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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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어릴 적 누구나 한번 쯤 해보았을 땅따먹기라는 놀이를 다들 기억할 것이다. 드넓은 운동장에서 먼저 서로의 영역을 자그마하게 정한 뒤 돌멩이를 손가락으로 퉁기며 서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다. 이 돌멩이는 내 손가락에 의해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다. 그 드넓었던 운동장 어느곳으로든. 나의 영역을 그렇게 넓혀가다보면 우리는 언제고 내 친구의 영역과 마주치게 된다. 그 넓은 운동장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부유하다가 이윽고 어느순간 그 친구의 영역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나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그의 영역속으로 들어간다. 돌멩이가 그의 영역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무사히 나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그만큼은 나의 땅이 된다. 그만큼 나와 그의 땅은 '관계'를 맺는다. 

 

간다. 어디를? 그냥 어디든. 누가? 내가. '간다'는 얘기는 상관이 없다. 누가 가든 말든 그건 그 혼자만의 일이다. 그가 어디를 가건 그냥 어디론가 배회하고 방황하고 유영할 뿐이다. '간다'라는 동사는 단지 나 혼자를 이르는 단어일 뿐이다. 드넓은 운동장 어디를 향하든 그의 오고 감은 자유롭다. 누가 끼어들 필요 없이.   들어간다. 누가? 내가. 어디를? 너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단어는 나 혼자만의 동사가 될 수 없다. 그 자체에는 이미 너의 영역과 나의 존재, 그리고 그 둘의 만남과 교차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들어왔다. 이미 내가 너의 영역으로 들어 온 순간, 이제 나와 너는 '관계'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나를 들어가게 해줘. <렛미인>은 그 들어감. 그리고 그로 인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관계. 

 

<렛미인>에는 수많은 관계가 생겨나곡 해체됨의 반복과 생산이 표현된다. 그리고 작가는 뱀파이어와 한 소년의 우정이라는 큰 줄거리를 그려나감과 동시에 그 크고작은 관계들 역시도 소홀하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관계들은 크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의 관계로 이루어지며 작가는 그 세가지 이야기를 주된 이야기 속에서 적절히 버무려 놓고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톰미의 이야기는 '가족'의 관계를 대변한다. 3년전 죽은 아빠,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사랑을 찾은 엄마 이본. 그 엄마의 새로운 사랑 스타판과 이본의 아들 톰미. 스타판은 이본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 그녀의 아들 톰미의 영역속으로 들어가기를 갈구한다. 나를 들여보내줘. 그러나 톰미는 스타판에게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톰미는 지하실 속 그와 친구들의 공간속에 침전한다. 그리고 톰미와 스타판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그 순간 괴물이 들이닥친다. 그 괴물은 허락도 없이 톰미의 아지트로 들어왔다.

톰미의 이야기가 가족의 이야기를 대변한다면, 라케의 패거리들은 친구들 간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요케의 죽음 앞에서 라케는 자신의 반쪽을 잃은 양 괴로워한다. 그들은 비록 겉보기엔 죽지 못해 사는 잉여인간처럼 보일지라도 그들 간의 의리는 어느 누구 부럽지 않다. 그들간의 이야기는 파국을 맞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는 엘리가, 뱀파이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등장한다. 요케의 죽음은 분명 뱀파이어의 짓이다. 그러나 그건 천재지변에 가깝다. 마치 지나가다가 벼락에 맞아 죽은 것만 같은. 우리는 아무도 지나가다 친 벼락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그 사람의 죽음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누구에게 잘못을 물을 수 없는 그런 죽음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안타깝게도 그들의 친한 친구를 잃었지만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이야기 내내 방관자적 입장을 고수한다.

뱀파이어로 인해 위기에 처하는 건 톰미뿐이 아니다. 비르기니아. 이제 폐경기에 접어들어 더이상 여자로서의 삶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 라케가 그녀의 품에 들어간다. 물론 그 전에도 둘은 오고가는 사이였지만, 라케는 그 무렵 확실하게 자신이 비르기니아의 품에 들어갔음을 자각한다. 사랑. 서로가 서로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 그런데 그 관계가 요케의 죽음으로 인해, 그리고 그 둘의 과거의 경험을 통해 위태위태하다. 그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관계가 팽팽하게 진행되던 중 결국 비르기니아의 사랑은 라케의 폭언으로 인해 종말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역시 그 순간 엘리가 나타났고 그 둘의 관계는 새롭고 폭발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작가는 쉽고도 어려운, 아니 상당히 어렵지만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가장 보편적인 세가지 유형의 관계를 이야기와 함께 꾸준히 밀어붙인다. 결국 <렛미인>은 뱀파이어와 소년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반복되는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의 관계가 파국을 맞을 무렵 그들은 항상 괴물의 존재를 맞닥뜨렸다. 톰미의 지하실에 괴물이 나타나고, 비르기니아에게 엘리가 떨어져내린다. 물론 라케 패거리에게도 요케의 죽음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약간 의미가 다르다. 천재지변은 관계의 파국과 상관이 없다. 괴물은 항상 그 관계가 파국을 맞을 때 그들에게 찾아들어왔다. 결국 괴물은 외부의 존재이지만, 내 안의 모습이 투영된, 우리의 관계가 투사된 존재이다.

