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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인문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2년 7월
평점 :
올해 초부터였을까. 아이와 함께 매주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을 보는 중이다. 거실 스크린을 통해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던 앤을 다시 마주하니, 당연하게도 줄거리 이상의 것들이 보인다. 언젠가 축약본 말고 제대로 된 원작소설로 읽어야지 하고 마음만 먹던 중, 흥미로운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빨강머리 앤 인문학>인데, 법학자이자 아버지인 저자가 딸에게 쓰는 편지글로 되어 있다. 자신의 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딸에게 읽히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다. 어떤 이야기일까?
이 책은 크게 나, 루시, 앤, 배시, 카퀫, 그 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나의 이야기'에서는 소설 <빨강머리 앤>이 가진 보수성, 획일성, 비현실성, 앤과 삐삐 혹은 앤과 윌러비의 비교 등이 나온다.
'루시 이야기'는 원작소설의 작가 루시 몽고메리에 관한 내용이다. 태어난 시대 배경, 가정환경, 성격, 작가적 재능 등 루시의 삶을 스케치하면서, 저자는 루시의 한계를 지적한다. 인디언이 외부의 노예, 여성들이 내부의 노예였다는 자각이 루시에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가 진보적이었던 반면 루시 몽고메리는 보수적이었던 면들을 대비시킨다.
'앤 이야기'에서는 원작소설이 일본어 번역본으로 나온 배경, 건강한 가정문학으로 포장되어 소설 속 보수성을 더욱 극대화시킨 당시 시대상이 언급된다. 또한 원작의 앤과 넷플릭스 드라마 속 앤, 원작과 드라마 줄거리 및 구성의 차이점이 상세히 나온다. 가장 큰 차이는 브로치 사건으로, 드라마에서는 그 사건 이후 앤의 입양과정을 분명히 보여준다.
저자는 커스버트 남매로 인해 독신 입양의 긍정적 선례를 남겼다는 견해에 이어, 19-20세기 캐나다의 고아와 아동노동 문제, 여성운동 등을 다룬다. 이채로운 점은, 루시 몽고메리의 보수적 성향과 별개로 원작 속에서 앤이 연대를 통한 여성들의 새로운 공동체 형성에 중심 인물로 비춘다는 것, 마릴라가 페미니즘적 여성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후 전개되는 '배시 이야기'와 '카퀫 이야기'는 원작과 달리 넷플릭스 드라마에 새롭게 추가된 요소를 중심으로 한다. 핵심 요소는 흑인과 인디언의 등장이다. 이들이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은 근본 원인이 서양 제국주의라는 것. 저자는 이 사실을 전제로 드라마 속 인물들, 드라마 밖 인디언 기숙학교, 캐나다 내 인디언 인권운동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 외에 저자는 원작을 미국 동화로 오해할 여지에 대해, 루시 몽고메리를 잇는 오늘날의 캐나다 여성 작가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 책의 머리말과 맺음말에서, 저자는 여러 번 강조한다. 언제나 당당하게 나를 드러내는 앤처럼 살자고. 앤처럼 유일성을 잊지 말고 살아가자고.
"사랑한다, 딸아. 우리, 앤처럼 살자, 자기만의 삶을 살자, 기성의 속물이 되지 말자, 나를 세우되 남을 돕자, 야만에 맞서 바르게 살자, 그래서 다시 '앤'처럼 살아보자."(234쪽)
이 책으로 빨강머리 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의 위대함이랄까 그런 것도 실감한다. 작가와 원작의 한계에도 불구하고(물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겠지만) 캐릭터 앤이 주는 각성, 감동, 영향력이 영원하구나 싶어서. 이 책은 원작과 작가, 시대 배경 등을 더욱 폭넓게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준다.
문득 내가 아이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자고 제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책꽂이에 꽂아놓은 축약본 동화에 아이가 관심을 보였던 까닭만은 아니다. 계기가 있었다. 언젠가 거실에서 놀다가 넘어진 아이가 울음을 참는 것이다. 한 번도 눈물 뚝,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오히려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 말해왔는데 자기 딴에는 더 이상 스스로 아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캔디가 아니고 앤이 되어야 하는데.' 그때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정기적인 가정영화관 개봉으로 이어진 셈이다.
나는 감정에 솔직한 앤이 좋았고 아이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지금 어릴 때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타인을 배려하되 나를 감추거나 나다움을 지우지 말기를, 세상이 만든 틀에 자신을 가두지 말기를 바란다. 어쩌면 어른인 내게도, 이 책의 저자가 말한 '유일성'을 찾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아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라도.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