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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어바웃 아나운서
강성곤 지음 / 형설미래교육원 / 2021년 3월
평점 :
"처음 듣는 스토리, 새뜻하고 유익한 지식, 소름 돋는 디테일, 불편한 진실, 난데없는 품격과 권위 등을 마구 버무렸는데 하나라도 유익이나 흥미, 혹은 통찰 언저리를 건졌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6쪽)
'들어가며'에 나오는 저자의 말이다. 아담한 판형과 함께, 뭔가 예상 밖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책이겠구나 싶었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유익'을 위해서였다. KBS 아나운서 36년 경력의 저자 소개를 보면서, 한 직업을 오랫동안 지속해온 사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재미가 없더라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말 바로 쓰기의 사례도 챙겨보자 싶었다.
평소 후배들 앞에서 후일담을 풀 때도 '꼰대', '라떼'를 조심한다는 저자는, 이 책에서도 그런 마음을 담은 듯 보인다. 그저 이야기보따리, 수다와 자랑질, 지적 탐험, 내밀한 감정을 좌충우돌, 종횡무진, 뒤죽박죽 썼다고 너스레를 떤다.
저자는 아나운서의 기본 덕목을 목소리, 읽기, 대화 습관으로 서술한다. 좋은 발음의 첫걸음은 정확한 음가 내기부터, 21개의 모음을 제대로 소리 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정제되고 가다듬은 소리가 필요한데 저자는 이를 '금속의 제련 과정'에 비유한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으려면 인쇄물을 수시로 접해야 한다. 입 근육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남녀노소에 따라 말하기를 변환하면서, 유익한 대화를 즐기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런 내용은 비단 아나운서 직업군에 한정된 적용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필요에 의해 화술, 화법 차원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발음, 낭송, 다양한 대상과의 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쌓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자신감, 자기표현 능력, 대인관계 등에서 기본 바탕이 되는 요소도 될 것이다.
이 책은 확실히 아나운서 지망생이 보면 여러모로 도움 받을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그런데 동시에 한 사람의 직업 적응기로, 저자가 어떻게 차근차근 아나운서로 정착해가는지 읽어가는 재미가 있다. 본사 아나운서 1년도 못 되어 저자는 마산으로 발령 받고, 1년 만에 다시 서울에 왔지만 부당한 인사 조치로 'KBS언어순화위원회'의 조사요원으로 생활한다. 거의 2년 만에 KBS 본사 아나운서로 돌아온 그는, 기존의 4교대 근무마저 빠르게 적응할 정도로 의욕과 자긍심이 넘친다. 이후 입사 3년 만에 라디오 방송 음악 프로그램을 맡게 된다. 이후 클래식 DJ 10년의 기록을 세운다. 이후 퀴즈 MC도 했다가 농어촌 프로그램을 맡고, 독일 출장도 가고...
그런 과정에서 당시 방송 현장이 어떠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저자의 적응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만큼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쌓인 실력과 단단해진 마음일 테지만. 그때를 돌아보면서 저자는 꼭 하나씩 자신에게 이로웠던 점을 건져낸다. 글을 읽어가면서, 열악한 상황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철저히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특히 독일어 공부에 매진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대학 때 부전공이었던 독어독문학 덕분에, 그는 입사시험에서 독일어 과목을 무난하게 통과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1998년부터 20년 넘게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한 PD로부터 "독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출장 어때요?" 하는 제안을 받게 된 것도, 그래서 괴테 탄생 250주년 특집, 이후에는 바흐 서거 250주년 특집 방송에 참여하게 된 것도 저자의 독일, 독어 사랑이 그 배경이 된다.
먼 발치에서 본 아나운서실은 정적인 공간으로 보였는데, 내부자의 시선에서는 잦은 파업과 인사 발령 등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여러 부침 속에서 저자의 파란만장한 아나운서 생존기를 볼 수 있었다. 안식년을 앞둔 저자는, 서럽고 두려운 심정을 토로한다. 저자가 스스로 토닥이면서 이 책을 마무리하는 대목을 소개해본다.
"노마십가駑馬十駕란 말에서 용기를 얻는다. '둔한 말도 열흘 동안 수레를 끌 수 있다' 즉 재능이 적은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능력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저 없이 인생 후반전 버튼을 눌러 리셋하고,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다시 천천히 길을 나서련다."(317쪽)
저자 표현대로 이 책은 '잡다한 신비의 소굴' 같다. 36년간의 직업 적응기로 볼 수도 있고 그 과정 가운데 에세이와 자기계발서의 성격도 묻어나고, 아나운서로서 말하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한 내용들을 보면 영락없이 화법에 관한 실용서다. 글을 읽으면서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들, 저자만의 표현을 확인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말하기에 대한 글이 좋았다. "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어떤 표현과 화법을 구사할 것인가가 시대가 요구하는 국어의 영역이 아닐까" 하는 대목도 수긍이 되었다. '나오며'에서 저자는 '재미있고 유익하게'. 이 숭고한 목적을 위해 글을 썼다고 밝힌다. 내게는 그의 뜻이 제대로 부합되어 전달되었다.
그런데 제목을 꼭 이렇게 지어야 했을까.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참신하게 만들 수는 없었을까. 표지의 영문도 그렇고. 그것은 아쉬움이자 의문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