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공항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일종의 관문 같다. 새로운 세상에 이제 막 도착해 앞으로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어서 막연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동시에 뒤에 두고 온 모든 것이 벌써 그리워지는 느낌, 공항은 이런 감정을 증폭시키는 공간이다. 공항에는 떠남과 돌아옴이 있고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기다림과 허전함이 있다. 물론 이 같은 감정들은 세상 어디에나있다. 하지만 모든 곳에 균질하게 분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감정들은 특정 장소에서 더 밀도가 높다. 공항은 사랑과 그리움, 설렘, 그리고 내가 속한 도시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 보고 싶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기쁨의 밀도가 높아지는 곳이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어떤 개인을 망가뜨릴 수도, 행운이 따르기만 한다면 성취감을 줄 수도 있다. 스스로 이런행운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뉴욕에 와야 한다.*•E. B. White, Here is New York」, Little Bookroom, 2000. - P23

그리고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생존은 중요한 문제이다. 거대하고 불안정한, 예민하고 냉정한 뉴욕에서 살아남는 데는 정말 운이 필요하다. 뉴욕은 그 운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 운명론자들을 위한 도시일지도모른다.

이를테면 뮤지컬 <렌트> 속 스콰터(Squatter)들이 이스트빌리지의 주인이었던 시절. 빈집을 점유하고사는 스콰터는 부동산을 사랑하는 한국 사람의 감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미국적인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타인 소유의 집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일정 기간 거주하면 집주인이 그 사람의 물건을 치울수도 마음대로 내쫓을 수도 없게 된다(퇴거를 위해서는 법원 판결이 필요하다). 왠지 사문화된 법조문처럼들리지만 꽤 역사가 깊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스콰터들이 일으킨 크고 작은 문제들을 심심치 않게 뉴스에서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스콰터들은 이스트빌리지 특유의 서브컬처의 토대가 되었다.

그로서리 스토어에 장을 보러 갔다. 하지만 매대는 정말 비어 있었다. 화장실 휴지도 파스타도 없었다. 자본주의 최첨단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생필품이 없어 사지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집으로돌아와 배달 앱을 모두 열어서 휴지를 검색해봤다. 역시 재고가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집에 쌀이 얼마나있는지 확인하고 미리 주문을 해두려 했지만 가장 가까운 배달 가능날짜는 3주 뒤였다.

언젠가부터 이 그림 속에 있는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과 아무런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뉘어지기 시작했다. 차별과 혐오는 사실은 공기 같은 것이다. 막상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치 기압처럼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일정한 압력을 만들어내는 무언가이다.

『뉴요커』에서 ‘Crying in H mart‘라는 글의 제목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 제목이 가진 힘은 굉장하다. H마트는 외국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뿌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닫게 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국에 대한 향수를 가장 많이 달래는 곳이면서 동시에 고국에 대한 향수를 가장 많이 느끼게만드는 아이러니한 공간이다. 가족과 떨어져 미국에서 살고 있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H마트에서 눈물 맺힐일이 생긴다.

"이걸로 두 근 주세요."
"한우 등심이라서 꽤 나올 것 같은데요."
"그냥 주세요. 가격표는 떼어주시고요."

하지만 뉴요커라면 알고 있지. 어스름에서 살아남았다면 밤도 견뎌낼 거라는 것을.**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미국 태생의 작가). - P66

"뉴욕 사람들이 지겨워지면 언제든 타임스스퀘어에 가면 돼. 거긴 뉴요커들이 없거든."

타임스스퀘어는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서 도착한 광고들을 쏟아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나이아가라폭포이며 동시에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쩌면 세계의 중심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주는 곳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환상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서 뉴욕에 온다. 이건 오직 뉴욕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어쩌면 내가 뉴욕에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도 ‘bottomless brunch‘라고 쓰인 입간판을 보면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식당의 노력에 연대를표하는 마음으로 갑자기 들어가 브런치 칵테일을 한잔이 아니라 여러 잔) 마시고 싶어진다.

여행자와 이민자와 뉴욕 토박이 들이 길바닥에 뒤섞여 8달러짜리 무슬림의 음식을 먹고 있다. 이 풍경 속에서는 누구나 뉴욕이라는 거대한 모자이크의 한 조각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이 장면보다 더 뉴욕이라는 도시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 - P107

‘햄버거‘라는 이름을 걸고 행해지는 모든 이교도적 행위에 계속 분노할 것이다. 햄버거를 두 동강 내고날카로운 이쑤시개까지 꽂아 내는 잔인한 행위를 규탄한다. 마치 냉정한 외과 의사처럼 포크와 나이프로 햄버거를 해부하는 행위에 반대한다. 햄버거를 손으로 들고 먹지 못하게 하는 갖가지 채소와 소스를 거부할 것이다. 얼렸다 녹인 것이 분명한 마른 패티는 퇴출당해야 한다. 푸아그라를 쓰고 트러플을 올리는 탐욕스러운햄버거는 회개하라.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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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기적적으로, 등 뒤를 쌔액 하고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게 자전거를 탄 사람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나는 소리질렀다. 저기요. 저기요오, 잠시만요, 119 좀, 119 좀 불러 주세요오오오. 멀어지던 자전거 후미등의 빨간 불빛이 멈춰섰다. 이윽고 그것이 되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살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 P207

