 정답을 찾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내 삶의 90분 혹은 180분을 어떻게 대신 살아냈는가를 체험하는 데 있다. 복선도 중요하고 줄거리도 중요하지만 자기 전 불쑥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들은 줄거리 때문이 아닐 때가 많다. 영화가 보게 만든 빛, 듣게 만든소리, 따라 짓게 만든 표정과 웃고 울게 만든 리듬. 공명하는 순간을 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볼 수있을 것이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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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셔터를 잘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날 수한은 평소와 달리 좀처럼 일에 집중할 수없었다. 모두가 퇴근하고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화분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치우고 물을 듬뿍 주며살며시 마른 가지를 어루만졌다. 마치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듯이.

수한은 거실 소파 끄트머리에 기대 앉았다. 소파를 놀이터 삼아 방방 뛰어놀기 좋아하는 재이 탓에수한의 자리는 늘 끄트머리였다. 수한은 움푹 파여있는 소파 가운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자리를가만히 손으로 어루만졌다.

"러시아 옆에 있는 작은 나라요."
"모델 일로 잠깐 한국에 왔는데, 마라톤 대회에서제가 첫눈에 반해 붙잡았습니다."

리수한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상자 이전의 기억은자신에게 없다고 말했다. 있다 한들 뱃속 태아의 기억처럼 상실되었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 말 때문인지, 기억을 공유한 탓이었는지, 다음 날부터 수한은서재 문을 열어둔 채로 집 밖을 나섰다. - P57

"손을 먼저 누가 잡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아,
그건 행복한 순간이라 안 따지는 건가. 불행에만 인과관계를 따지는 거야?" - P67

"불편한 감정을 불편해하면 평생 네 마음으로부터도망치면서 사는 거야."
"..."
"마음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아. 어딘가에 쌓여 있을 뿐이지."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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