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날씨가 좋을 때면 손바닥만한 발코니에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집에서 햇살이 최대로 비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발코니에 작은 정원용 탁자와소파를 갖다놓고 거기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 P17

언젠가 나는 라디오에서 누군가가 오스트리아 작가인 FM의 집을 묘사하는 말을 들었다. "그곳은 엄청난 혼돈이었죠.
원고와 책이 사방에 가득 쌓여 있었어요. 사실 그녀의 집에는그랜드피아노가 있었는데, 방문자들 누구도 피아노를 보지 못했을 정도랍니다…………" - P18

눈부신 여름날, 한 여자와 한 남자. 기나긴 대화 자기 자신을 향한 침묵과 관찰로 이루어진 대화이자 독백. 센강 하구가내려다보이는 해변의 카페, 마치 무대와 같은 고정된 공간, 하나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이인극이며 대화극. 그러나동시에 모놀로그인 죽음과 공포가 언어로 표현된다. - P29

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 아마도 나는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고, 그런데 살인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탐정도 나오지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러나 뭔가를 찾는사람들이 나오겠지. 그게 범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이 탐정이나 형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 P32

5월의 정원은 잊게 만든다. 우리는 잊는다. 말과 우리 자신을 - P37

봄이 돌아오고, 겨울 동안 비워둔 정원을 처음 찾는 일은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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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배우 김신록입니다. 2004년에 <서바이벌 캘린더〉라는 작품으로 대학로 연극 무대에 데뷔한 후로 연극을 하고,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오래 해왔습니다. 그러다 2020년,
tvN의 <방법>이라는 드라마에서 무당 석희 역을 연기한 것을 계기로 영상 매체와 인연이 닿았고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에서 박정자를 연기하면서 여러 매체와인터뷰할 기회가 늘어났습니다. - P5

이미 죽었거나 나이 든 대가의 연기론을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역동하고 있는 현장의 배우들과나눈 연기에 대한 지적인 대화가 얼마나 생생하고 벅찼는지모릅니다. - P7

김신록 근래에 무용 공연을 보면서 너무 쿨하고 재밌다고 생각했다. 몸에 대한 직접적인 탐구도 흥미롭고. 그러면서 동시에 연극에는 그와 다른 할 일,
배우의 몸이 할 수 있는 탐구가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인간을 보여주는 일‘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매 순간 모든 개인의 욕구가 더 드러났으면좋겠다. - P17

황혜란 오히려 인식이 촘촘해질수록 어디로든 갈 수 있는힘, 충동이 생긴다. 찰나까지 인식해낼 때, 뭉텅이가 아니라세밀한 부분부분까지, 듬성듬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매 순간을 인식해낼 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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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작은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있으랴. 역시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만의 사정이있었던 것이다.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수 없었던 그러한 사정이 - P131

황사장에게 조금씩 끌려가던 노인이 뒤돌아 침을 퉤뱉었다. 빨갱이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저노인 하나뿐이겠는가. 그게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이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경우바르고 똑똑한 아버지가 21세기인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함부로 침 뱉어도 되는 빨갱이일 뿐인 것이다. - P133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 P137

"그이가 밥숟가락을 놓고 멀뚱멀뚱 허공을 바라보면서나지막이 웅얼거렸다.
"노동이……… 노동이……… 힘들어." - P150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마당을 빙 둘러 내달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좋았는지 나는 아버지의 목 위에서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웃어젖혔다. 우물가에 핀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혔다. - P158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오거리슈퍼였다. 그보다멀 게 분명한, 옛 처제의 딸이 운영하는 슈퍼를 아버지는일부러 찾아서 갔을 것이다.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감옥일지도 모른다. - P163

"누구긴 누구겄냐! 늬 어매 첫서방이제 서방 앞에서첫서방 야그를 저래 당당허니 꺼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늬 어매 하나배끼 읎을 것이다." - P167

"지한테 득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등을 놀리는것이 민중이여.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은 폴쎄 틀레묵은것이제."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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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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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애착 을 통해 활주하는 글을 읽는 낯선 매력을 알려준 #비비언고닉 의 책 #짝없는여자와도시 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매끄럽게 신랄하고 섬짓하게 솔직하다.

소제목 없이 뻗어 나가는 그의 에세이를 따라가는 건 마치 가이드 없는 탐험을 떠나는 일이기도 한데 이게 자주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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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내가 보이지 않는 막이라는 표현을 쓰면 그런경험에 대한 분석은 저마다 제각각일지언정 무슨얘긴지 단박에 알아듣는 여자들을 알게 됐다. 늘 그런식이죠, 그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여자들은 전부터 쭉 그래왔던 그 방식과 이미 화해를한 상태였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게는 그일이 매트리스 스무 장 아래 깔린 완두콩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내 영혼을 쑤셔대는 통에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다 - P39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누군가의 징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약속으로탈주하려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 도시가 그 여파로어지럽게 동요하는 듯이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 - P44

그러더니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는 사는 게 적성에 안 맞아" 내가 말한다.
"누군들 맞겠어?" 그는 내 쪽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대꾸한다.
* - P48

랠프 월도 에머슨이 말했다. "혼자인 사람은 누구나진실하다. 타인이 들어서는 순간 위선도 시작된다. (・・・)그러니 친구란, 본질적으로 일종의 역설일 수밖에 없다" - P54

그가 방금 한 그 말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거리를좁히지 못한다-벌써 몇 시간째 그와 함께 있으면서도나는 내내 혼자였다. 하지만 그저 무의미하게 지나갔을저녁에 그의 말이 부여한 명징함 덕분에, 삶이 조금은 더견딜 만하게 느껴진다 - P58

늘었다. 영 괴로웠다. 투표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한참 전부터 나는 부르짖고 다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수가 있어!" 엄마가 느끼던 종류의 그 결핍감에 나 역시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이상적인 친구‘를빼앗기는 바람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결핍을 겉으로드러내는 것만 남은 사람처럼. - P65

저 남자는 누구지? 나는 생각했다.
저이는 내 짝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또 생각했다.
1년 뒤 우린 이혼했다. - P70

나는 여전히 엄마의 딸이었다. 엄마가 원판이면 나는현상이었지만, 어쨌든 우린 둘 다 거기에 있었다. 결국엔혼자였다. 제 짝이 아닌 사람과 함께.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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