 

 

너는 나야.

 

오스카르가 엘리를 처음 본 그 순간. 오스카르는 칼날에 비친 엘리를 보았다. 오스카르가 받은 상처와 모욕이 그의 안에서 환상이 되고 공격성으로 변해갈 무렵 엘리는 오스카르의 앞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위에 나온 비르기니아, 톰미의 앞에 나타난 괴물과 엘리 그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오스카르 역시 그 자신이 스스로 너무도 힘에 겨워할때, 그리고 그것을 못 이기고 어떤 짓을 저지를지도 모를 그 상태에서 엘리가 나타난다. 그렇지만 엘리는 그냥 나타나기만 했다. 톰미와 비르기니아 앞에 나타난 그것과 달리 그저 나타나기만 했다. 칼날에 비친모습으로. 칼날에 비친 모습은 곧 오스카르 자신은 아니었을까? 오스카르는 날카롭고 서슬퍼런 칼날에서 엘리를, 흉폭한 자신을 발견한다. 친구가 없는 존재.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존재. 그러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은 존재. 그것을 환상속에서, 그리고 실제로, 공격성으로 발휘하고 싶은 존재와 발휘되는 존재의 만남은 엘리가 "너는 나야"라고 말하듯 서로 동일한 존재의 만남이다. 그래서 오스카르는 아무 스스럼 없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던 엘리의 마음으로 오스카르가 너무도 쉽게 들어왔다. 엘리가 오스카르와 키스하는 순간 오스카르가 엘리가 되는 것과 같이 오스카르가 엘리의 뺨에 손을 가져간 순간 엘리 역시 오스카르가 되었다. 그 둘은 그렇게 만나고 서로가 같은 존재임을 느꼈다. 서로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엘리가 오스카르의 곁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떠나간 이후에도 오스카르가 수영장에서 위험에 빠지자 엘리는 결국 나타났다. 엘리는 호칸을 찾기 위해서는 병원을 샅샅이 뒤질 수 밖에 없었다. 엘리는 호칸을 직감적으로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같은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카르가 위험에 빠지자, 엘리는 결국 오스카르의 곁에 본능적으로 나타났다. 오스카르와 엘리는 결국 다른 모습의 서로이기에. 

 

 

 

오스카르.호칸.다른 결말.  

 

오스카르가 많은 가방을 가지고 떠나는 모습에서 어쩌면 우리는 호칸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엘리는 여전히 나이를 먹지 않고 오스카르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스카르 역시 호칸과 같은 삶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둘이 떠나는 밝은 모습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 멀지 않는 미래에 닥칠 그런 슬픔을 함께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오스카르와 호칸은 다르다. 소아성애자이자 동성애자로 의심되기도 하는 호칸. 그 역시 엘리를 사랑했다. 엘리와 함께 살기도 하며, 아주 가끔 엘리의 애무를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엘리는 호칸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둘은 필요에 의한 관계다. 물론 사랑 역시 필요에 의한 관계다. 필요에 의한 관계라는 말에 너무 가혹한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랑하고 친구의 관계를 맺어간다. 그 안에서 생기는 정과 관계없이, 일단 모든 인위적인-가족과 같은 천륜이 아닌- 관계는 자기 만족이라는 필요에 의해서 생성되는 관계다. 엘리는 보다 편하게 생존하기 위해 호칸을 선택했고 호칸 역시 자신의 일반적이지 않은 성욕에 의해 엘리를 선택했다. 엘리와 호칸이 필요에 의한 관계, 인위적인 관계라면 오스카르와 엘리는 보다 어쩔 수 없는 관계다. 둘의 관계는 필요나 선택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아니다. 어쩌면 그 둘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필요에 의한 관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필요성'은 앞의 관계에 비해 훨씬 강렬하다. 그 둘은 서로 같은 존재다. 서로가 서로인 존재에서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서로를 보듬어주어야 한다. 전자가 보다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한 관계라면-엘리의 입장에서- 오스카르와 엘리의 관계는 보다 편리하기 위해 맺은 관계가 아닌, 살아가기 위한, 아니면 천륜과도 같은 어쩔 수 없는 관계를 맺어나간다. 어쩌면.. 오스카르 역시 호칸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갈수도 있다. 그리고 엘리는 다시 새로운 호칸,오스카르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엘리는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만났다. 어쩔 수 없이 열두살에 뱀파이어가 되었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존재 하나 없이 200년을 살아온 그에게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존재가 생겨난 엘리. 오스카르가 늙고 병들어 생을 마감할 때 어쩌면 엘리 역시 자신의 삶을 마감할 것만 같은. 엘리의 이번 여행이 그의 마지막 '삶'이 될 것 같은 예감. 이 예감은 비르기니아와 엘리의 차이를 보면 조금 더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비르기니아. 엘리. 다른 결말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었음을 자각한 비르기니아. 자신이 사랑하는 라케의 품안에서 스스로 불멸을 버리고 죽음을 택한 비르기니아. 역시나 어쩔 수 없이 뱀파이어가 되고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엘리.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무엇이 비르기니아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고 엘리를 200년의 시간동안 방치하게 두었을까.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 사랑을 경험해본 비르기니아. 자신의 딸, 자신의 손자를 낳고 사랑하는 비르기니아. 폐경기에 접어들어 이제 더이상 여성의 자존감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온 라케.  비르기니아는 이미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기에는 인생을, 사랑을 너무도 많이 알아버렸다. 그녀에게는 이미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에게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혹여나 자신으로 인해 그들이 조그마한 상처라도 받기보다는,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자신을 지키는 방법임을 그녀의 지나온 삶 속에서 체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는 달랐다. 틀린 것이 아니다. 엘리는 그러한 것을 알기 이전에, 너무도 어린 나이에 뱀파이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엘리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다.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엘리에게 죽음이란 너무도 무서운 존재였다. 엘리는 아직 죽음보다 더욱 소중한 무엇이 있기엔 너무도 어리고 미숙한 존재였다. 