안 아프게 해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네, 제발요, 하고 말했고 그러자마자 고통은 없어졌다. 나는 조금씩 무릎에 힘을주어 보았다. 다치기 전처럼 모든 것이 제대로 움직였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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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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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숨으로, 환한 진심으로 겨울같이 시린 마음들을 지나치지 않고 멈추어 꿰어낸 이야기의 조각보. 그 너비와 두께를 펼쳐내어 애써 덮어주는 미더운 작가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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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전시실은 권은이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들로 채워져있었다. - P221

그 사진과 사진에 대한 권은의 설명이 실려 있었다. 권은은 이렇게 썼다. ‘각기 다른 공간에서 찍은 후지사의 반자동 필름카메라는 열두 살의 내게도 살 자격이 있다는 걸 알려준 사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촬영을 떠나기 전날이면 이 필름카메라를 한 장씩 찍으며 내가 왜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않으려 했다. - P222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 있다는 걸......
반장,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승준은 ‘시작‘이라는 제목의 그 사진 앞에서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P223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그 피로감을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들에게 전가하는 영국 사람들얄궂게도 그들은대개 나스차 자매처럼 이민자들이었다-을 대할 때, 아무도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할 때,
목이 졸리는 듯한 두려움에 잠식된다고도...... - P225

"왜, 초조해?"
민영이 물었다.
"그래 보여?"
"초조하면 두 손으로 괜히 무릎을 쓸잖아. 몰랐어?"
・그랬나." - P227

반장 때문에 권은이 죽었다는 반 아이들의 상상 속 목소리가 무서웠던 것도 맞지만, 권은의 방에서 나와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그는 다음번 권은에게 갖다줄 무언가를 이미정해놓곤 했다. - P229

"실은, 난민 캠프 촬영을 마치면 혼자서라도 가자지구로 넘어갈 생각이에요."
"거긴 작년 10월부터 국경이 봉쇄됐다고 들었는데, 가능한일이에요?" - P235

"그래, 양쪽 다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 하지만 민간인이특히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면, 지금은 전쟁이 오히려 명분이 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어. 범죄에 대한 명분 말이야." - P299

한 발 더 다가온 살마가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다치지 마,
라고 말했다.
"다시는, 절대로..…………"
그 말은 단순한 당부가 아니라 그녀의 시간을 호위하는 주문이 되리란 걸, 그 순간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 P241

그녀와 그는 발맞춰 걷기 시작했다. 눈은 아직 쌓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새겨지는 발자국을 상상하는 건어렵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열두 살의 그녀가 빛을 담은조각배 같은 오목한 발자국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으리라. - P242

어딘가에서 셔터를 누르는 순간, 카메라 너머 누군가를 감싸주기 위해.
그 사람의 슬픔을 나눠 갖기 위해. - P243

그 사랑이 늘 평탄한 건 아니었어.
도망치려 한 적도 있었지. - P246

"교체한 부품만 빼면 다 멀쩡하더라고. 스크래치도 거의 없고. 오래 썼을 텐데, 그만큼 앞으로 또 오래 쓸 거야."
카메라를 건네며 그가 말했고,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 P250

거울 속 세상과 그녀를 위해,
영원에서 와서 영원으로 가는 그 무한한 여행의 한가운데서,
멜로디와 함께…빛이,
모여들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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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보다 나쁘지 않은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우 - P109

그래, 바다가 보이느냐.
땅의 끝이 가까워졌느냐, 길이 좁아지느냐, 땅이 다소곳해지더냐, 크게 숨을 들이마셨느냐.
땅끝에 홀로, 우뚝 섰느냐, 근육은 팽팽한 것이냐, 정신은 훤칠한 것이냐.
그리하여, 바다의 끝이 보이느냐, 경계가 선명하게 보이느냐.
그렇다면, 돌아보지 말거라. 거기가 땅끝이라면 끝내, 돌아서지 말아라. 끝끝내 바다와 맞서거라. 마주하거라. - P110

벚꽃터널 안으로 한번 들어가보라. 거기 꽃그늘 뒤덮는또하나의 터널이 있거니와, 눈보다 두 귀가 훨씬 더 커진다.
온몸이 귀가 된다. 귀가 된 온몸은 얇은 스웨터와 면바지 속에서 저절로 더워진다. - P112

이런 시스템은 굳이 벚꽃터널 속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알아야 한다. 지구→ 식물의 뿌리 → 식물의 꽃→ 꿀벌벌꿀→ 인간? 이런 사슬이 이제는 멀리서도 다 보여야 한다(사실 ‘?‘만 빼면 일찍이 교과서에서 다 배운 내용이다). - P113

뒷날 20세기 말엽에, 전설을 전해 듣고, 온몸이 달아 섬주위에서 몇 날 밤을 지새우던 물 사내들은 안개 속에서 다들 익사하고 말았다지요. 아마.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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