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답게가 아니라 나답게 - 언제라도 늦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원현정 지음 / SISO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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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이후를 자유롭고 멋지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들이 많아지는 분위기다. 이 책도 그런 부류에 속하겠구나 싶었는데, 제목 때문이었을까. 비슷한 주제의 에세이들 가운데 이 책이 단연 눈에 띄었다. '나답게'라는 말이 그리 참신한 표현은 아니나, '나이답게'와 대조를 이루니 그 의미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래, '나답게'란 적어도 나이에 매이지 않는 거야. 이 책을 통해 "나는 나답게 살고 있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기회로 삼고 싶었다.

저자는 "폭풍 같은" 40대를 지나 오십 대가 되어 라이프 코칭에 도전한다. 오랫동안 해오던 주얼리 디자인, 갤러리 등도 접고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연 셈이다. 저자는 "라떼는 말이야", "왕년에"를 들먹이는 꼰대를 경계하면서, "나이 들어서", "나이가 드니", "이 나이가 되니", "너도 내 나이 되어봐라" 등의 말을 주의하자고 말한다. 돌아보면, 나는 2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내 나이가 벌써"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듯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면,

나이 때문이 아니라 나이를 의식하는 마인드 때문일지도 모른다.(54쪽)

이 책의 장점은 현재를 풍성하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저자의 지난 시간 힘들었던 일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현재 저자의 모습은 에너지와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그 기운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특히 노래를 못한다면서 즐거운 일을 찾아 재즈를 배우러 다니던 중, 함께 배우던 사람들끼리 연말 파티 삼아 공연을 했던 에피소드는 읽는 내내 유쾌했다. 무용에는 소질이 없지만 운동 삼아 시작했다는 플라멩코 일화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앞서 여행 에세이를 펴냈는데, 그때 그림 연습을 시작해서 실제로 책 속에 펜으로 그린 여행 스케치를 담아냈다고 한다. 출간 후 작은 책방에 한 달 동안 그림 전시도 했다. 우연히 아담하고 예쁜 책방에서 어느 여행 작가의 전시회를 보고, 저자가 무턱대고 그곳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눈 후 성사된 일이다. 도전과 적극성이 대단하구나 싶었다. 그만큼 드로잉을 좋아하고 즐기기 때문에, 주변 시선보다 내 마음을 더 들여다보기 때문에 가능한 행보가 아닐까.

저자는 집의 짐을 줄이는 과정에서 쌓이는 책의 경우 왠만하면 전자책으로 본다. 그리고 정리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자주 정리하고 비우기를 실천한다. 내 안의 먼지도 털어내고 언제든 훌쩍 여행 갈 수 있도록 가뿐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이 책의 내용 중에 다음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우리도 그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길거리의 돌일 뿐인 것을. 중요한 것은 내가 보석 반지가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마음 아닐까. (중략) 내가 돌멩이였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만이다.(119쪽)

유난히 반짝이는 보석이 되겠다는 강박도, 애써 자존감을 높이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나는 돌멩이야'라고 수긍하자는 것인데, '나는 누가 뭐래도 보석이야'라는 표현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그래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좀 더 편안하게 나 자신을 바라보자는 속뜻이 전달됐다.

현재 저자는 코칭과 죽음학을 통합해 '인생 리셋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저자가 노년을 준비하는 시기를 오십으로 잡은 맥락과 더불어, 책 후반부에서는 주로 '메멘토 모리'와 '웰다잉'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삶은 곧 현재를 잘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은 "나이답게가 아니라 나!답게" 산다는 게 뭘까를 진지하게 모색할 때이다. "내 나이 때문에"라고 말하면서 '나다움'을 자꾸만 뒤로 미루고 뭔가 주저하는 모든 연령대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고민일 것이다. 평범한 듯하나 진리인 다음 말을 상기해본다.

나이를 생각하다 보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이 나이에 할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 포기한다. 또 쉬운 일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무슨 일이든 너무 늦은 때란 없다. 하고 싶을 때, 그때 하면 된다. (중략) 시간과 숫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잘 나이 들어가는 방법인 것 같다.(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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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게이징 - 2021 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 Wow 그래픽노블
젠 왕 지음, 심연희 옮김 / 보물창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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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진, 크리스틴과 문의 우정을 담은 그래픽 노블! 사실 이런 소개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제목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스타게이징 stargazing

1. 별을 바라보고 관찰함.

2. 현실적이지 않은 생각에 빠짐.

3. 스타를 쫓아다님.

친구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워가는 것일까.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내용일까. 좋아하는 스타를 쫓아다니는 친구도 나오는 이야기일까.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 하면서 책을 펼쳐본다.