그것이 엘리가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엘리에게 자신과 같은 오스카르가 나타났다. 소중한.  자신과도 같은 존재.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아마도 엘리 역시 오스카르와 함께 뱀파이어로서의 '살아남기'가 아닌 인간다운 '삶'을 살다보면, 그리고 오스카르가 더이상 함께 해줄 수 없을 때가 된다면, 아니 오스카르에게 더이상 자신의 추악한 모습-뱀파이어의 삶이 추악하다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을 때 자연스레 생기는 자의식과 자각-을 보여주기 싫다는 생각이 들때면 엘리는 스스로 그의 삶을 마감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스카르와 엘리의 결말은 어쩌면, 아마도, 엘리와 호칸의 관계와 같은 결말은 나지 않을 것만 같다. 단지 내 희망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사랑과 삶에 그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이렇게 오스카르는 엘리의 영역에 들어가고 자리를 잡았다. 엘리 역시 오스카르에게 들어갔다. 엘리. 들어갈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존재. 엘리에게는 성(姓)이 없다. 엘리의 이러한 모습은 엘리 스스로의, 들어갈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재 모습을 상징한다. 엘리는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살아남았다. 그런 엘리에게 이제 오스카르가 생겼다. 처음으로 들어옴을 허락한 존재. 또한 엘리 스스로 들어감을 선택한 최초의 존재. 엘리는 이제 최소한 오스카르의 앞에서 만큼은 그의 영역에 들어감에 있어서는 허락을 받지 않아도, 피를 흘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어디든 엘리는 들어갈 수 없다. 만약 허락을 받지 못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경우에 엘리는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갈 수 밖에 없다.

"너는 나야." 우리,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러나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 역시 어딘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 특히 그 곳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이라면 더 더욱.

그래서 <렛미인>은 뱀파이어와 소년의 사랑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다. 가족과 친구, 연인의 이야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고 상처받으며 허락받지 않고, 허락받지 못하고 함부로 들어와 심장속에 뱀파이어의 세포덩어리를 전염시키는 것과 같이. 허락받지 않고는 서로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내가 허락을 구하고 네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나는 여기서 피를 흘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그 이야기가 내게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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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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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책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표지는 그 책의 첫인상이다.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란 예고편과 같은 것이 책의 제목과 표지이다. 표지에 담겨있는 모든 것이 그렇다. 제목과 부제 그리고 원제까지. 그 제목들이 쓰여진 글씨체와 굵기의 정도. 책 표지의 전반적인 색감. 무채색계열인지 원색계열인지 파스톤의 계열인지. 표지에 단순히 제목만 나열되어 있는 단조로운 표지인지 저자의 사진이나 작품의 내용을 암시하는 사진이나 그림을 담고 있는지. 우리가 표지를 볼 때는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조망하고 이 책이 어떤 느낌의 책일 것인지를 얼추 가늠하게 된다. 그래서 난 책의 표지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중의 한명이다. 책의 표지는 이 책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출판사가 이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오히려 하나도 담지 않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도 담아내지 않을 수는 없다. 오히려 책의 제목만 반듯이 적혀있는 무채색의 표지는 그 아무것도 없음을 통해 이 책은 만만치 않다는 기대감을 한껏 부풀어오르게 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표지는 내가 책의 첫장과 인사하기 전에 책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아니 책의 첫 장을 읽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넘어가는 페이지 속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표지의 잔상은 내가 과연 이 책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얼마간의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표지는 더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난 <통조림공장 골목>의 표지가 매우 맘에 들지 않는다. 미리 말하자면 내가 이 책에 대해 내린 평점은 네개 반이다. 그 아쉬운 반쪽짜리 별이 바로 표지에 대한 내 아쉬움의 발로임을 미리 밝힌다.

