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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거대한 사회조직, 이미 너무도 견고하여 그 안으로 0.1mm의 틈도 허용할 것 같지 않은 규칙화된 삶으로 매몰된 사회. 인간의 자유의지와 일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도식화되고 형식화된 절차의 정의 속에서 허울만 가득찬 사회. 이미 인간성이라는 것은 침전된지 오래인 사회와 그 곳의 충실한 하수인인 중간 관리자,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 맞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새롭게 꽃피우려고 노력하는 한 개인의 사투는 이미 많은 작품들에서 다루어 온 약간 식상한 주제라 할 수 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역시 초반의 시작은 그와 같다. 이미 사회에서 부적응자, 비정상 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모여있는 정신병원에 힘든 노동을 피하기 위해 가짜 환자인 맥머피가 입원한다. 그는 이미 기력을 잃고 오로지 수간호사와 세명의 보조원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점점 피폐해져가는 환자들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미 무기력의 늪에 빠진채 천천히 자신들의 정신적 죽음을 관조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그는 다시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삶의 낙, 희망, 작은 일탈에서 오는 기쁨,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립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효율과 안전, 사회적 적응이라는 가치로 무장하고 천편일률적인 기계화된 삶을 강조하는 수간호사와 사사건건 부딪히며 그 여러가지 사고속에서 수간호사와 콤바인으로 명명된 정신병원, 거대사회의 시스템속에서 희생되어가고 있는 환자들에게 자그마한 불꽃을 하나씩 틔우기 시작하며 결국 환자들의 의지로 그동안 당연시되어왔던 수간호사의 명령을 불복종하게 만들기까지 성공한다.
아마도 여기까지의 내용만으로는 처음에 얘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금 식상하다. 물론 어차피 이 세상의 문학작품이 모두 고유한 주제와 내용을 다룰수는 없는 일이고 그 문제를 어떤 형식과 어떤 눈, 어떤 구성과 필력으로 표현해내는가가 명작과 졸작을 나누는 기준이기는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비록 진부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새로운 공간인 정신병원이라는 배경을 이용한 점, 즉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정신병 환자 = 사회부적응자이자 격리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 이라는 인식, 병원이란 새로운 삶을 만드는 곳이라는 생산적, 발전적 이미지를 비틀어낸다는 점에서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문학성을 느낄 수 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고전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정도로 그친다면 이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브롬든은 말한다. 맥머피가 저렇게 된 것은 우리 탓이라고. 우리가 맥을 나서게 했다고. 그 말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
이 작품을 선과 악의 구도, 이미 시스템으로 무장한 거대 사회와 그 안에서 소외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개인의 노력과 작은 희망으로 마무리짔는 것은 이 작품을 다 파악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선과 악의 구도로 보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콤바인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콤바인에 의한 온전한 피해자인가? 그리고 그들은 이 콤바인에 끌려온 사람들인가. 만성환자를 제외한 극의 전반을 이루는 대부분의 급성환자들, 맥머피와 함께 행동하던 환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퇴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맥머피와 같은 위탁환자가 아니었다. 수간호사가 퇴원처리를 해주어야만 나갈 수 있는 환자가 아닌, 그 속에서 언제든지 뛰쳐나갈수 있는 환자 아닌 환자들이다. 그런 자발적인 환자군, 어찌보면 콤바인에 중독되어 그것의 억압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퇴원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맥을 은근히 부추기고 결국 자신들에게 그 해가 미칠것 같으면 한발 빼는 모습은 우리가 얼핏 작품의 시작과 함께 그려놓은 선과 악의 구도를 흐트려놓는다. 환자들은 단순히 악에 의해 피해만을 보고 있는, 억압되어 생기를 잃어버린 퇴색된 선(善)이 아니다. 맥머피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병원의 잘못된 일율적인 행정에 저항하는 모습과 달리 자유의지라는 명목으로 난동을 피우는 모습은 단순히 인간 본성의 회복이 아닌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을 어느정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것도 선이 아니고 악이 아니다. 이 모습들은 결국 절정으로 치닫는 마지막 밤에서 그 모든 것을 꺼내놓는다. 병원의 환자들은 그간의 억압으로 응축된 기운을 술김이든 약김이든, 그간 있었던 맥머피의 노력 덕분이든 모두 다 표출하고 발산한다. 그리고 역시나 그들 특유의 무책임함으로, 말만을 앞세운 계획을 통해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물론 변명할 수도 있다. 우리는 맥머피를 구하려 했다고. 우리도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고. 그러나 글쎄.. 나는 그들의 변명을 믿지 못하겠다. 그들은 그저 될대로 되라지, 이 모든 것은 맥머피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결국 그들은 희생양 하나와 군중의 힘, 집단의 익명성에 파묻혀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나고 맥머피는 식물인간이 되고 자의적인 환자들은 그간의 유희를 끝내고 다시 소시민의 삶으로 돌아간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다시 콤바인은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콤바인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은 수간호사의 노력만이 아니었다. 그 콤바인의 톱니바퀴 하나하나가 스스로 끼워맞쳐졌다. 그들은 가끔 그들에게 기름칠을 해줄, 아주 잠깐의 틈새를 벌려놓아 약간의 숨통을 틔워줄 일탈의 유희만 기대할 뿐이다. 어느덧 그 유희가 그 톱니바퀴의 작동을 방해할 정도가 되면 그들은 알아서 다시 콤바인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알아서 노력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 자체가 콤바인의 세뇌일수도 있다. 톱니바퀴가 무슨 죄인가. 그들은 이미 그렇게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어찌되었든 희망은 없다. 맥머피가 환자들 하나하나에 틔우려했던 희망은, 그 희망이 모이고 모여 콤바인을 바꾸어보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나의 개인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맥머피는 톱니바퀴들의 유희 속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산화시켜버렸다. 소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의 일탈이면 족하다는 듯이. 그 이상의 것이 시도되려는 순간, 자신이 책임질 것이 생기는 순간 그들은 다시 그들 본연의 모습, 선도 악도 아닌 그저 영악한 그들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희망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브롬든. 맥머피로 인해 결국 깨어난 것은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개인의 노력으로 민중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민중들은 깨어날 수 있다는 밝은 미래, 군중의 힘이 아니다. 결국 맥머피에 의해 깨어난 것은 또 다른 개인의 자각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사회를 변화시킬수는 없을지라도, 하나의 다른 인간은 깨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른 인간으로 인해서 또 한명의 희망과 본성이 깨어날 수 있다는 것. 작가는 그것이면 족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는 결국 뻐꾸기 둥지를 바꿀수는 없지만 그 중 하나의 알은 품을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