크리스틴이 친구들과 함께할 때 낯선 인물인 문이 등장하고 편견의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간다.

"쟤 이름은 문이래."

"그러니까 세일러 문 할 때 문."

"흠. 이상한 이름이네."

"쟤네 엄마는 옆집에서 묘목장을 운영하는 것 같아. 저번에 내가 봤던 식물한테 노래 불러 주던 여자가 쟤네 엄마야. 좀 이상하지 않냐? 그러니까 아이한테 '문'이란 이름을 붙이지."(17쪽)

이름만 알 뿐인 아이에 대해, 그 아이의 엄마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대화다. 뭔가 남과 다르면 이상하다고 여기는 문화는 어디서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외부인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일 수도 있겠다. 막상 문을 가깝게 대면한 크리스틴은, 집에 돌아와 문에 대해 "자신감 넘침, 재미있음, 아시아계 같지 않음"이라고 노트에 적는다. (그런데 크리스틴이 생각하는 '아시아계다움'의 이미지는 뭘까.)

크리스틴과 문은 점점 친해지고, 학예회 때 함께 케이팝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로 한다. 크리스틴은 문을 더 많이 알아간다. 문은 크리스틴에게 '상상 속 친구들'인 선녀 그림도 보여주고, 천문대 견학 때 "나의 진짜 집은 저 하늘에 있어"라고 속삭이더니, 함께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난 사실 하늘나라 사람"이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크리스틴의 아빠는 둘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좋게 여기지만, 딸에게 이런 말을 거침없이 던진다.

"너랑 걔는 앞길이 달라.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명심해라."(121쪽)

이랬던 아빠가 이야기 후반부에 이르면 딸에게 사과할 뿐 아니라, 자책하는 딸에게 의미 있는 대사도 남긴다. (이 대목에서는, 딸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려주는 아빠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 크리스틴.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어.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그걸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고, 그래서 더 좋은 일을 할 수는 있어."(194쪽)

크리스틴의 다채로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문을 좋아하고 질투하고 멀리 하면서도 신경 쓰고, 못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일로 더 피하게 되고, 걱정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그러다가 문에게 "네가 있어서 좋아"라고 말하기까지. 이 과정 가운데 크리스틴의 표정만 봐도 감정 변화의 진폭을 느낄 정도다. 전반적으로 그림체 느낌이 정겹고 따뜻해서 좋다. 이 그래픽 노블 속의 스타, 문의 발랄하고 솔직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준다.

이야기 속에서 두 번씩이나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사건에 대해, 나만의 의문을 가져본다.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누군가 함부로 말할 때, 그리고 비밀로 간직해온 무엇인가를 누군가 들추며 조롱할 때, 아이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이에게 어떻게 대응하라고 가르쳐야 할까.

우정을 맺고 더 단단히 만들어가는 이야기, 아이와 소통하는 부모의 모습, 공동체 안의 편견, 그리고 나만의 스타게이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풍성한 그래픽 노블이었다. 그림을 보면서 목소리가 재생되어 나오는 착각이 들 만큼 생생하게 읽었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삼은 부분이 많다는 '작가의 말'도 인상 깊게 보았다. 젠 왕의 전작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를 찾아 읽어야겠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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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어바웃 아나운서
강성곤 지음 / 형설미래교육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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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 스토리, 새뜻하고 유익한 지식, 소름 돋는 디테일, 불편한 진실, 난데없는 품격과 권위 등을 마구 버무렸는데 하나라도 유익이나 흥미, 혹은 통찰 언저리를 건졌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6쪽)

'들어가며'에 나오는 저자의 말이다. 아담한 판형과 함께, 뭔가 예상 밖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책이겠구나 싶었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유익'을 위해서였다. KBS 아나운서 36년 경력의 저자 소개를 보면서, 한 직업을 오랫동안 지속해온 사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재미가 없더라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말 바로 쓰기의 사례도 챙겨보자 싶었다.

평소 후배들 앞에서 후일담을 풀 때도 '꼰대', '라떼'를 조심한다는 저자는, 이 책에서도 그런 마음을 담은 듯 보인다. 그저 이야기보따리, 수다와 자랑질, 지적 탐험, 내밀한 감정을 좌충우돌, 종횡무진, 뒤죽박죽 썼다고 너스레를 떤다.