 

통조림공장 골목은 <에덴의 동쪽>과 <분노의 포도>로 너무나도 유명한 존 스타인벡의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대하소설의 작가로 알고 있는 그가, 아주 가볍게 쉬어가는 느낌으로 유쾌한 마음과 인간에 대한 따듯한 애정을 담아 지은 책일 것이라는 인상이 내가 이 책의 표지를 보고 받은 첫인상이다. 도시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파스텔 속의 마을에서 자신들을 봐달라며 서성이는 그 모습속에 나는 그렇게 이 책의 선입견을 정해버렸다. 하지만 그 선입견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한 것은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긴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였다. 

 

<통조림공장 골목>은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에 위치한 통조림 공장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네 하루하루의 삶이란 어찌보면 특별할 것 없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가끔 삐쭉 튀어나오는 시트콤과 같은 상황은 그 평범함으로 가득찬 캐릭터들의 오묘한 결합으로 폭발하는 것과 같이, 이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캐릭터들과 에피소드들의 독특한 색채 역시 일상의 소박한 평범함 속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리청의 식료품점에서 시작하는 첫장부터 그 빛은 자그마하지만 찬연하고 확고하게 이 책의 시작을 알린다.

어느 마을에나 하나씩 있던 슈퍼마켓과 어릴 적 누구라도 한번쯤 해보았을 외상. 그리고 그 외상을 체계적으로 빌리는 집안과 그 체계적인 외상을 역시나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외상이 많으면 더 이상 외상을 주지 않고 빚을 청산하면 다시 외상을 주는  아주 평범한 가게 주인. 어찌보면, 아니 어찌볼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이 모습은 아이들에게 스피어민트껌하나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부정(父情)이라는 촉매제 하나로 자살이라는 폭발에 이른다. 이렇듯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아주 가끔 번쩍 튀기는 불꽃을 정확히 포착한다. 삶이란 모두 그런것이란 것을 꿰뚫어본 사람만의 유쾌할 수 많은 없는 관찰이다. 결국 나는 불과 첫장의 몇페이지만을 넘기자마자 깨달았다. 작품을 표지가 망가뜨려놓았다는 것을.    

 

<통조림 공장 골목>은 흔히 이런 소시민적 일상을 다룬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큰 줄기 하나에 수많은 자그마한 가지가 뻗어있는 작품이다. 즉 이 작품의 큰 줄기는 우리가 흔히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착한 양아치 집단인 맥 패거리와 동네에서 해양연구소를 운영하며 동네사람들에게 알게모르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며 살아가고 있는 닥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런 작품의 관건은 이 큰 줄기속에 얼마나 많은 소소한 사건들을 잘 녹아내었는가이며 그러한 와중에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큰 줄기보다는 그 곳에서 뻗어나오는 자그마한 가지들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만드는가, 그리고 그 가지끝에 얼마만한 결실, 사람을 맺어놓을 것인가가 작품의 몰입여부를 결정짓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완벽하게 그 결실을 맺고 있으며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있다.

결국 맥과 닥 간의 보이지 않는 실타래의 엉킴이 큰 줄기의 흐름이라면 그 안에 수많은 실들이 연결되어있다. 그것은 리청의 가게에도 연결이 되어있으며 도라의 가게에도 연결이 되어있다. 그렇다고 도라와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도라네 집을 보호하는 경비원 엘피와 그 전의 경비원 윌리엄까지도 그 실은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큰 줄기상에서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닥을 좋아하는 프랭키마저도 당당히 하나의 챕터를 차지하고 있으며 맥패거리로 묶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헤이즐과 에디, 휴이와 존스 그리고 달링까지 모두들 당당히 페이지의 구석구석을 활보한다.

 

