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이 사라지고 캄캄해진 길모퉁이에 내동생이 정성껏 반죽을 주무르고 있다. 그림자 같은 그 모습이 담담하다. 어깨와 팔을 단정하게 아래로 뻗어서 고양이보다 꾹꾹, 온 체중을실어서 마음과 마음을 포개듯 손을 새처럼 포개어 사람을 구하듯이 심장을 누르듯 반죽 속에 힘차게 사랑을 넣는다. 다음날이면 그 빵을 먹고 사람들이 웃는다. - P203

뺑오쇼콜라 일종의 서양식 하이쿠 안에 박힌 초콜릿이 꼭 소량이다. 완전한 절제. 최소의 단위. 한순간의 빛. 한끝 부족한 그느낌이 사람을 더 안달나게 하고 무릎까지 꿇게 만들 것 같다. - P205

우리가 온기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걸우리 스스로가 증명하는 아름다운 숨.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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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한 손엔 맥주, 다른 손으론 나초가 담긴 접시를 들고 P에게 다가갔다. 그는 경계하는 눈으로 흘낏 불청객을보고 두 손으로 물잔을 움켜쥐었다. - P35

"이야기를 소리 내어 두 번 읽고 눈을 감으세요. 이야기가 감은 눈 위에 떠 있다고 생각하며 고요히 잠을 청하세요. 그러면 이야기가 눈과 코와 입과 머릿속으로 흡수될 겁니다." - P43

주인이 걸어왔다. 세상에, 나무가 걸어오는 줄 알았다.
190? 200? 커도 너무 컸다. 마르고 길고 느리고 늙은 남자. - P67

"내가 뭘 잘못했는데. 무책임하게 멋대로 뒈져버린 건너잖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 P79

왜 그랬냐. 지금 그걸 묻는 건가? 닥터. 미치면 병원을가야 해. 알지. 그건 나도 알아요. 그런데, 병원에서 미치면어디로 가야 하지? 닥터 나는 병원에서 더 나쁜 방식으로미쳐가고 있네. 내 꼴을 보게나. 그러니 제발 나를 보내주게. 절대로 벽에 머리를 박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테니. - P85

점원은 이제 짜증이 났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고 나오는 말이 배배 꼬이며 끝이 뾰족해졌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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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마이클은 곁으로 와서 기남의 팔을 붙잡았다. 아기 때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어서 낯을 가리거나 자신을 싫어할까봐 걱정했던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기남이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마이클은 짐작조차 못할 것이었다. - P271

"할머니 좋아!" - P273

"뭐긴 뭐겠어."
우경이 차갑게 웃었다.
"걔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 - P275

"엄마, 그 귀걸이가 알아서 빠졌겠어? 엄마가 어디에 빼놨겠지.
조심해야지. 여기 우리 가족만 사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 P277

"언제 한번 이방 정리하긴 해야 하는데. 이삿짐에서 박스만 푼수준이야."
바닥에는 제인의 요와 이불이 반듯이 개켜져 있었다. - P279

그애들이 진짜 감정을 나누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하는모습이 기남의 눈에는 보였기 때문이다. - P287

그 말에 기남의 얼굴이, 등과 가슴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고저릿해졌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제임스가 팔짱을 낀 채 자신을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자기 피 속에 쓰러져 죽어 있는 새끼 코끼리와 그 곁에서 웃고 있는 세 남자가 보였다. - P289

그 캐리어에 든 물건 대부분은 우경의 가족에게 줄 먹거리와 선물이었다. 우경에게서 마이클이 거북이를 좋아한다는 걸 들은 이후로 기남은 거북이 모양의 인형과 장난감, 스티커, 거북이가 나오는 그림책 등을 모아왔었다. 그 모든 것이 도착하지 못한 캐리어 안에 있었다. - P293

엉터리, 엉터리. 기남은 종종 엉터리라고 중얼거렸다. 무엇을향해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습관이 되어 소리 내어 말했다. 엉터리. - P301

그러자 여자가 기남을 꼭 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여자 둘도 기남을 한 번씩 꼭 껴안아줬다. 누군가와 이렇게 포옹을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진경이나 우경이 어릴 때 안아본 게 기남이 해본 포옹의 전부였으니까.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과 포옹하면서 기남은 예상치 못한 따뜻함을 느꼈다. 그 포옹이 얼마나 좋았는지 기남은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 P302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 중식당의 냄새, 식기의 모양,
음식의 종류, 노인 옆에 있던 젊은 남자, 그러니까 노인의 아들이입었던 옷과 큰언니라는 사람의 표정까지도 기남은 살면서 수시로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 P306

