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과강연 사이 - P41

업무용 메일함을 찬찬히 살펴보니, 원고 청탁과 강연 청탁의 비율이 1대 3에 다다랐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쓰는 일보다 말하는 일을제안 받는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 P41

출판계는충분히 안전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중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 P11

빨래터는 실제 정류장 이름이었고 궁에서 흘러나오는개울이 있는 곳이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동네고양이들도 목을 축이며 빨래터 수문을 통해 창덕궁을 드나들곤 했다. 비탈을 내려가보면 빨래터 물길은 사람이허리를 굽히고 걸어갈 만한 지하 통로로 이어졌다. - P15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 P17

"아부지가 낮이 없네."
"낯 없는데 어떻게 말은 하네." - P25

"그러면 뭔데? 왜 나랑 절교하는데?"
은혜는 해송들 위로 낮게 비행하는 쇠기러기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앉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날개를 길게편채호를 그리고만 있는 새들. - P29

"대온실이 국가등록문화재이긴 한데 좋은 마음으로 안보게 되잖아요. 일제 잔재라고. 창경궁 복원공사 때 다른시설 다 철거되는데 겨우 살아남았죠. 생존 건물인 셈이에요. 기관에서는 그런 면을 꼭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 P33

"그 정도 용기도 없으면서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거야?
다시 강화도로 가겠다는 거야?" - P39

우리는 할머니가 한켤레씩 사준 스케이트를 각자 가지고 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받은 선물이었다. - P45

낙원하숙으로 온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이 집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불행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보면 강화석모도에서 혼자 전학 온 중2짜리 여자애가 그 집의 최약체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하숙집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어떤 병든 습벽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서울로 온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늘 그렇듯 미래를 낙관했다. - P47

바다에 나가면언제나 놀 만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수영을 했느냐는 말은 네 첫 친구가 누구였냐는 말과 같았다. 머릿속에 없어도 그뒤로 기쁨이 계속되었기에 상실을의식할 필요가 없는 망각이었다. - P53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포도주 양조사업을 육성하매 안으로는 쌀술을 포도주로 대체하고 더 나아가 세계 만방에수출한다면 대대의 국민복(國民福)을 일으킬 것이다" - P59

"그 복병은 아주 작은 것이었어. 1밀리미터도 되지는 포도뿌리혹벌레." - P61

가. 제안 사항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을 위한 설계도서내 연혁 및 원형 고증 작성과 관련한 소장 자료 열람 협조를 요청드립니다. - P71

"그러니까요, 배우신 분이 그러면 더 안 되죠. 여기도한국어 하시는 분들 계세요. 자, 에브리바디 레츠고백투조선. 사아, 조센에타이무스릿푸시테미마쇼카? 아버님도궁궐 잘 보고 가시고요." - P77

"그런데 빈집 지키는 기분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뭐라도 채워져 있는 곳은 대온실밖에 없잖아요. 원래 쓰임새대로 있는 건 거기뿐이야." - P79

그건 주유소에서 내 코트를 망쳐버린 금성무 역시 원서동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번호를 받은 건나였지만 세탁비를 물어내라고 연락하지는 못했다. 차라리내 연락처를 알려줬어야 했는데, 나는 뒤늦게야 생각했다. 그러면 물때를 기다리듯 편안하게 연락을 기다리면되는데. - P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활동을 시작했던 10여 년 전에는 출판계 내외부의외모 언급과 평가가 심하기도 심했다. 비슷하게 데뷔한작가들과 이런 상황인 줄 알았으면 얼굴에 공을 더 들이고 나왔을 거라고 비틀린 농담을 하며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 P36

모 신문사는 왜 바람이 불 때 정신없이 찍힌컷을 고르는 것인지, 모 출판사는 심각해 보이는 흑백사진에 유난한 집착이 있는지… - P37

어쨌든 저열한 평가가 따라붙을수록, 오기가 생겨카메라를 똑바로 보는 편을 택했다. 유튜브에도 나가고TU에도 나가고...... 외모 노출에 태연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나가지 않으면 어떤 자리는 성비가 심각하게 불균형해진다. - P39

몇 년 동안 마음의 속도 방지턱에 덜컥덜컥하고 걸렸던 부분은, 인터넷 서점에서 하는 투표가 책 사진이아닌 작가들의 얼굴 사진을 클릭하도록 되어 있을 때가많다는 것이었다. 얼굴 쪽이 호응도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다. 생명이 없는 물체 위에 눈코입만 그려도 친근감을 느끼도록 우리의 머릿속이 설정되어 있으니까. -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디어 마지막 자습 시간에 생물 선생님이 교실 앞을 지나갔고, 선생님이 시야에서 사라진 걸확인한 나는 내적 괴성을 지르며("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화장지를 들고 주섬주섬 일어섰다. - P29

그 모든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는 배 아픈아이처럼 몸을 수그리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체육복에 감싸 들고서 혼자 공개방송을 만끽하러 가장조용한 화장실로 향한 것이다. - P30

우리 가족에게 음악을 듣고 라디오를 켜두는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가족 앨범 속에는내가 한두 살이던 아기 시절에 이미 미제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웃고 있는 엄마 아빠와 부모님 친구분들 사진이 있을 정도고(미군 부대 근처에 거주하셨음), 사진 찍힐때 좀처럼 힘을 못 빼서 늘 차렷 자세에 굳은 표정의 사진뿐인 내 유년 시절 사진 가운데 몇 안 되는신나 보이고 자연스러운 사진은 주로 전축 옆에서였으니까. - P41

그날 나는 결국 영을 따라 시내 번화가 쇼핑몰 맨꼭대기에 있는 롤라장에 입성했다. 나의 두뇌와 마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줄 알았던 소심함과 두려움을 단숨에 이길 만큼, 사춘기가 올동말동한 고학년 어린이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아주 뜨겁고 뒤를 돌아보지 않게 만드는 무언가였다. - P47

지금의 내 인생을 강이나 바다라고 한다면 그날의일이 강물이나 바다로 흘러가게 한 의미 있는 물줄기였음을, 혹은 그 이상이었다는 얘기를 한 번쯤 나눌 기회가 와도 좋을 것 같다. - P52

누군가에게 시네마 천국이 있다면 라디오 천국이라 불렀던 내 인생의 한때가 그렇게 시작됐다. - P53

과함이 있으면 미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과유불급‘의 뜻을 제맘대로 해석해온 나는 과몰입러(무언가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 의미 부여 중독자답게 8월 6일 술자리를 ‘볼리비아와 자메이카의 독립을 축하하는 파티‘이자 ‘량쯔충(양자경), 앤디 워홀, 노무현 탄신일인 동시에 천경자 화가 기일을 기념과 추모하는 파티라 명명한 뒤 남은 준비를 하기시작했다(멋있어! 완벽해! 완전 맘에 들어!!!). - P57

계속 건강한 몸으로 계절 별미에 술을 곁들이려면 운동 열심히 하고 식이조절도 하면서 건강지표 잘 체크하며 살아야 한다고 서로에게 훈수도두면서. - P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 P125

밟는다. 가파른 골목바람 안고 걸으면 - P124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 P127

무엇인가 희끄무레한 것이 떠 있다 함께 걸어간다흘러간다 지워지지 않는다 좀처럼, 뿌리쳐지지 않는다 끈덕진 녀석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 P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