이 작품의 또 한가지, 내가 더욱 사랑하는 매력은 점과 선으로 연결된 구조와 그속에서 튀어나오는 단편들이다. 작품은 수십개의 챕터동안 맥 패거리가 닥에게 파티를 해주기 위한 계획과 실행을 쭉 진행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가끔씩 이 흐름이 끊기는 챕터가 이따금 튀어나온다. 마치 삶이란 이런 뜬금없음이란 것과 같이. 그리고 역시 이러한 예정에 없는 사건들이 주는 재미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착실함과는 또다른 재미들이 이 뜬금없는 단편들에서 마구 발산된다. 또한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이런 급작스런 사건들이 주는 어두운 당혹감과 같이 이 각각의 단편들은 삶에 대한 존 스타인벡의 다소 침중한 시선을 담아내어 당혹스럽게 만들며, 그 당혹함 가득한 하나하나의 단편들이 너무나 깊은 여운을 남겨놓고 큰 줄기를 타고 흐르는 유쾌한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이 모든 것이 삶이란 듯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단편들은 모두 그 짧은 분량만큼이나 운명적인 찰나의 순간이나 짧게 맞닥뜨릴수 있는 위트를 그려내는데 그 처음과 끝의 단편이 특히 인상깊다. 도라네 가게의 전 경비원 윌리엄. 그는 이상하게도 통조림공장골목에서도 소외받는 사람이다. 밖에서 보기엔 모두들 다 한통속이고 같은 무리일것만 같은 그저그런 사람들 속에서도, 이상하게 맥패거리마저도 윌리엄을 무시하고 멀리한다. 도라네가게의 여자들에게는 동질감을 느끼는 맥이 오히려 그녀들의 가게의 경비원은 멸시하는 모습은 조금 애매모호하고 많이 기괴하다. 결국 윌리엄은 홧김에, 그저 홧김에 죽어버릴거라는 말을 던진다. 그리고 그 말은 이제 그를 옥죄는 부메랑으로 다가온다. 그저 농담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의 농담한마디와 눈빛 잠깐으로 이미 생과 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고 마는 이것. 삶이란 그저 이런 어리석은 것들이라는 듯이 작가는 무심한 시선을 던진다.

이런 작가의 무심한듯 날카로운 시선은 마지막 뒤쥐의 에피소드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선 무심함보다는 삶에 대한 날카로운 고뇌가 조금 더 빛난다. 큼지막한 뒤쥐 한마리가 공토의 아욱덤불속에 터를 잡는다. 완벽하다. 아욱과 치즈 등 먹을거리는 풍부하다못해 넘치며 땅역시 흙을 파내 구멍을 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뒤쥐로서는 완벽한 생활공간이었다. 단 한가지만 빼놓고서는. 뒤쥐는 혼자였다. 아무리 먹을것을 쌓아놓고 기다려도 다른 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쥐들은 모두 덫이 놓은 달리아정원에서 살았다. 아무리 이곳이 좋아도, 혼자 아무리 찍찍거려도 다른 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뒤쥐는 그 모든 완벽함을 포기한채 사방에 덫이 놓인 달리아정원으로 이사를 갔다.

 

결국 삶이란 이런 것이다. 삶이란 늘 뜻한바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죽고 싶지 않다고 느낀 순간 스스로 죽어야 하고, 누군가를 위한 선행은 결국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아무리 완벽한 조건을 갖추어놓더라도 결국 그 완벽함은 스스로 파기되고 권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끌벅적함 속으로 홀로 찾아들어가야 하는 곳. 항상 어떤 계획이든 그것은 계획으로만 완벽한 곳. 언제 어디서 어떤 글이,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그것은 이 소설과 깊이 닮아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결말대로(작은 가지이든 큰 줄기이든) 언제나 그것은 사람들로 연결된다는 것. 어찌되었든, 좋은 결말이든 나쁜 결말이든 그것은 결국 사람들을 향해 가야 한다는 것. 어디로 흘러 들어갈 지 모르는 개구리들처럼 어디로 가서 끝을 맺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결국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끝이 난다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결국 이 소설은 구조에서도 담고 있는 내용에서도 온전히 삶을 담아내고 있다. 이 소설 자체가 삶과 같다는 듯이 그는 이 소설의 모든 것에서 삶을 표현하고 있다. 그 안에는 예측가능함과 예측불가능함, 평범함과 독특함, 일상속의 폭발력과 연민과 고뇌, 희망과 회한이 모두 다 혼재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릴것이란 없다. 내가 작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가해함마저도.

 

