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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화가 - 한국 문단과 화단, 그 뜨거운 이야기
윤범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21년 5월
평점 :
내가 사는 지역의 공원에는 일년에 한두 번씩 시화전시를 한다. 참여자들은 지역 문인회와 그림 동호회 소속인 사람들이다. 보도블록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시화전시 작품을 보면서, 시와 그림이란 정말 조화롭게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했다. 시를 돋보이게 하는 그림, 그림에 잘 스며드는 시의 느낌이랄까. 이 책의 제목이 얼핏 단순해 보여도, 이토록 담아낼 내용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제목이 있을까 싶다. <시인과 화가>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인 저자가 오래전 잡지에 연재했던 내용을 단행본으로 엮어낸 것으로, 크게 열일곱 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았다.
화가 나혜석과 시인 최승구, 시인이자 화가였던 이상 이야기는 나혜석과 이상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면을 강조했다. 카프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조각가 김복진 이야기는 생소했으며, 집안의 민족의식과 문화예술 취향에 영향을 받은 시인 이상화 이야기를 통해 시인의 가족사를 처음 알게 됐다. 길림성 용정에서 기려지고 있는 시인 윤동주와 화가 한낙연의 경우, 같은 고향 출신이라도 서로 알지는 못했지만 저자의 글로써 그 지명의 역사적 의미가 되새겨진 듯하다.
저자는 시인 이상과 백석, 화가 이중섭과 어울렸던 화가 김병기,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배경 그림을 통해 시화 동체의 모범을 보여준 시인 백석과 화가 정현웅, 함께 남해 여행을 하면서 지역신문에 <남해 오월 점철>이라는 글과 그림을 연재하며 화문 기행의 결합을 보여준 시인 정지용과 화가 정종여, 문학잡지 <문장>의 대표 작가였던 이태준과 그 잡지의 표지화를 즐겨 그린 화가 김용준, 문인들과 교유하며 문학 도서의 표지화를 그렸을 뿐 아니라 작품세계에 시정신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화가 김환기, 문인들에게 사랑받지만 여전히 미술사학계의 연구 과제로 남은 화가 이중섭, 불교적 세계관과 접점을 가진 시인 오상순과 화가 허인두 등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 책의 제목 <시인과 화가>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내용들이다.
물론 '시인'은 문인 전체, '화가'는 미술가 전체를 상징하는 의미리라. 궁핍한 시대의 상징이자 자화상이었던 '나목'(이파리 없는 겨울 풍경)을 그린 화가 박수근과 그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 박완서 소설 <나목>, 평화와 은혜의 예술적 표현을 공유했던 부부 예술가인 시인 김남조와 조각가 김세중,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조소작가 김종영 등의 이야기는 그런 확장 개념일 것이다. 이원수 작사의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울긋불긋 꽃대궐'은 조소작가 김종영의 창원 소답동 생가다. 저자는 그 꽃대궐을 중심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할 만하며, 그곳의 의미를 한국인의 고향으로 승화시킬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빠생각>의 작사가 최순애가 이원수의 아내였고, 나혜석과 동창이었다는 인연도 소개한다. 고향의 서정을 담은 소설가 오영수와 아들이자 미술가 오윤 이야기는 연작처럼 민중화가 오윤과 김지하 이야기로 이어진다. 책 말미에는 오윤 30주기 회고전 기념 공개 좌담회(2016년) 내용도 실려 있다.
한 편의 글 속에 폭넓은 내용이 압축된 느낌이다. 각 문인과 미술가의 인생, 예술적 특성, 가족과 연인 및 친구 관계,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소, 문인의 글과 미술가의 작품 사진, 관련 자료, 저자 개인과의 에피소드 등이 알차게 수록되었다. 여러 편의 이야기 중에서 여성의 관점에서 생각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나혜석과 이상 편이 인상에 남는다.
'파격을 그린 화가와 저항시인' 편에서는 나혜석과 최승구의 슬픈 사랑을 보여준다. 저자는 최승구의 자취를 찾아 도쿄 게이오 대학에 간다. 조선인 유학생 관련 자료 가운데 <생도 학적부>를 조사하면서 최승구의 자료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소개한다. 또한 오사카에서 야나기하라 기쓰베(오사카 사업가로 조선 여학생의 일본 유학을 도왔던 인물)와 편지 왕래를 했던 김숙배(나혜석의 숙모)의 편지 내용 중에서 나혜석 관련 내용을 찾기도 한다. 이러한 문학기행으로 더욱 생동감 있는 글이 된 듯하다.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 비추어 파격적인 주장을 했던 나혜석의 인생, 시, 그림 등을 아우르되, 저자는 그녀가 요절한 최승구와의 못다 이룬 인연에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저자의 표현대로 최승구의 저항시에서는 역동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잘 몰랐던 그의 시 '벨지엄의 용사', 나혜석의 시 '빛'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박제된 천재의 비밀' 편에서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이상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를 소개한다. 저자는 김향안(이상의 아내였다가 화가 김환기와 재혼한 인물로 당시 이름은 변동림)의 언급도 비중 있게 다룬다. 이상의 소설 <날개>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설 속 아내가 참 이상하다는 느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실제 아내였던 김향안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자들은 그런 식으로 연관을 시켰던 것이고, 그런 점이 당사자로서는 불쾌했을 것이다. 작가가 자전적 소설을 표방한 게 아니어도, 독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멋대로 작가 주변 인물의 반영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개인적 감상의 자유 영역이겠지만, 유명한 문인의 가족은 이래저래 피곤할 일도 있겠구나 싶다. 이 책은 시인이자 화가 이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또한 비밀스럽게 바라보게 만든다.
이 책을 통해, 잘 몰랐던 한국 문단과 화단의 만남, 특히 미술가들과 그 작품세계를 알게 되었다. 화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에 대해 퍼즐조각처럼 분산되어 알던 내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된 느낌이다. 돌아보면,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미술작품들을 좀처럼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듯하다. 앞으로 우리나라 문인과 미술가의 기념관, 작품 전시회에도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계기로 삼아본다.
[출판사의 제공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