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 P9
젊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은 여자다. 총명한 눈빛을 가졌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경련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검은 옷 속으로 피신하려는 듯 어깨와 등은 비스듬히 굽었고, 손톱들은 지독할 만큼 바싹 깎여 있다. 왼쪽 손목에는 머리칼을 묶는 흑자주색 벨벳 밴드가 둘러져 있는데, 여자의몸에 걸쳐진 것들 중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이다. - P12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있었다. - P20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수 있는 언어. - P24
말하자면, 플라톤이 구사한 희랍어는 마치 막 떨어지려 하는 단단한 열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 P33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 P41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잘 드러내지 않습니다(아마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 테지요). - P42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 P45
당신의 목소리는 아마 그 생나무들의 감촉과 냄새를 닮은 어떤것일 거라고, 막연히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 P51
멈추시오. TaDE. 멈추지 마시오. μὴ παῦε나에게 물어보시오. 아무것도 나에게 묻지 마시오. αἴτει με. μὴαἴτει μηδέν με. 다른 방법으로 하시오. 결코 다른 방법으로 하지 마시오. μὴ αἴτει οὐδὲν αὐτόνἄλλως ποιήσης.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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