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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평점 :
들어가기.
어릴 적 누구나 한번 쯤 해보았을 땅따먹기라는 놀이를 다들 기억할 것이다. 드넓은 운동장에서 먼저 서로의 영역을 자그마하게 정한 뒤 돌멩이를 손가락으로 퉁기며 서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다. 이 돌멩이는 내 손가락에 의해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다. 그 드넓었던 운동장 어느곳으로든. 나의 영역을 그렇게 넓혀가다보면 우리는 언제고 내 친구의 영역과 마주치게 된다. 그 넓은 운동장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부유하다가 이윽고 어느순간 그 친구의 영역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나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그의 영역속으로 들어간다. 돌멩이가 그의 영역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무사히 나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그만큼은 나의 땅이 된다. 그만큼 나와 그의 땅은 '관계'를 맺는다.
간다. 어디를? 그냥 어디든. 누가? 내가. '간다'는 얘기는 상관이 없다. 누가 가든 말든 그건 그 혼자만의 일이다. 그가 어디를 가건 그냥 어디론가 배회하고 방황하고 유영할 뿐이다. '간다'라는 동사는 단지 나 혼자를 이르는 단어일 뿐이다. 드넓은 운동장 어디를 향하든 그의 오고 감은 자유롭다. 누가 끼어들 필요 없이. 들어간다. 누가? 내가. 어디를? 너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단어는 나 혼자만의 동사가 될 수 없다. 그 자체에는 이미 너의 영역과 나의 존재, 그리고 그 둘의 만남과 교차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들어왔다. 이미 내가 너의 영역으로 들어 온 순간, 이제 나와 너는 '관계'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나를 들어가게 해줘. <렛미인>은 그 들어감. 그리고 그로 인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관계.
<렛미인>에는 수많은 관계가 생겨나곡 해체됨의 반복과 생산이 표현된다. 그리고 작가는 뱀파이어와 한 소년의 우정이라는 큰 줄거리를 그려나감과 동시에 그 크고작은 관계들 역시도 소홀하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관계들은 크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의 관계로 이루어지며 작가는 그 세가지 이야기를 주된 이야기 속에서 적절히 버무려 놓고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톰미의 이야기는 '가족'의 관계를 대변한다. 3년전 죽은 아빠,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사랑을 찾은 엄마 이본. 그 엄마의 새로운 사랑 스타판과 이본의 아들 톰미. 스타판은 이본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 그녀의 아들 톰미의 영역속으로 들어가기를 갈구한다. 나를 들여보내줘. 그러나 톰미는 스타판에게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톰미는 지하실 속 그와 친구들의 공간속에 침전한다. 그리고 톰미와 스타판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그 순간 괴물이 들이닥친다. 그 괴물은 허락도 없이 톰미의 아지트로 들어왔다.
톰미의 이야기가 가족의 이야기를 대변한다면, 라케의 패거리들은 친구들 간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요케의 죽음 앞에서 라케는 자신의 반쪽을 잃은 양 괴로워한다. 그들은 비록 겉보기엔 죽지 못해 사는 잉여인간처럼 보일지라도 그들 간의 의리는 어느 누구 부럽지 않다. 그들간의 이야기는 파국을 맞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는 엘리가, 뱀파이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등장한다. 요케의 죽음은 분명 뱀파이어의 짓이다. 그러나 그건 천재지변에 가깝다. 마치 지나가다가 벼락에 맞아 죽은 것만 같은. 우리는 아무도 지나가다 친 벼락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그 사람의 죽음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누구에게 잘못을 물을 수 없는 그런 죽음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안타깝게도 그들의 친한 친구를 잃었지만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이야기 내내 방관자적 입장을 고수한다.
