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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 이어령 산문집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평점 :
이어령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데요, 이 책은 2010년 초판의 개정판입니다. 이번에는 날카로운 식견과 창의적인 발상, 전방위적인 지식, 한국인에 대한 고찰 등을 담은 책들과 결이 다른 '산문집'이에요. 제목에서 충분히 짐작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어떤 문장으로 형상화되어 있을지 기대하며 펼쳐보았습니다. 본문의 첫 대목부터 마음이 오래 머물게 됩니다.
나의 서재에는 수천수만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이다.
이 한 권의 책, 원형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이 나의 어머니이다.(19쪽)
산문집에 수록된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중 '책'에 대한 내용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담긴 근원적인 책 한 권이, 선생님의 삶 가운데 60년간 수천수만의 책이 되고, 수십 권의 글을 쓰게 했다고 해요. 다른 은유 가운데 '금계랍'이라는 낯선 용어도 알게 되었네요.
어머니와의 '나들이'는 선생님이 떠나는 법과 돌아오는 법을 배운 시공간이고, 먹을 양식이 담겨 있던 '뒤주'는 묵직하고 당당하게 집안을 지키는 어머니이며, 넓고 깊은 '바다'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입니다. 당시 귀했던 '귤'은 어머니의 사랑과 선생님의 그리움을 담은 가슴 아픈 과일이 되었어요. 제목과 동일한 이 여섯 가지 비유 내용이 깊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오르페우스의 언어'에서는 상징적인 표현이 나오는데요, 낙타의 혹과 선인장 안의 샘이란 외부의 신기루와 대비되는 것으로 내부에 있는 신화의 도시입니다. 그중 상충되는 것을 하나로 융합케 하는 결합의 언어는 오르페우스의 피리이지요. 특히 다음 내용을 곱씹게 되더라고요.
아무리 세속의 조건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하더라도 나는 꿈 문학 속에서 늘 추락하리라. 나의 지식으로부터 재력으로부터 명성이나 박수 소리로부터 자진해서 추락하는 꿈을 꾸어야만 내 신장은 멈추지 않고 커갈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신기루에 속지 않기 위해서.(66쪽)
기꺼이 추락하는 꿈을 꾼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에요. 선생님은 위 글의 내용처럼 사셨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자신의 지식, 명성에 매이거나 그런 신기루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끊임없이 사유를 넓히고 글의 지경을 확장해 가시면서요.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것들을 지적한 내용 같기도 해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 사람들의 찬사와 추켜세움에 스스로 발전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어리석음 등에 대해서요.
"여섯 살 때의 우수는 포대기 속에 있었다."로 시작되는 '우수의 이력서'는 쓸쓸한 분위기의 글입니다. "겨울은 그렇게 사라져간다. 하나의 연이 날아오르듯이."라는 구절이 두드러졌던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도 마찬가지 느낌이고요. 잃어버린 꿈, 덧없이 흘러버린 세월, 언젠가 사라져버릴 삶에 대한 감상으로 이끄는 글 같아요. 개인의 체험과 사유가 개별성을 넘어 공통성을 지향하는 지점도 있습니다. 고향, 탄생, 어머니와 아버지의 세계 등에 대한 글이 그랬어요.
성경 속 노아의 방주에 대한 글은 생각의 여지를 안겨줍니다. 선생님은 노아를 구제받은 행복자가 아니라 가장 불행한 의인이라고 명명하지요. 이웃들이 모두 침몰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으니까요. '방주'가 꽤 많은 뜻을 담고 있었어요.
방주를 부숴라! 혼자 살아남은 행복의 그 방주를 후회하라! 인류의 불행에서 도망치려는 돈과 권력의 방주를 거부하라! 이것이 우리들의 이웃을 다시는 침몰시키지 않게 하는 영원한 방주를 만드는 일이다.(185쪽)
뒤이어 "같이 젖어야 한다. 흠씬 젖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구절에서는, "돕는다는 것은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했던 신영복 선생님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혼자 살아남거나 아예 젖지 않는 인생이 아니라, 같이 구제받거나 함께 흠뻑 젖는 인생에 대한 공통 분모가 있는 듯해요.
읽는 사람마다 마음이 머무는 문장들도 다를 거예요. 저의 경우는 원형의 책, 추락하는 꿈, 영원한 방주와 관련된 표현들을 꼽아봤어요. 이 책을 통해 이어령 선생님의 문학적 자서전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땅파기'가 모든 문학적 동기가 된다는, 재미있으면서 상징적인 표현도 나오지요. 선생님의 문학적 밑거름, 그 근원이 궁금하다면, 또한 선생님만의 사적 체험과 감상을 담은 산문을 읽고 싶다면,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와 만나보세요.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