저자는 아나운서의 기본 덕목을 목소리, 읽기, 대화 습관으로 서술한다. 좋은 발음의 첫걸음은 정확한 음가 내기부터, 21개의 모음을 제대로 소리 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정제되고 가다듬은 소리가 필요한데 저자는 이를 '금속의 제련 과정'에 비유한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으려면 인쇄물을 수시로 접해야 한다. 입 근육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남녀노소에 따라 말하기를 변환하면서, 유익한 대화를 즐기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런 내용은 비단 아나운서 직업군에 한정된 적용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필요에 의해 화술, 화법 차원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발음, 낭송, 다양한 대상과의 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쌓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자신감, 자기표현 능력, 대인관계 등에서 기본 바탕이 되는 요소도 될 것이다.

이 책은 확실히 아나운서 지망생이 보면 여러모로 도움 받을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그런데 동시에 한 사람의 직업 적응기로, 저자가 어떻게 차근차근 아나운서로 정착해가는지 읽어가는 재미가 있다. 본사 아나운서 1년도 못 되어 저자는 마산으로 발령 받고, 1년 만에 다시 서울에 왔지만 부당한 인사 조치로 'KBS언어순화위원회'의 조사요원으로 생활한다. 거의 2년 만에 KBS 본사 아나운서로 돌아온 그는, 기존의 4교대 근무마저 빠르게 적응할 정도로 의욕과 자긍심이 넘친다. 이후 입사 3년 만에 라디오 방송 음악 프로그램을 맡게 된다. 이후 클래식 DJ 10년의 기록을 세운다. 이후 퀴즈 MC도 했다가 농어촌 프로그램을 맡고, 독일 출장도 가고...

그런 과정에서 당시 방송 현장이 어떠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저자의 적응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만큼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쌓인 실력과 단단해진 마음일 테지만. 그때를 돌아보면서 저자는 꼭 하나씩 자신에게 이로웠던 점을 건져낸다. 글을 읽어가면서, 열악한 상황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철저히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특히 독일어 공부에 매진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대학 때 부전공이었던 독어독문학 덕분에, 그는 입사시험에서 독일어 과목을 무난하게 통과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1998년부터 20년 넘게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한 PD로부터 "독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출장 어때요?" 하는 제안을 받게 된 것도, 그래서 괴테 탄생 250주년 특집, 이후에는 바흐 서거 250주년 특집 방송에 참여하게 된 것도 저자의 독일, 독어 사랑이 그 배경이 된다.

먼 발치에서 본 아나운서실은 정적인 공간으로 보였는데, 내부자의 시선에서는 잦은 파업과 인사 발령 등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여러 부침 속에서 저자의 파란만장한 아나운서 생존기를 볼 수 있었다. 안식년을 앞둔 저자는, 서럽고 두려운 심정을 토로한다. 저자가 스스로 토닥이면서 이 책을 마무리하는 대목을 소개해본다.

"노마십가駑馬十駕란 말에서 용기를 얻는다. '둔한 말도 열흘 동안 수레를 끌 수 있다' 즉 재능이 적은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능력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저 없이 인생 후반전 버튼을 눌러 리셋하고,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다시 천천히 길을 나서련다."(317쪽)

저자 표현대로 이 책은 '잡다한 신비의 소굴' 같다. 36년간의 직업 적응기로 볼 수도 있고 그 과정 가운데 에세이와 자기계발서의 성격도 묻어나고, 아나운서로서 말하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한 내용들을 보면 영락없이 화법에 관한 실용서다. 글을 읽으면서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들, 저자만의 표현을 확인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말하기에 대한 글이 좋았다. "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어떤 표현과 화법을 구사할 것인가가 시대가 요구하는 국어의 영역이 아닐까" 하는 대목도 수긍이 되었다. '나오며'에서 저자는 '재미있고 유익하게'. 이 숭고한 목적을 위해 글을 썼다고 밝힌다. 내게는 그의 뜻이 제대로 부합되어 전달되었다.

그런데 제목을 꼭 이렇게 지어야 했을까.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참신하게 만들 수는 없었을까. 표지의 영문도 그렇고. 그것은 아쉬움이자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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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찬이 텅빈이 철학하는 아이 18
크리스티나 벨레모 지음, 리우나 비라르디 그림, 엄혜숙 옮김 / 이마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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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주 출판사의 '철학하는 아이' 시리즈 중 '비움과 채움으로 맺는 진정한 관계' 편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이에게 한정된 내용은 아니다. 단순한 대조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상 많은 생각거리를 담고 있는 글, 흑백을 바탕으로 간결한 형체와 몇몇 도형만으로 글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그림 모두 인상적이다.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서로 다르지만 둘이 꽤 닮은 지점이, 바로 단순함과 간결함을 통한 풍부한 의미 전달이 아닌가 싶다. 옮김이의 해설과 글작가의 말도 첨부되어 있는데, 참고만 할 뿐 아이가 이 책을 읽을 때는 그 부분들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생각을 펼쳐가도 좋을 듯하다.