작가는 결국 대화합과 같은 파티를 통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모두가 모두가 만족한 그 파티와 함께 일단 우리가 살짝 엿본 캐너리 로의 아주 잠깐의 시간은 지나갔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맥패거리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닥의 연구소를 세네번쯤은 작살낼 것이고, 리청의 가게에는 많은 외상목록이 쌓이고 지워질 것이다. 도라네 가게는 아주 잠시동안, 어쩌면 꽤 오래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고 보일러관의 부부와 손님들은 기어코 막힌 창문에 커튼을 달 것이다. 그냥 그럴 것이다. 별다른 이유나 목적 없이. 삶이란 그냥 그런것 전부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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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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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사회조직, 이미 너무도 견고하여 그 안으로 0.1mm의 틈도 허용할 것 같지 않은 규칙화된 삶으로 매몰된 사회. 인간의 자유의지와 일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도식화되고 형식화된 절차의 정의 속에서 허울만 가득찬 사회. 이미 인간성이라는 것은 침전된지 오래인 사회와 그 곳의 충실한 하수인인 중간 관리자,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 맞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새롭게 꽃피우려고 노력하는 한 개인의 사투는 이미 많은 작품들에서 다루어 온 약간 식상한 주제라 할 수 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역시 초반의 시작은 그와 같다. 이미 사회에서 부적응자, 비정상 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모여있는 정신병원에 힘든 노동을 피하기 위해 가짜 환자인 맥머피가 입원한다. 그는 이미 기력을 잃고 오로지 수간호사와 세명의 보조원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점점 피폐해져가는 환자들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미 무기력의 늪에 빠진채 천천히 자신들의 정신적 죽음을 관조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그는 다시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삶의 낙, 희망, 작은 일탈에서 오는 기쁨,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립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효율과 안전, 사회적 적응이라는 가치로 무장하고 천편일률적인 기계화된 삶을 강조하는 수간호사와 사사건건 부딪히며 그 여러가지 사고속에서 수간호사와 콤바인으로 명명된 정신병원, 거대사회의 시스템속에서 희생되어가고 있는 환자들에게 자그마한 불꽃을 하나씩 틔우기 시작하며 결국 환자들의 의지로 그동안 당연시되어왔던 수간호사의 명령을 불복종하게 만들기까지 성공한다.

 

아마도 여기까지의 내용만으로는 처음에 얘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금 식상하다. 물론 어차피 이 세상의 문학작품이 모두 고유한 주제와 내용을 다룰수는 없는 일이고 그 문제를 어떤 형식과 어떤 눈, 어떤 구성과 필력으로 표현해내는가가 명작과 졸작을 나누는 기준이기는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비록 진부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새로운 공간인 정신병원이라는 배경을 이용한 점, 즉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정신병 환자 = 사회부적응자이자 격리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 이라는 인식, 병원이란 새로운 삶을 만드는 곳이라는 생산적, 발전적 이미지를 비틀어낸다는 점에서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문학성을 느낄 수 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고전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정도로 그친다면 이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브롬든은 말한다. 맥머피가 저렇게 된 것은 우리 탓이라고. 우리가 맥을 나서게 했다고. 그 말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

 

