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제안은 동시대 일본 작가와 함께 한 권을 써보지 않겠느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제안도 무척 반갑고 의욕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습니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마음이 어두워질 때 이웃나라의 작가들, 문화인들을 생각하곤 하거든요. 한국과 일본의 문화계는 오래도록 서로를 사랑해와서, 외교 분위기가 삼엄할 때에도 다정한 서신들을 교환하고는 합니다. - P7

여러 작가가 같은 키워드로 소설을 쓸 때, 그 키워드는 무엇이어야 할지도 즐거운 고민이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절연‘이라는단어에 가닿았습니다. 우리가 휩쓸려 살아가는 이 시대를 잘 압축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격변하는 세계에서 시시각각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는 개개인들은, 끝없이 서로헤어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건강한 갈등이고 어디부터가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의 시작인지 사람마다 안쪽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어떤 절연은 커다란 소리로 발화되고, 또 어떤 절연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짧게 발음되는 단어가 한 사람 한 사람을 통과해 어떻게 풍성해졌을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절연에 대한 이야기들이 부식된 것은 끊어내고 더 강력한 연결점을 찾기 위한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 P8

"딸애가 장래에 ‘무無‘가 되고 싶대서 난처하네요." - P13

빨간색과 흰색의 가느다란 관이 뜨개질한 것처럼 얽혀 있는 모습은 과연 우리 동네의 집이나 빌딩과는 전혀 달랐고, 『신비로운우리 몸이라는 그림책에서 본 혈관과 비슷했다.
그때부터 전신주나 전선을 보면 ‘여기 ‘감정‘이 흐르고 있구나‘
실감했고, 텔레비전이나 그림책에서 도쿄타워를 보면 무서워서도망쳤다. ‘무섭다‘는 이 기분도 도쿄타워에서 만들어내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P16

"내 말이 느닷없이 ‘무‘라니. 그나저나 미요, 나나코가 ‘무‘가되는 걸 용케 허락했다?"
"응? 아니 그러게 사는 차원이 서로 다르니까. 세대가 다르다는 건 세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른 거잖아?", - P25

아이 키우는 데도 유행이 있다. 아코는 딸과 ‘끈끈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관계‘를 한결같이 유지한다. 우리한테 유행하는 아이와의 관계가 아이 세계에서 유행하는 라이프스타일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 P27

럽기는 해도 성욕 처리가 가능하며, 가만히 두면 집안일을 해주는피와 살을 지닌 도구였다. 딸은 나를 이용해 성욕을 처리하는 일은 없지만, 아무리 성장해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나를 계속 부려먹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미래에는 딸이 우리의 도구가 된다. 그것만이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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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의 삶 같은 건 코딱지만큼도 부럽지 않다고 복희는생각한다. 딸을 보며 하는 생각이다. 글쓰는 것도 싫고 유명한것도 싫기 때문이다. - P183

유명 작가의 삶 같은 건 코딱지만큼도 부럽지 않지만 복희는실감한다. 글쓰기의 세계가 얼마나 영롱한지를 오랫동안 그 곁에서 고구마 마탕이나 해주고 싶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 P191

"네가 너무 아름다운 걸 써서 그래."
유명 작가의 삶 같은 건 코딱지만큼도 부럽지 않지만 복희는실감한다. 글쓰기의 세계가 얼마나 영롱한지를 오랫동안 그 곁에서 고구마 마탕이나 해주고 싶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 P191

"복희씨 아니세요?"
"아니에요······ - P199

한편 남희는 담임선생님과 애매하게 정이 든 초등학생처럼어색한 포즈로 사람을 대한다. 웅이가 싫지는 않지만 그렇다고좋아 죽겠는 건 아니다. 그래도 가끔씩 웅이에게 무언가를 바란다. 이를테면 참치 같은 것 말이다. 그럴 때 숙희와 달리 남희는어눌하게 소리낸다. 영어에 서툰 자가 영어로 말하듯이. 자기로선 아는 어휘가 별로 없다는 듯이. 물론 남희가 어휘를 늘려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웅이가 남희의 언어를 배워야 할 뿐. 남희는 암컷 같지도 수컷 같지도 않다. 남희를 통해 웅이는 젠더 뉴트럴의 한 예시를 본다. - P203

