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다와의 수업이 끝났다. 두 시간은 컵 안의 음료처럼 사라졌다. 그는 네 개의 컵을 쟁반으로 옮겼다. 그의 머그컵에는아메리카노가 조금 남아 있었고 곡물이 들어간 라테를 마신젤다의 유리컵에는 긴 티스푼과 침전물과 얼룩이 남았다. 두개의 물컵은 모두 비어 있었다. 쟁반을 챙기며 그는 수업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노렸다. - P9
며칠 뒤 사무실에서 치료기기의 상품 리뷰를 검토하다가 뇌질환이 의심되니 내원하라는 병원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마우스를 쥐고 있는 오른손과 바닥을 디딘 발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 P19
주인이 리시안셔스는 잘린상태에서는 더 피지 않는 꽃이라며 수명이 긴 게 장점이라고설명했다. 그는 얇고 부드러운 꽃잎을 보다가 꽃다발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 P21
젤다가 눈썹을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그는 MRI 판독 결과를 알려주던 의사의 목소리와 며칠 전의 회식 자리를 잠시 떠올렸다. 젤다의 친구들은 몇 살일까. 그는 나이가 많지만 완전히 늙은 것은 아니었다.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결정을 내릴 수는 있었다. 그런 기회마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 P23
커피를 다 마셨지만 젤다는 당연히 오지 않았다. 그는 머그컵을 반납한 뒤 카페 밖으로 나가 한강이 보이는 쪽으로 걸어갔다. 벤치에 앉아 강물과 그 위로 지나가는 전철과 날아가는새를 보았다. 계절은 바뀌어가는데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지않고 오리배처럼 정박해 있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그의옆을 지나 차례로 멀어졌다. - P30
-쓰는 힘 자체도 약하고요. -운필력이 부족하죠. - P38
경진은 아파트 단지를 가볍게 돈 뒤 벤치에 앉아 한숨 돌리는밤을 하루종일 기다려왔다. 밤의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하루의 피로가 발밑으로 천천히 빠져나갔다. - P41
제거 사유1. 태풍시 지반이 약하여 쓰러질 수 있어 위험함2. 주차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음3. 벤치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민원이 많음 - P45
봄과 여름 내내 경진은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아 삼각김밥과 생수를 먹고 공용 화장실에서 이를 닦았다. 비 오는 날에는편의점 안의 창가에 서서 접힌 파라솔과 한쪽에 쌓아둔 플라스틱 의자가 비에 젖는 걸 보며 점심을 해결했다. 수업을 하러학생들의 집으로 이동하면서 경진은 평일 낮에 거리를 걷는사람들이 다 자유로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51
학습지 교사 일을 그만둘 때까지 경진은 그 분식집의 창가에 앉아 어묵 국물과 김밥 한 줄을 먹고 수업을 하러 갔다. 그뒤로 혼자 분식집이나 야외 벤치에 앉아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있으면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 P53
교육에 대해 잘 모르면서 한글이나 수학을가르쳤고 새로운 수업을 권유하거나 학습 상담도 했다. 수업을 그만두겠다는, 돈이 아깝다는 얘기도 들었다. 경진은 선생님이기 이전에 집까지 학습지를 배달하는 사람이었고 영업을못해서 수업이 줄어들면 눈치가 보이고 월급이 줄었다. 보람과 모욕이 하나의 그릇 안에서 녹아내렸다. - P60
한낮에 번화한 거리를 걸을 때면 아직도 오래전 그 편의점의 파라솔과 분식점의 창가 자리가 떠오르고 거기 앉아 밥을먹고 숨을 돌리던 자신이 생각났다. 어떤 시기의 자신을 거기. 에 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경진은 밤의 벤치에도 자신의 일부를 두고 왔고 그것이 영영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 P64
유선은 저녁때 여섯 명의 남녀가 식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웃었을 때도 저런 소리가 났었는지 궁금해졌다. 종우의대학 동기들과 부부 동반으로는 몇 번 만났지만 이번처럼 남자들이 애들만 데리고 집으로 오거나 두 명의 이혼 남녀가 합류한 것은 처음이었다. 종우는 어쩌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유선과는 초면이었지만 이혼 남녀는 오래된 친구들의 친근한 분위기 속으로 쑥 들어와 한자리씩 차지했다. - P73
선우는 유선과는 여전히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았지만 종우와는 일상적인 대화만 몇 마디 나누었다. 자동차 뒷자리에서 선우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볼 때, 밥을 먹은 뒤 복층 계단을 서둘러 올라갈 때, 종우는 선우가 자라 먼 곳으로 가버리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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