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의 이혼 절차가 모두 끝난 날 엄마가 사 왔던 꽃다•발의 색깔 같은 것들을. 그러자 엄마는 대답을 하고•난 뒤 씩 웃으며 덧붙였다고 했다. ‘근데 참 나도 나지만 너도 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니?‘라고. 엄마의 크로노스를 절대로 만날 생각이 없었던 나도그 말에는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나도 나지만 너도•너다‘는 엄마의 말버릇 중 하나였다. 엄마의 치매가심해진 이후로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지만 - P28

그러나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다짐 앞에 ‘절대로‘
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붙일수록, 그것을 어기는 일이쉽고 빠르게 일어난다는 것을 해 놓은 말이 무색하게도, 내가 엄마의 크로노스를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고작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 P31

"한번 해 두면 또 얼마나 요긴하니. 봐, 너도 결국고민 있으니까 이렇게 엄말 찾아왔잖아. 안 그래?"
다음 순간, 나는 허공에 대고 눈을 부릅떴다. - P37

그러나 이 익숙한 동공 너머에 있는 것은 도대체누구일까. - P37

"하나는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 거, 다른 하나는 크로노스에 있는 할머니 거래." - P46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건 뭐니 뭐니해도 해파리를 오랫동안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관람객이 아무도 없는 시간에,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 내키는 만큼. - P57

하지만 나는 그것만은 정말로 할 수 없다. 아니 뭐눈 딱 감고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금세 지치고 질려서 그만두고 말 것이다. 또다시 잔머리와 재기발랄한 꾀만 믿고 요령을 피울 것이고 도망칠 방법만 찾다가 바늘구멍만 한 틈을 발견하면 쏙 빠져나갈 게 틀림없다. - P71

성재가 떠났다.
내게는 텅 빈 집과 아픈 고양이,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랑이 남았다.
남은 사랑을 팔기로 한 것은 그래서이다. - P81

"그럼 그 적합도라는 게 팔십 퍼센트에 못 미치면어떻게 되나요? 그런 경우가 많나요?
"네. 꽤 있어요. 감정이라는 게 단순하게 ‘사랑‘ 혹은 ‘용기‘ 같은 단어로 뭉뚱그려 놓으면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 조사해 보면 그 종류가 다 다르거든요. 어느 정도 결이 같은지를 조사해서 기준치에 못 미치면•전이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불가능하다기보단 소용이 없어요."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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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 P73

아직도내가 낯설어하는 내가 더 있다. - P75

걸터앉아 있는 길의 끝을 치우고접이식 침대를 펴고 텔레비전을 켜고나는 나를 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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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영원할 것처럼
서유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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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의 정수가 담겨 있다. 한국 단편 문학을 읽는 즐거움도.함께. 바다를 앞에 두고 빨래를 개고, 시간을 돌이키며 맥주캔을 따고 노을을 보면서 새 단어를 외우는 일이 사무치게 스며드는, 누군가의 삶에게 보내는 이야기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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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평상에 앉아서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 P129

평상에 앉아 비를 피하던 두 사람은 바다에 들어갈까 말까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비 맞으며 파도를 타면 시원하고 좋다며 여자를 설득했고 여자는 비 오는 바다에 왜 들어가느냐며 앉아서 구경이나 하다 가자고 했다. - P133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방수팩에 넣어 목에 걸고 다니던데. 물속에서도 사진을 찍겠다고 요란을 떠는 것도 보기 싫었지만 희영처럼 아무준비 없이 다니는 것은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 P135

비 내리는 바다를 보면서 진은 아직도 인생에 예측 불가능한 일이 많구나, 생각했고 남은 인생에도 그런 일이 불쑥 찾아오겠지. 그때는 어떤 기분이 들까 짐작해보았다. 매번 새롭게놀라고 인생에 대해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는 걸 다시 깨닫게될까. - P136

진은 집을 내놓고 같은 아파트 단지의 작은 평수 집을 보러다녔다. 희영의 동네로 옮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래 살아서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익숙한 길, 늘가는 시장과 마트, 세탁소, 목욕탕, 병원이 있는 삶의 반경을벗어나고 싶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살 자신도 없었다. 그때 진의 나이가 쉰아홉 살이었다. - P149

-할머니, 여기 조개 많아.
손녀가 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진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 이렇게 커서 말도 잘하고 물놀이도 야무지게 즐기는지. 손녀를 보면 세월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쌓인다는 게 느껴졌다. - P154

진은 자신도 모르게 더 큰 파도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젖은옷으로 어떻게 호텔로 돌아갈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했다. - P157

그러면서도 샤워를 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벗은 몸을 보면 낯설었다. 어떤 날에는 사십대 후반이 혼자 보내기엔 너무 젊은 나이인 것 같았지만 실은 대부분의 시간을 늙은이의 마음으로 살았다. 진은 인생의 다른 가능성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때 동창에게 그래, 한번 가보자라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가끔 생각해봤지만 그런 미래는 진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이라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미지의 영역으로 가보려는 사람들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오는건지, 진은 늘 궁금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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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는 소파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남은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제도 손님을 기다리다 하루가 다 갔다. - P95

-잠깐 들어왔다가.
석주는 재경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재경이 사람들 사이에 잠시 서 있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모습은 변했어도 걸음걸이는 여전했다. 소파에 기대어 앉는 재경을 자세히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화장을 안 한 얼굴이 창백했다. - P99

-먹는 거 좋아하던 애가 왜 이렇게 못 먹냐.
-그동안 너무 많이 먹어서 벌받나봐. - P103

그건 흑진주고 이건 라벤더야.
세희는 그것이 얼마나 세심하게 고민한 선물인지 강조했다. - P105

전등이 이렇게 쉽게 고장나는 건지 몰랐어.
-가서 한번 보자. - P111

하나의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재경은 예전의 모습을 외투처럼벗어버렸다. 노인같이 마른 몸으로 앉아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 재경이 외투를 벗은 게 아니라 재경을 이루던 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외투만 남은 것 같기도 했다. - P112

멀거나 가까운 죽음을 겪으면서 인생에 대한 계산을 그만두고 계산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숫자를 입력하고 빼고 더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런 마음에 도달하기까지 한참걸렸다. 이제 막 마흔 살이 된 세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직 계산기를 끌 때가 아니니까. 석주는 그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버거웠다. - P113

-하루하루가 다르다.
재경은 맞은편 벽에 기대앉았다. 커피에서 올라온 뜨거운김이 재경의 야윈 얼굴을 감쌌다. 석주도 뜨겁고 쓴 커피를 한모금 삼켰다. - P117

석주와 재경은 지나가버린 시간과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인생에서 잘못 끼운 단추들에 대해 얘기했다. 앞날에 대해서는말을 아꼈다. - P119

-이렇게 지내는 데 익숙해졌어.
석주는 문을 열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다 또 들러. 같이 점심이나 먹자. - P120

그런데 이제는 무료함이나 갑갑함과 상관없이, 마음의 상태나 희망의 유무와 무관하게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날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P122

사무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자 진주 귀걸이가 든 쇼핑백을전해주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석주는 문밖으로 나가 거리를 살폈다.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난 뒤 가로수들의 잎사귀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석주는 재경이 지나간 방향으로 뛰었다. 재경이 다시 한번 들르기를 기다리기에는 인생이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았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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