제목을 보면서 문득 고등학교 때 친구가 떠올랐다. 별명 얘기를 나눌 때였는데, 친구는 나에게 "너한테는 찬이가 어울릴 것 같아" 그러는 것이다. "꽉찼다는 의미로 말이야"라고 덧붙였고 나는 "이것저것 못하는 게 많은데 내가 무슨 찬이야?"라고 반문했었다. 그 친구는 진지하게 나의 장점을 얘기해줬고, 나는 퉁명스럽게 부족한 것 투성이인 내 모습을 열거했던 기억이 난다. 그전부터 그랬겠지만 그 후에도 오랫동안 나는 '꽉찬이'가 되고 싶은 '텅빈이'로 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채워야 한다는 갈망, 때로는 강박으로.

이 책에서 기본 전제는 꽉찬이도 텅빈이도 동등한 입장이라는 점이다. 얼핏 이름만 보고 뭔가 꽉찬이가 더 좋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채움이와 비움이라는 이름이면 어땠을까.) 둘 다 동일한 비중으로 자기 자랑을 하고 각자의 한계를 느끼며 서로를 궁금해 한다. 인상적인 것은, 둘이 각각 자신의 조각을 떼어 내어 상대방에게 줄 때 좀 아팠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은 똑같이 상대방이 되어버린 자신의 작은 조각을 잘 돌봐달라고 말한다.

나와 타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이 책은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우리가 맺어가는 가까운 관계망 속에서 자칫 내가 없어질 때도 있다. 아니면 편하고 친하다는 이유로 타인이 곧 내가 되기를 바랄 때도 있다. 핵심은 자신의 일부 조각을 떼어 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부일 필요가 없다. 그래도 아프다. 그만큼 우리는 작은 부분이라도 타인을 받아들이는 게 힘든 존재라는 반증이 아닐까. 작은 조각을 잘 돌봐야 하는 이유는, 너무 쉽게 내 방식대로, 내가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이 책으로 새롭게 모색해볼 여지도 있겠다. 이 책으로 생각의 폭을 넓히고 자신만의 사고 틀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적어도 명쾌한 듯 보이는 이분법적 사유가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쉽게 알아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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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무슨 일이? - 2021 볼로냐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작 올리 그림책 1
카테리나 고렐리크 지음, 김여진 옮김 / 올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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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샤를 페로의 <빨간 망토>를 꼭 읽어야 할까. 그림 형제의 <빨간 모자> 정도면 괜찮을까. 유명한 동화 선집을 구매하면서 고민했던 부분이다. 잔인한 늑대 이야기는 줄거리만 떠올려도 끔찍하다. 아무리 화려한 일러스트와 특이한 기법으로 장식한 그림책으로 나오더라도, 그런 줄거리는 아이와 함께 보기가 꺼려진다. 실제로 늑대가 위험한 동물인 게 맞고, 늑대를 못된 인간의 상징으로 본다고 해도, 지금은 아이에게 현실 그대로의 모습보다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뭔가 다른 늑대 캐릭터를 예감하게 만드는 이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야!

책장을 넘기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해 봐.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뒤표지의 문구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적어도 무서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반전의 재미도 선사한다면 정말 기분까지 좋아지겠지. 책표지의 창문으로 언뜻 보이는 늑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 늑대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일까. 더구나 '2021 볼로냐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작'이라는 은빛 마크가 궁금증과 기대감을 더한다.

글, 그림작가는 러시아 사람으로 일러스트레이터 겸 변호사다. 그림체가 간결하고 시원스러운 느낌이다. 빨강과 검정을 주로 사용하면서 두 색의 농도 조절로 변화를 주고, 간간이 사용된 녹색이 색조의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최소한의 색감 사용과 변주로, 각 그림에 해당하는 짧은 글이 자연스럽게 그림 속에 스며든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열세 편의 장면을 펼치기 전에 매번 책표지에 나온 창문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전체 그림의 일부만 창문을 통해 엿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막상 펼쳐보니, 늑대가 주인공으로서 전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동물들이 등장하고, 할머니와 아이도 나오고, 마지막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도 선보인다. 뒤표지에 나온 문구처럼, 이 책을 넘겨가면서 창문을 만날 때는 곧장 전체 그림을 보지 말고 반드시 상상해봐야 한다. 그러면 이 책의 재미와 의미가 더 배가될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슬며시, "나 쟤 잘 알아", "나 저 사람 잘 알지"라는 말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타인이 내게 그렇듯이, 나 또한 타인의 일면만 보고서 전체를 단정해버리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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