뱀파이어로 인해 위기에 처하는 건 톰미뿐이 아니다. 비르기니아. 이제 폐경기에 접어들어 더이상 여자로서의 삶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 라케가 그녀의 품에 들어간다. 물론 그 전에도 둘은 오고가는 사이였지만, 라케는 그 무렵 확실하게 자신이 비르기니아의 품에 들어갔음을 자각한다. 사랑. 서로가 서로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 그런데 그 관계가 요케의 죽음으로 인해, 그리고 그 둘의 과거의 경험을 통해 위태위태하다. 그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관계가 팽팽하게 진행되던 중 결국 비르기니아의 사랑은 라케의 폭언으로 인해 종말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역시 그 순간 엘리가 나타났고 그 둘의 관계는 새롭고 폭발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작가는 쉽고도 어려운, 아니 상당히 어렵지만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가장 보편적인 세가지 유형의 관계를 이야기와 함께 꾸준히 밀어붙인다. 결국 <렛미인>은 뱀파이어와 소년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반복되는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의 관계가 파국을 맞을 무렵 그들은 항상 괴물의 존재를 맞닥뜨렸다. 톰미의 지하실에 괴물이 나타나고, 비르기니아에게 엘리가 떨어져내린다. 물론 라케 패거리에게도 요케의 죽음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약간 의미가 다르다. 천재지변은 관계의 파국과 상관이 없다. 괴물은 항상 그 관계가 파국을 맞을 때 그들에게 찾아들어왔다. 결국 괴물은 외부의 존재이지만, 내 안의 모습이 투영된, 우리의 관계가 투사된 존재이다.
너는 나야.
오스카르가 엘리를 처음 본 그 순간. 오스카르는 칼날에 비친 엘리를 보았다. 오스카르가 받은 상처와 모욕이 그의 안에서 환상이 되고 공격성으로 변해갈 무렵 엘리는 오스카르의 앞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위에 나온 비르기니아, 톰미의 앞에 나타난 괴물과 엘리 그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오스카르 역시 그 자신이 스스로 너무도 힘에 겨워할때, 그리고 그것을 못 이기고 어떤 짓을 저지를지도 모를 그 상태에서 엘리가 나타난다. 그렇지만 엘리는 그냥 나타나기만 했다. 톰미와 비르기니아 앞에 나타난 그것과 달리 그저 나타나기만 했다. 칼날에 비친모습으로. 칼날에 비친 모습은 곧 오스카르 자신은 아니었을까? 오스카르는 날카롭고 서슬퍼런 칼날에서 엘리를, 흉폭한 자신을 발견한다. 친구가 없는 존재.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존재. 그러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은 존재. 그것을 환상속에서, 그리고 실제로, 공격성으로 발휘하고 싶은 존재와 발휘되는 존재의 만남은 엘리가 "너는 나야"라고 말하듯 서로 동일한 존재의 만남이다. 그래서 오스카르는 아무 스스럼 없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던 엘리의 마음으로 오스카르가 너무도 쉽게 들어왔다. 엘리가 오스카르와 키스하는 순간 오스카르가 엘리가 되는 것과 같이 오스카르가 엘리의 뺨에 손을 가져간 순간 엘리 역시 오스카르가 되었다. 그 둘은 그렇게 만나고 서로가 같은 존재임을 느꼈다. 서로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엘리가 오스카르의 곁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떠나간 이후에도 오스카르가 수영장에서 위험에 빠지자 엘리는 결국 나타났다. 엘리는 호칸을 찾기 위해서는 병원을 샅샅이 뒤질 수 밖에 없었다. 엘리는 호칸을 직감적으로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같은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카르가 위험에 빠지자, 엘리는 결국 오스카르의 곁에 본능적으로 나타났다. 오스카르와 엘리는 결국 다른 모습의 서로이기에.
오스카르.호칸.다른 결말.
오스카르가 많은 가방을 가지고 떠나는 모습에서 어쩌면 우리는 호칸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엘리는 여전히 나이를 먹지 않고 오스카르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스카르 역시 호칸과 같은 삶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둘이 떠나는 밝은 모습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 멀지 않는 미래에 닥칠 그런 슬픔을 함께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오스카르와 호칸은 다르다. 소아성애자이자 동성애자로 의심되기도 하는 호칸. 그 역시 엘리를 사랑했다. 엘리와 함께 살기도 하며, 아주 가끔 엘리의 애무를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엘리는 호칸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둘은 필요에 의한 관계다. 물론 사랑 역시 필요에 의한 관계다. 필요에 의한 관계라는 말에 너무 가혹한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랑하고 친구의 관계를 맺어간다. 그 안에서 생기는 정과 관계없이, 일단 모든 인위적인-가족과 같은 천륜이 아닌- 관계는 자기 만족이라는 필요에 의해서 생성되는 관계다. 엘리는 보다 편하게 생존하기 위해 호칸을 선택했고 호칸 역시 자신의 일반적이지 않은 성욕에 의해 엘리를 선택했다. 엘리와 호칸이 필요에 의한 관계, 인위적인 관계라면 오스카르와 엘리는 보다 어쩔 수 없는 관계다. 둘의 관계는 필요나 선택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아니다. 어쩌면 그 둘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필요에 의한 관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필요성'은 앞의 관계에 비해 훨씬 강렬하다. 그 둘은 서로 같은 존재다. 서로가 서로인 존재에서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서로를 보듬어주어야 한다. 전자가 보다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한 관계라면-엘리의 입장에서- 오스카르와 엘리의 관계는 보다 편리하기 위해 맺은 관계가 아닌, 살아가기 위한, 아니면 천륜과도 같은 어쩔 수 없는 관계를 맺어나간다. 