이 작품을 선과 악의 구도, 이미 시스템으로 무장한 거대 사회와 그 안에서 소외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개인의 노력과 작은 희망으로 마무리짔는 것은 이 작품을 다 파악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선과 악의 구도로 보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콤바인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콤바인에 의한 온전한 피해자인가? 그리고 그들은 이 콤바인에 끌려온 사람들인가. 만성환자를 제외한 극의 전반을 이루는 대부분의 급성환자들, 맥머피와 함께 행동하던 환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퇴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맥머피와 같은 위탁환자가 아니었다. 수간호사가 퇴원처리를 해주어야만 나갈 수 있는 환자가 아닌, 그 속에서 언제든지 뛰쳐나갈수 있는 환자 아닌 환자들이다. 그런 자발적인 환자군, 어찌보면 콤바인에 중독되어 그것의 억압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퇴원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맥을 은근히 부추기고 결국 자신들에게 그 해가 미칠것 같으면 한발 빼는 모습은 우리가 얼핏 작품의 시작과 함께 그려놓은 선과 악의 구도를 흐트려놓는다.  환자들은 단순히 악에 의해 피해만을 보고 있는, 억압되어 생기를 잃어버린 퇴색된 선(善)이 아니다. 맥머피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병원의 잘못된 일율적인 행정에 저항하는 모습과 달리 자유의지라는 명목으로 난동을 피우는 모습은 단순히 인간 본성의 회복이 아닌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을 어느정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것도 선이 아니고 악이 아니다. 이 모습들은 결국 절정으로 치닫는 마지막 밤에서 그 모든 것을 꺼내놓는다. 병원의 환자들은 그간의 억압으로 응축된 기운을 술김이든 약김이든, 그간 있었던 맥머피의 노력 덕분이든 모두 다 표출하고 발산한다. 그리고 역시나 그들 특유의 무책임함으로, 말만을 앞세운 계획을 통해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물론 변명할 수도 있다. 우리는 맥머피를 구하려 했다고. 우리도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고. 그러나 글쎄.. 나는 그들의 변명을 믿지 못하겠다. 그들은 그저 될대로 되라지, 이 모든 것은 맥머피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결국 그들은 희생양 하나와 군중의 힘, 집단의 익명성에 파묻혀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나고 맥머피는 식물인간이 되고 자의적인 환자들은 그간의 유희를 끝내고 다시 소시민의 삶으로 돌아간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다시 콤바인은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콤바인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은 수간호사의 노력만이 아니었다. 그 콤바인의 톱니바퀴 하나하나가 스스로 끼워맞쳐졌다. 그들은 가끔 그들에게 기름칠을 해줄, 아주 잠깐의 틈새를 벌려놓아 약간의 숨통을 틔워줄 일탈의 유희만 기대할 뿐이다. 어느덧 그 유희가 그 톱니바퀴의 작동을 방해할 정도가 되면 그들은 알아서 다시 콤바인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알아서 노력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 자체가 콤바인의 세뇌일수도 있다. 톱니바퀴가 무슨 죄인가. 그들은 이미 그렇게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어찌되었든 희망은 없다. 맥머피가 환자들 하나하나에 틔우려했던 희망은, 그 희망이 모이고 모여 콤바인을 바꾸어보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나의 개인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맥머피는 톱니바퀴들의 유희 속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산화시켜버렸다. 소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의 일탈이면 족하다는 듯이. 그 이상의 것이 시도되려는 순간, 자신이 책임질 것이 생기는 순간 그들은 다시 그들 본연의 모습, 선도 악도 아닌 그저 영악한 그들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희망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브롬든. 맥머피로 인해 결국 깨어난 것은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개인의 노력으로 민중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민중들은 깨어날 수 있다는 밝은 미래, 군중의 힘이 아니다. 결국 맥머피에 의해 깨어난 것은 또 다른 개인의 자각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사회를 변화시킬수는 없을지라도, 하나의 다른 인간은 깨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른 인간으로 인해서 또 한명의 희망과 본성이 깨어날 수 있다는 것. 작가는 그것이면 족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는 결국 뻐꾸기 둥지를 바꿀수는 없지만 그 중 하나의 알은 품을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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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아이 펭귄클래식 21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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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도 언뜻 느껴지기는 했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은 우리가 언뜻 생각하는 유미주의자의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게 매섭기 그지없다. 그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리는 내내 19세기 후반의 유럽사회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날카롭게 해부했다. 그리고 그 번뜩이는 기지는 단편집 <별에서 온 아이>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별에서 온 아이>는 너무도 유명한 단편 '행복한 왕자'를 더불어서 그가 낸 두 권의 단편집[행복한 왕자]와 [석류나무 집]을 묶은 작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권의 단편집을 동화, 혹은 어른을 위한 동화로 분류한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 동화란 무엇일까? 동화란 작품에서 교훈이나 무궁한 상상력을 안겨주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 속에서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를 뜻함이 보통의 시선이다. 그리고 어른을 위한 동화라면 조금 더 작품의 구조와 구성이 조금 더 어른들의 소설에 맞게끔 변형된 것을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보통 이야기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그의 두 작품집이 어른을 위한 동화로 묶이는데 반대할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그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은 그의 가슴과 달리 그의 눈과 머리는 서늘하기만 하다. 이 두가지의 조화가 <별에서 온 아이>를 만들어 낸다. <별에서 온 아이>에서 동화라고 할 만한 착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아홉편의 이야기 중 정말 동화라는 범주에 넣을 만한 것은 단 두편, '행복한 왕자' 와 '자기만 아는 거인'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행복한 왕자에 속한 5편의 이야기와 석류나무 집에 속한 4편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방향이 너무도 갈리는데 행복한 왕자의 5권이 그나마 보다 교훈적이라면 뒤의 4편의 이야기는 그런 교훈들이 모두 허황되다는 인식하에서 쓰여진 것만 같은 의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전(前)5편의 이야기보다는 뒤의 4편의 이야기가 조금 더 매력적이고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앞의 5편의 이야기는 오스카 와일드의 매력이 그다지 많이 풍기지 않는다. '행복한 왕자'와 '자기만 아는 거인'은 전형적인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헌신적인 친구'와 '비범한 로켓 불꽃'은 풍자를 통해서 역시나 교훈적인 이야기로 방향을 이끌어 간다. 그나마 '나이팅게일과 장미꽃'만이 오스카 와일드 답다는 느낌을 가지게 할만한 매력을 풍기는데 사랑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교묘한 현실의 풍자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동시에 잡아가는 그의 능력이 한껏 발산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지금까지는 워밍업이었다는 듯이 뒤의 4편의 이야기에서 찬연하게 펼쳐진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작품이자 백미는 '어부와 그의 영혼' 그리고 '별에서 온 아이' 이다. '어부와 그의 영혼'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도 경직되었던 사랑에 대한 관념, 정신적인 사랑이 육체적인 사랑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이며 그 안에서 함께 하는 영혼과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통념을 과감히 깨부순다. 또한 그 과정에서 튀어져나온 정신과 영혼, 육체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서유럽을 지배하던 마르크스의 총화인 유물론까지 그 경계를 넘나들며 전방위적인 주제의식을 다룬다.

