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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이야기하는 책 읽기 - 가짜 이야기, 진짜 이야기, 이야기의 순간
조서연 지음 / 아우룸 / 2021년 8월
평점 :
"언제 소멸될지 모르는 제 이야기를 이야기하기로 복원시키는 동안, 어머니와 함께한 이야기의 순간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11쪽)
궁금증을 일으키는 제목과 함께, 프롤로그에서 저자의 말에 주목해본다. 대학에서 책읽기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저자는, 이 책에서 먼저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선보인다. 다음으로 그 이야기에 대해 엄마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다. 전체적으로 일곱 편의 이야기와 이야기하기가 나와 있다. 각 이야기하기의 주제가 나와 있는데, 질문식의 주제들이 독자인 내게도 말을 거는 듯하다. 그중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소개해본다.
"무엇 때문에 말하기가 힘든 것일까?"
'소설 쓰는 여자'에서, 소소연 씨는 말문을 닫은 백발 노인의 입모양을 보고 글로 옮기는 일을 맡는다. 그 일을 의뢰한 여자는 엄마의 말에 복종하며 살다가 화가의 꿈과 멀어진 자신을 돌아보며 무작정 이탈리아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왔다. 그러자 엄마가 자신을 보고 입을 봉해버린 것이었다. 소소연 씨는 자신 앞에서는 의심스럽게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던 노인이 도우미 아주머니와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후 그곳의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소소연 씨 개인의 에피소드도 교차된다. 어릴 적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사실을 엄마에게 이야기하자, "그건 꿈이야."라고 말하며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던 엄마. 훗날 엄마의 유품인 일기장을 보면서, 딸이 자신이 겪은 일을 꿈이라고 믿도록 주문을 외웠다는 엄마의 진심을 알게 된다. 이야기가 끝나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저자와 엄마는 소소연 씨의 심정을 비롯한 소설 전반에 대해, 실제 저자와 엄마 사이에 있었던 단절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스스로든 타인에 의해서든 차단된 말하기란, 어떤 식이든 표출되게 마련이 아닐까. 내밀한 일기로 혹은 공개된 소설로. 소소연 씨의 경우는 말문이 막혀버린 자신의 상황, 심정에 대해 결국 모두 소설로 발설한 셈이다. "무엇 때문에 말하기가 힘든 것일까?"를 조금 변형해서 "무엇 때문에 말하기가 힘들었을까?"로 표현해본다. 말하기에 대한 화두라면 떠오르는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참 많다. 실제 있었던 일과 허구적 상황을 결합시키면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지, 이 소설을 읽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듯, 이 책은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머물지 말았어야 할 공간이 있을까?"
'판도라의 상자'에서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작중화자가 떠올리는 다섯 공간이 나온다. 그 공간은 개인뿐 아니라 타인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에는 클리셰의 반복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작중화자의 남자친구는 자기가 아는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로 인해 무기력해진 일상에 유부남 K가 나타난다. K는 잘 아는 작가 S선생의 남편인 줄 알았지만 실상 K 핸드폰에 저장된 S선생은 또 다른 S선생일 뿐이다. 작중화자는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처참한 표정을 지었던 K와 헤어진 후, 우연히 K와 함께 있는 단짝친구 M을 발견한다. 이어서, 저자와 엄마의 대화를 통해 이 이야기를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대화 가운데 저자의 다음 말에서 나의 공간도 소환된다.
"그들은 '나'를 힘들게 했던 인물들이니 애초에 대면하지 않았어야 해. 그 장소에만 가지 않으면."(79쪽)
애초에 대면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들, 그 학교, 그 공동체, 그 직장이 아니었다면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곤 한다. 그러다가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답변을 저자의 엄마에게서 발견한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추억으로 생각하고, 아닌 것도 경험으로 여기면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로 삼아야 한다."(85쪽)
'지도의 역사'에서는 국제상사를 찾아가는 길치 여자가 나온다. 길, 지도는 짐작하듯이 인생 행로에 비유될 수 있다. 이야기 주제는 "마음을 움직이게 한 힘은 무엇일까?"이다. 주인공 여자가 머리띠 남자를 찾아나서기로 한 까닭이 소설 속에서 불분명한 것처럼, 우리 삶에서도 감정과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손발이 움직이게 되는 일들이 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개념 장착 전에 벌이게 되는 일 혹은 벌어지는 사건이란 당혹스러울 따름이지만.
'그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에서는 아내에 대한 염려로 집안을 온실이 아닌 감옥으로 만든 남편이 있다. 수시로 전화하는 남편으로 인해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지내는 아내는, 담배를 피우게 되고 귀를 쫑긋 세우며 이웃 집의 소리를 듣는다. 남편의 불안 심리는 친구의 아내가 집 보러 온 사람이라고 해서 문을 열어준 후 목숨을 잃은 데 기인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소설 배경으로 끌어온 것이다. 이야기 주제는 "관심을 가지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이다. 관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타인의 행위에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가 허락된다. 저자 엄마의 말처럼 관심과 집착은 한 끗 차이일 테니, 그 경계란 참 어렵다.
이 외에도 흑석동 하숙집 대학생이 작중화자인 '검은 돌의 노래'에서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해야 할까?"라는 주제로, 동생에 대한 질투와 아이 낳지 못한 콤플렉스를 가진 여자의 심리를 그린 '한나의 실험'에서는 "콤플렉스는 무엇에 의해 만들어질까?"라는 주제로, 뇌종양 판정을 받은 여자가 찾아가는 불빛 혹은 기억의 편린을 담은 '반짝이는 그 무엇'에서는 "마지막에는 어떤 기억만 남게 될까?"라는 주제로 대화가 이어진다.
전반적으로 참 독특한 책이다. 공모전에 내고 상을 받았다는 한 작품을 제외하면 다른 곳에 발표되지 않은 소설들, 독자에게도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주제 아래 펼쳐지는 저자와 엄마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주제에 따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엄마와 함께 소설의 제목, 인물, 구조, 가족간의 추억 등을 이야기한다. 그 무엇보다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소설 이야기하기가 아니라도, 나만의 다른 형태로.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소설의 존재 이유가 뭘까 하는 질문도 해본다. 그것은 삶에 지치면서도 이야기를 찾아 책을 읽는 이유와 연관될 것이다. 그 이야기가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물, 책이라는 인쇄매체 혹은 파일 형태로 그치지 않고, 이야기하기로 뻗어갈 때, 비로소 이야기란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 아니 삶을 지탱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책 읽기, 나아가 책 쓰기란 결국 삶을 이야기하기 위한 절실하고 치열한 몸짓일 터이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