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던 길로 되돌아간다는 건 확실한 죽음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었지요.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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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소설을 쓰리라 마음먹었을 즈음에 한소공의 마교사전을 읽었다. 책 속 마교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 ‘죽었다‘고 말하는 대신 ‘흩어져버렸다‘고 표현한다. 물과 흙으로,
혹은 바람으로, 구름과 안개와 공기로 흩어져버린 사람들의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소설을 쓰는 건정말로 세상에 흩어진 것들을 모으는 일인 것 같다. 슬프고 무섭고 귀엽고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반들반들 윤이나게 닦고 이어서 엮어본다. 모아서 잇다보면 원래 그 자리에있었던 것처럼 딱 들어맞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연이 만들어낸 기적처럼.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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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야기는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나는 이문제로 오래 고민해 왔다. 혼자 정리한 바를 말하자면 이야기가상처를 대하는 태도는 회피하기, 덧씌우기, 마주하기로 꼽을 수있다. - P290

그러나 큰유진의 이야기는 상처가 혼자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아픔을 나눌 수 있음을 여러 형태로 보여 준다.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나아가 아예 상처와 무관한 사람과도 상처를, 아픔을 나눌 수 있다. 상처는 홀로 만드는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다. 상처를 주고받은 경험은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 P293

이야기는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는 이들을 옹호하지 않지만,
이들을 성실하게 그려 냄으로써 상처를 나눈다는 것이 간단치않은 일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큰유진과 작은유진의상처가 단순화된 이야기 장치, 곧 ‘아직 치유 전이다. 지금 치유중이다. 이제 치유되었다.‘라는 도식을 꿰는 앙상한 줄기가 되지않을 수 있었다. - P299

내가 다시 쓰는 작가의 말」에서 「유진과 유진』을 쓴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된 건 딸아이 덕분이야. 그 아이는 이제 언제어디서든 할 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당당하고 멋진 여성으로 성장했단다. 우리는 가끔 아빠가 끝까지 범인을 잡아내고,
엄마가 욕설을 퍼부으며 파리채를 휘두르고, 끝내는 그놈을 감옥에 보낸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곤 해. - P304

딸아이가 말하더구나. 엄마가 자기 잘못이 아님을 처음부터말해 주었고, 엄마 아빠가 더 사랑해 주었고, 아빠가 가해자를잡아 벌주었기 때문에 그 일이 자신에게 아무런 억울함이나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고. 이제는 놀다가 넘어진 일만큼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라고. 그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 주라고.
또 다른 유진과 유진아, 네가 겪은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네게 무슨 일이 있었든 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야. 어떤 상황에서도 그 사실을 잊지 말렴.
.
2020년 늦가을이금이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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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 그게 문제가 될까?
차인석이 묻자 규한이 목소리를 높였다. - P233

석주가 조심스레 우려를 표하자 규한이 말했다. - P233

석주는 망국의 밤」의 출간 과정이 순탄치 않으리라고 직감했으나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얼마간 바꿔놓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 P234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모조리 고쳐버리면 그 글은 뭐가 되는 겁니까? 논란을 피하겠다고 원고를 누더기로 만드는 게작가를 위하는 건 아니지요. - P240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래요. 이 원고는 이제 홍선생 것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 P242

서로를 원망하진 않았다. 언쟁하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대역을 수행하는 것처럼 덤덤했다. 모든 게 너무나 조용하고 매끄러워서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마웠다는 인사와 잘 지내라는 말을 형식적으로 건네면서도 석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원호가 듣고 싶었던 말인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말인지도. - P251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석주는 늘 했다. 이따금 부담감으로, 압박감으로 돌변하곤 하던 그 기대를 놓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를 탐독하고 완성하는 데 많은시간을 할애했다. 그래서 일상을 돌보는 데 서툴렀고 힘껏 붙잡아야 할 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날, 석주는 처음으로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그것은 닮은꼴의 하루가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는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것 같았다.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 P263

석주는 낯익은 그 모습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오래전선배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떨림과설렘, 서투름과 투박함, 선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 한번시작하면 멈출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백지와 같은 자신의삶에 높이와 깊이를 만들고 명암을 부여한 바로 그것. - P271

책을 좋아하나요?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맞다. 그건 오래전 사랑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그것이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지도 모른 채, 그저 속수무책 그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던 석주에게 누군가 건넸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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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출간되어 한 부 보냅니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참흡족해하셨을 것 같네요. 고생 많이 했습니다. - P99

장선배가 사수였던 장민재를 가리킨다는 걸 석주는 한참만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에게 이 회사에 지원한다고 알린적이 없었다. 그저 서유화의 책을 받은 뒤 짧은 감사 메일을쓰면서 이 일을 조금 더 해보고 싶다고 말한 게 전부였다. - P103

문학책? 어떤 문학책?
오래 기억에 남는...... 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우, 움직이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 P105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석주는 아버지가 두고 간 지폐를보았다. 구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 만원권 지폐 스무 장이전날 아버지가 무심하게 훑어본 책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녀는 그 돈을 아끼는 몇 권의 책에 부적처럼 나눠 끼워넣고 오래도록 쓰지 않았다. - P111

글자들은 서로 다른 자간과 행간 속에 알맞게 자리했다. 각기다른 세부를 통해 고유함을 부여받은 책들은 자신만의 유일한 모습으로 빛났다. 그 사각의 형태는 언어를 담기에 가장완벽한 형식처럼 보였다. - P113

석주는 그곳이 주는 소속감이 좋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닮은꼴의 꿈을 좇는 듯 보였다. 그들의목표는 추상적이고 유동적이었으나 그래서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석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 P121

장점이 많은 원고인데 제 말이 투박하게 나간 것 같아요. - P127

책에 관해서라면, 글에 관해서라면 빈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석주는 그의 정중한 답신에 용기를 얻었다. 그녀는 장민재의 그런 고지식함과 한결같음을 존경했다. - P134

아니, 그들조차 의식하지 못한 순수한 열정이 다가와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 P141

석주가 아는 사랑은 문학을 통해 배운 것이어서 비현실적이고 불완전했다. 그녀는 사랑이 한 사람의 삶을 전복시킬 수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사랑은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특권 같았고, 허구의 형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 P144

책이 독자에게 가닿는 과정은 길고 복잡했다. 배본사와 도매상, 총판과 서점 등 여러 유통 단계를 거치는 동안 책값은수시로 달라졌고, 판매 수량을 예측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품과 외상 거래가 관행처럼 굳어 있었다. - P153

다정하고도 필사적인 그 산책은 일 년 넘게 이어졌다. 그시기, 두 사람이 함께 걸어서 다다를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않았다. - P163

다만 그런 순간엔 그의 관심이 환한 곳이 아니라 어두운 곳으로, 이기는 쪽이 아니라 지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석주가 결코 알 수도, 닿을 수도없는 그의 내면의 그늘 같았고, 그녀가 다루는 문학의 세계와도 얼마간 닮아 보였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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