"엄마가 내 엄마여서 좋아."
진경이 작은 손으로 기남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을 향한 진경의 사랑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슬픔이 섞여 있었다. 커다란 존재를 향해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 같은 것이 자신을 향한 어린 그애의 사랑 안에 존재했다. - P310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에밀리?"
"내 여자친구요." - P319

"할머니."
자신을 부르는 마이클을 보며 기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고연약한 순간이 아직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바라보면서. - P320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속설도 이들의 즐거움을 방해하진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있는 곳 바깥에 또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독서를 통해 알게 된다. - P324

소설은 참고 견디는 방식만이,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부정의한상황을 용인한 스스로를 벌하는 방식만이 폭력의 세계를 살아내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에겐 참지않는 방식도 있다. 폭력을 참아내지 않기로 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돌아볼 줄 알고, 책임을 다해 함께 있는 이들을 돌보고자 한다. 자신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들의 삶을존중하는 힘을 가진다. - P336

. 소리와 희진이 각각 삼촌과 이모에게 의존했던 경험을 귀하게 여기며 그 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에 달려 있지 않은in-dependent‘이란 의미로 해석되는 ‘독립적인 independent‘이란 표현은 ‘의존하는 dependent‘을
‘안에 품은in‘ 표현으로 전환된다(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코난북스,2022,52~53쪽 참조). - P339

그러니 최은영의 인물들이 특별히 더 작고 연약하게 느껴진다고 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작고 연약한 면을 최은영의소설이 기민하게 포착할 줄 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아지고 연약해진 덕분에 연결된 타인을 통해 영향을 받고, 변화할 용기를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최은영의 화자들 중결말에 이르러 바뀌지 않는 인물은 거의 없다. 최은영의 인물들은약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재확인하는 자리가 아닌 스스로를 성찰하기를 망설이지 않음으로써 회복하는 자리에 있고자 한다. 소란으로 가득찬 침묵 속에서, 각각의 존재가 품고 있던 목소리의 빛깔을 찾아주는 방식으로 최은영은 회복하는 이야기를 쓴다. - P341

책을 낼 때면 원고를 썼던 시간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무엇을 얼마나 잘했는지 못했는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은 시선으로 나의 지나간 시절을 정의할 수 없게 된다. 잃었다고생각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드는 일도, 내 힘으로는 차마 어쩌지못했던 순간들을 복기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리운 마음으로 놓아준다. 원고를 쓴 시간을, 내가 통과해온 모든 순간을 이글들을 묶어 책으로 내놓으면서 나는 지난 오 년의 시간과 이별하고자 한다. - P347

나는 사랑을 하는 일에도 받는 일에도 재주가 없었지만 언제나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이 일곱 편의 글에실려 어딘가에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 언제나 내가 바라온건 그것뿐이었던 것 같다.
2023년 여름최은영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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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좋아하는 것을 멀리 던진다
던져서 떨어지면 망가지는 것을 알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곳까지 던져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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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나 논문이나 강의에서 에세이에 대해 설명할 때는 항상 이 단어의 어원을 알려준다. 에세이는 ‘시도’라고. 그래서 완벽함을 자처하지도 않고 철저한 논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고. 이런 말은 에세이 형식에 대한 비평적 설명이라기보다 그저 클리셰를 되풀이하는 잡담이라서, 에세이에 관해 알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에세이의 많은 것을, 그리고 시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게 만든다. 모색할 뿐 확정하지 않는다는 에세이의 한 속성이 과하게 확고한 사실로 정립된 탓이다.

나의 생산량 강박은 좀 더 근본적인 진실을, 내가 생산 중독자라기보다 과잉 생산 중독자라는 진실을 외면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글 쓰는 삶이 이렇게 분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비정기적이라는 사실이 나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한편 에세이는 부분적, 미완적이라는 특징 탓에 폄하되기도 한다. 에세이라는 형식에는 모종의 가벼움이 필수이고, 가벼움의 지지자 중엔 무려 오스카 와일드, 이탈로 칼비노, 조르주 페렉 같은 작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움은 나쁜 평판에 시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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