남희가 더욱더 사나운 소리로 북어를 달라며 울고, 복희가 커피는 잊은 거냐며 재촉하고, 슬아는 초췌한 얼굴로 목말라 죽을 것같다고 신음한다.
웅이는 다시 서둘러 부엌으로 간다. 항문에 힘을 주고 간다.
이 집에서 가부장제는 알게 모르게 붕괴되고 있다. - P206

"브라자는 또 왜 해?"
"안 하면 가슴이 티 나잖아."
"해도 티 나거든? 어차피 티날 건데 굳이 왜 해? 그리고 가슴이 있으면 티 나는 게 당연하지 왜 가려?"
"안 하면 사람들 다 쳐다보거든?"
"그러든지 말든지. 만약 너무 쳐다보면 그 사람 잘못이거든?
그런 사람 피하려고 브라자를 하냐? 이렇게 불편한데?"
"넌 작아서 상관없겠지만 나는 안 하면 가슴이 너무 커 보이거든?"
"아니거든? 오히려 더 강조되거든?"
복희는 소리친다. "상관 말라고."
슬아가 마지막으로 알린다. "일 분 남았어." - P214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
"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 P228

그러는 사이 복희는 집중해서 책을 마저 읽는다. 소설은 복희의 눈코입을 통과하며 거의 정확하게 이해받고 있다. 바로 이 사람을 독자로 만나기 위해 몇백 년을 살아남았다는 듯이, 소설은복희의 손 아래에서 영광을 누린다. - P234

"선생님은 먼저 선先에 날 생生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 - P263

"근데 이런 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그럼 전화기 너머에서 미란이가 대답한다.
"저는 애비가 없잖아요."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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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한 뒤로 나무는 점쟁이나 독심술사처럼 용해졌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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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여~!"
그 말에 슬아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고는 긴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70년간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묻자존자와 병찬의 입에서 별별 사연이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슬아의 책은 그것을 열심히 듣고 적은 결과다. 복희는 가방에서 책을 꺼낸 뒤존자에게 건넨다. - P103

슬아 뭐라고 하셨어요?
병찬 "밥사발에도 눈물이 있고 죽사발에도 웃음이 있으니,
죽을 먹어도 웃을 수 있다면 살겠다"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열아홉에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버린겨.
슬아 결혼해보니까 어떠셨어요?
....
존자 해보니까, 안 한 것만 못하.…… - P105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 P109

"나도 삼십대 땐 로즈 시절이었어~"
슬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정한다.
"리즈 시절이겠지......"
복희는 헷갈리는 얼굴로 생각에 잠긴다.
"그게 그거 아닌가?"
"전혀 달라. - P111

"로즈 시절이네." - P117

‘슬아 사장님은 언제 놀아요?"
철이가 묻고 복희가 디저트를 준비하며 대답한다.
"나도 그게 궁금해." - P125

1. 마감을 지켰고 글도 좋은 원고2. 마감은 늦었지만 글이 좋은 원고3. 마감은 지켰지만 글이 별로인 원고4. 마감도 늦었고 글도 별로인 원고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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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당근이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찬란이다. - P28

슬픔에 빠져 주위가 암담할 때 당근을 생각한다. 자신이 화려한 색을 지닌 것도 모른 채 땅속에 잠겨 있는 형광빛의 근채류 식물. 어쩌면 우리가 보는 세계가 이토록 캄캄한것은 마음 주위를 자전하는 빛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휘황과광채는 도리어 주위의 캄캄함을 일깨우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우주로부터 지구로 파견 나온 스파이가 된 것 같다. - P27

물의 날개가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바라본다.
작고 붉은 종들이 가지 사이에 모여 흔들린다.
여름의 부름. - P36

붉은 물방울들이 높이 솟아오른다.
기다림을 통과한 색깔들은 준비가 되어 있다.
손끝의 액체들을 입술로 훑으면,
이종의 두 몸이 서로를 알아보는 신호로서의 감칠맛. - P39

선드라이 토마토를 만드는 일은 태양의 긴 여행을 뒤쫓는 방식들 중 하나라는 것. 열매와 빛이 만나는 곳에서 새로운 여름의 형식을 만들어내는일이라는 것을. - P42

수란을 터트리는 일은 아름답고, 은밀하고, 사랑스럽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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