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재취업에 애를 쓰던 혜원의 직장이 결정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고 받아 온 유니폼도 내어릴적 기억과는 달리 꽤 세련되게 바뀌어 혜원에게찰떡같이 어울렸지만, 그렇지만, 유니폼에 챙 달린모자에 흰 장갑까지 끼고 서서는 어색하게 웃는 혜원을 보자 나는 속에서 치받쳐 오르는 이 말을 도저히참을 수가 없었다. 혜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P177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야쿠르트 아줌마와 보험 아줌마 커플. - P178

"그거 제일 많이 사가더라"
혜원이 다 까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P180

돈이라도 쥐고 있어야지, 늘그막에 기댈 남편도 자식도 없으면서, 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었고 분하게도 그 말에 담긴 악의를 감각하기도 전에 먼저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오 - P181

그러므로 그 돈 천만 원을 헐어서, 우리는 변기를고쳤다. 비용을 아끼려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양변기를 주문해 동네 철물점에 설치를 부탁했다. 변기 가격에다 출장비까지 합해 삼십 만 원이 들었다.
나머지 구백칠십 만원은, 저축했다. - P185

내가 졸업하고 직장을 구한 뒤에는 각자의 자취방을 정리하여 하나로 합쳤다. 비록 반지하지만 방이 세개나 있는 월셋집을 얻은 것이다. 보증금 이천에 월세오십, 관리비 오만 원. 관리비에는 주차장 사용료 만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둘 다 차는커녕 운전면허도 없었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도 조만간 생길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래, 그때는 - P193

그렇다. 지금은 피로를 팔아 피로한 삶을 사고 있지만 어느 시점에는 그조차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내 노동의 가치는 조금씩 떨어질 것이고 결국에는누구도 돈과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노쇠하고 병들어 고칠 곳투성이인 몸뚱이를 어디서도 찾아 주지 않을 것이다. - P199

그런데 이 노래의 끄트머리를 입속에서 돌돌 굴리다 보면 나는 문득 덜컥 불안해진다. 야쿠르트 없으면 요구르트를 달라는데, 그런데 요구르트도 없으면그땐 어떡하지. 야쿠르트도 요구르트도 그 비슷한 것도 없다면 그땐 뭘 줘야 하지.
다그러면 그다음엔,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까.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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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지그시 감고 바람이 숲을 만나 살찌는 소리를 들을테다.
물의 맛을 입안에 오래 데리고 있을 테다. - P105

그때부터 거기가 문이다.
그때부터 거기가 새로운 문이다. - P107

땅끝이 땅의 시작이다 - P108

풍경과 네 몸 사이에 이제 아무것도 없느냐, 없어서 네가길이 되었느냐.
너는 네가 되었느냐, 네 몸이 너를 알아보더냐.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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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기적 소리를 들었다 - P198

기차 바퀴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 P198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불분명하게 건넸던 말을 다시소리 내어 발음해보았다. 다시 만났다는 놀라움 때문에 나는 그녀의 결혼 상대라는 청년과 변변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 P185

"전화예요, 아까 전화 안 해주셨어요?"
나는 형수가 신경질적으로 내민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지금이 몇 신줄 아세요? 세 시도 넘었어요."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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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개발서 같은 결론이지만) 예언은 그 자체로 예언을 이루어내는 힘이 있다. 그래서 현재를 사는 일은 종종오래된 미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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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이제 생명에 관한 비유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내적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더는 우리 주변이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기를 그만두었다.
우리는 그릇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죽었다. 그저 오래전에 썩어버린 인식을 갉아먹고 있을 따름이다.* - P30

소설가가 된 이래 처음으로 소설 아닌 글을 책으로묶는다. 소설만 쓰던 사람이 소설 아닌 것을 세상에 내보이려니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를 드러내는 일은 언제나 두려우니까.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또 이렇게책을 묶는 까닭은 손을 내밀면 맞잡아주는 다정한 마음들도 세상엔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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