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만 좋아하셨가니? 여자도 좋아하셨제. 자네는 몰랐제?" 동식씨가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를 저는 다 안다는 투였다. 남자들끼리 공유하는 비밀이야 불 보듯 환했다. - P69
황사장은 내 곁으로 다가와 주변을 훑어보고는 얼굴을귓가에 바싹 붙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몸의 거리로 친밀감을 표현하는 모양이었다. 하기는 동물도 그렇긴 하다. 그 거리를 내가 허용하지 않고 살아왔을 뿐이다. 빨갱이나 그 자식들은 알아서 보통 사람들이 친밀하다고 허용하는 거리를 넘어서 있어야 했다. 그래야 누군가 빨갱이의지인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당하지 않을 테니까. - P75
큰집 마당에 홀로 서서 나는 예감했다. 오빠와 나의 시간들이 끝났다는 것을.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미안하고 무참했다. 나는 조심스레 내 발자국을 그대로밟으며 큰집을 나왔다. 순백의 마당에 더는 무슨 자국이라도 남기면 안 될 것 같았다. - P80
조금 전 통곡하던 사촌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시끌벅적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활기찬 담소와 통곡 사이에디쯤에서 서성이며, 나는 깨죽이 담긴 쟁반을 든 채 우두커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꿈결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다. - P98
그래놓고는 꼭 한마디 덧붙였다. 하기사 그 시절에 똑똑흐다 싶으면 죄 뽈갱이였응게." "똑똑한 사람만 빨갱이였가니. 게나 고동이나 죄 갱이였제." - P117
"그때게… 막냉이삼춘이 손만 번쩍 안 들었으면 할배가 안 죽었을랑가…………" 큰언니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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