그리고 이 작품의 모든 것을 한번에 뒤엎어버리는 재미있는 작품이 뒤이어 나오는데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별에서 온 아이' 이다. '별에서 온 아이'의 초 중반은 흥미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석류나무집의 4편의 이야기중 가장 무난한 진행속에서 너무도 예상 가능한 결말로 흘러간다. 우리가 모두들 짐작할만한,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만 같은 이야기의 착한 진행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진행되며 별에서 온 아이는 모든 착한 이들의 바람대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여기서 이 책의 모든 것을 한번에 뒤엎는 마지막 한 줄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이 곳에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가 바라본 세상이 모두 함의되어 있다. 그는 세상을 전혀 아름답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별에서 온 '그 아이' 역시 지구에 와서 느꼈던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이야기가 그 한줄 전에서 끝났다면 이 책은 정말로 어른을 위한 동화 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 방점을 찍는 그 한 줄로 그는 이 책은 동화라는 인식을 모두 날려버리고 독자에서 엄청난, 그리고 과연 그 답다는, 그리고 그 한줄로 완성되는 작품을 남겼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 한줄을 위해 그 기나긴 작품들을 쭉 이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편찬연도가 그리 차이나지 않는 순차적인 작품인 두권의 단편집을 통해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별에서 온 아이는 별에서 지구에 와서 무엇을 보았을까? 오스카 와일드가 그 아이를 대신하여 남긴 이야기. 그 결말이 별에서 온 '아이'가 본 세상의 모습이고 지금도 변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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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문장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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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집의 첫 장을 넘낄때의 느낌은 사뭇 오묘하다. 이번에도 역시 실망할거란 야릇한 안도감과 그래도 이번에는 무언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좌절할 기대감의 혼합은 늘상 오묘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행히도 야릇한 안도감보다는 좌절할지 모르는 기대감에 조금 더 가까운 작품집을 하나 만난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애현 작가의 첫 작품집 <오후의 문장>은 그간 신춘문예에서 수상한 작품과 자신이 힘들게 낳은 몇개의 작품들을 모은 단편소설집이다. 모두 9개의 소설로 이루어진 <오후의 문장>은 각각의 작품 속에서 묘하게 정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며 흡사 하나의 작품에서 봄직한 분위기의 일관성을 이룬다. 그 일관성은 각각 작품의 주인공들이 가지는 분위기와 전혀 특이할 것 같지 않은 사건들의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백야>는 몸에서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눈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내세울것이라는 자신의 특이체질밖에 없는 전형적인 아니 전형적이지 않은 은둔과 고독이 생활화된 젊은이다. 그리고 그를 단숨에 알아본 '눈사람'을 만들어낸 그녀. 어둠이 익숙하고 밝은 빛에서 살수 없는 그녀는 '눈사람'의 은은한 광채속에서 그녀의 닫혔던 미간을 서서히 풀어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만남으로써 결핍을 채우고 희미한 밝음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그 밝음의 세계 뒤로 펼쳐지는 8편의 단편들은 모두 그 앞의 결핍에 대한 이야기를 하듯 그리고 그것들을 백야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그녀의 노력으로 채워진다. 그렇다고 그 밝음은 무한정 밝아지는 여명을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그녀가 말하는, 짜내는 노력은 결국 희미한 채로 결말을 맞는다. <빠삐루파>와 <오후의 문장>, <실러캔스>와 같은 작품들을 읽어내고 있노라면 우리가 여실히 느끼는 어둠속에서 딱 한웅큼만의 빛으로 그 어둠을 다 채우려는 듯한 결말 속에서 이것이 그녀의 희망인지, 희망을 빙자한 삶의 소용돌이와 반복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녀의 희망은 딱 그만큼이다.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카리스마스탭>역시 그와 닮았다. 인간이 인간을 상실하고 비(非)인간의 매력으로 성큼 다가서고 그를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든걸 잃어버리고 있는 바비와 그녀를 그 끝자락에서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시 인간을 찾아주려는 혜주의 마지막 안간힘은 그래서 이 작품집의 마지막에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본적으로 김애현 작가의 시선은 무심한 듯 따듯하다. 그 따듯한 시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나'들을 찾아내고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척, 누구나 그러는 듯, 덤덤히 살아가는 아무도 모르고 신경쓰지 않는 삶의 열꽃어린 시점을 세세히 노래하는 모습이 간만에 반갑다.
  


얼마전 한 책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박완서씨의 문학상 수상 작품집 <환각의 나비>를 읽었다. 그동안 얼핏 얼핏 접했던 박완서 작가의 문학을 온전히 처음 접한 나는 그분이 왜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불리웠는지를 새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뒤늦은 나이에 문단에 입문한 박완서 작가. 그녀의 작품은 그 작가의 원숙함에 걸맞게 이미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자욱한 떨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박완서 작가가 젊은 날, 인생의 단맛, 쓴맛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그 어느날 작품을 썼다면, 그 작품들은 어떤 색채와 떨림을 가지고 있을까. 이 작품의 책을 덮는 순간 왠지 모르게 다시 한번 그 생각이 다시금 내 머리에 맴돌았다. 물론 김애현 작가가 박완서 작가와 견줄만 하다던가, 글을 쓰는 스타일과 풍김새가 비슷하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그 의문이 다시 한번 생각났다는 그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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