어쩌면.. 오스카르 역시 호칸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갈수도 있다. 그리고 엘리는 다시 새로운 호칸,오스카르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엘리는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만났다. 어쩔 수 없이 열두살에 뱀파이어가 되었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존재 하나 없이 200년을 살아온 그에게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존재가 생겨난 엘리. 오스카르가 늙고 병들어 생을 마감할 때 어쩌면 엘리 역시 자신의 삶을 마감할 것만 같은. 엘리의 이번 여행이 그의 마지막 '삶'이 될 것 같은 예감. 이 예감은 비르기니아와 엘리의 차이를 보면 조금 더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비르기니아. 엘리. 다른 결말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었음을 자각한 비르기니아. 자신이 사랑하는 라케의 품안에서 스스로 불멸을 버리고 죽음을 택한 비르기니아. 역시나 어쩔 수 없이 뱀파이어가 되고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엘리.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무엇이 비르기니아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고 엘리를 200년의 시간동안 방치하게 두었을까.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 사랑을 경험해본 비르기니아. 자신의 딸, 자신의 손자를 낳고 사랑하는 비르기니아. 폐경기에 접어들어 이제 더이상 여성의 자존감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온 라케. 비르기니아는 이미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기에는 인생을, 사랑을 너무도 많이 알아버렸다. 그녀에게는 이미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에게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혹여나 자신으로 인해 그들이 조그마한 상처라도 받기보다는,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자신을 지키는 방법임을 그녀의 지나온 삶 속에서 체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는 달랐다. 틀린 것이 아니다. 엘리는 그러한 것을 알기 이전에, 너무도 어린 나이에 뱀파이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엘리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다.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엘리에게 죽음이란 너무도 무서운 존재였다. 엘리는 아직 죽음보다 더욱 소중한 무엇이 있기엔 너무도 어리고 미숙한 존재였다.
그것이 엘리가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엘리에게 자신과 같은 오스카르가 나타났다. 소중한. 자신과도 같은 존재.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아마도 엘리 역시 오스카르와 함께 뱀파이어로서의 '살아남기'가 아닌 인간다운 '삶'을 살다보면, 그리고 오스카르가 더이상 함께 해줄 수 없을 때가 된다면, 아니 오스카르에게 더이상 자신의 추악한 모습-뱀파이어의 삶이 추악하다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을 때 자연스레 생기는 자의식과 자각-을 보여주기 싫다는 생각이 들때면 엘리는 스스로 그의 삶을 마감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스카르와 엘리의 결말은 어쩌면, 아마도, 엘리와 호칸의 관계와 같은 결말은 나지 않을 것만 같다. 단지 내 희망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사랑과 삶에 그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이렇게 오스카르는 엘리의 영역에 들어가고 자리를 잡았다. 엘리 역시 오스카르에게 들어갔다. 엘리. 들어갈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존재. 엘리에게는 성(姓)이 없다. 엘리의 이러한 모습은 엘리 스스로의, 들어갈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재 모습을 상징한다. 엘리는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살아남았다. 그런 엘리에게 이제 오스카르가 생겼다. 처음으로 들어옴을 허락한 존재. 또한 엘리 스스로 들어감을 선택한 최초의 존재. 엘리는 이제 최소한 오스카르의 앞에서 만큼은 그의 영역에 들어감에 있어서는 허락을 받지 않아도, 피를 흘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어디든 엘리는 들어갈 수 없다. 만약 허락을 받지 못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경우에 엘리는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갈 수 밖에 없다.
"너는 나야." 우리,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러나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 역시 어딘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 특히 그 곳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이라면 더 더욱.
그래서 <렛미인>은 뱀파이어와 소년의 사랑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다. 가족과 친구, 연인의 이야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고 상처받으며 허락받지 않고, 허락받지 못하고 함부로 들어와 심장속에 뱀파이어의 세포덩어리를 전염시키는 것과 같이. 허락받지 않고는 서로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내가 허락을 구하고 네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나는 여기서 피를 흘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그 이야기가 내게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