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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표지는 책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표지는 그 책의 첫인상이다.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란 예고편과 같은 것이 책의 제목과 표지이다. 표지에 담겨있는 모든 것이 그렇다. 제목과 부제 그리고 원제까지. 그 제목들이 쓰여진 글씨체와 굵기의 정도. 책 표지의 전반적인 색감. 무채색계열인지 원색계열인지 파스톤의 계열인지. 표지에 단순히 제목만 나열되어 있는 단조로운 표지인지 저자의 사진이나 작품의 내용을 암시하는 사진이나 그림을 담고 있는지. 우리가 표지를 볼 때는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조망하고 이 책이 어떤 느낌의 책일 것인지를 얼추 가늠하게 된다. 그래서 난 책의 표지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중의 한명이다. 책의 표지는 이 책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출판사가 이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오히려 하나도 담지 않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도 담아내지 않을 수는 없다. 오히려 책의 제목만 반듯이 적혀있는 무채색의 표지는 그 아무것도 없음을 통해 이 책은 만만치 않다는 기대감을 한껏 부풀어오르게 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표지는 내가 책의 첫장과 인사하기 전에 책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아니 책의 첫 장을 읽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넘어가는 페이지 속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표지의 잔상은 내가 과연 이 책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얼마간의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표지는 더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난 <통조림공장 골목>의 표지가 매우 맘에 들지 않는다. 미리 말하자면 내가 이 책에 대해 내린 평점은 네개 반이다. 그 아쉬운 반쪽짜리 별이 바로 표지에 대한 내 아쉬움의 발로임을 미리 밝힌다.
통조림공장 골목은 <에덴의 동쪽>과 <분노의 포도>로 너무나도 유명한 존 스타인벡의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대하소설의 작가로 알고 있는 그가, 아주 가볍게 쉬어가는 느낌으로 유쾌한 마음과 인간에 대한 따듯한 애정을 담아 지은 책일 것이라는 인상이 내가 이 책의 표지를 보고 받은 첫인상이다. 도시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파스텔 속의 마을에서 자신들을 봐달라며 서성이는 그 모습속에 나는 그렇게 이 책의 선입견을 정해버렸다. 하지만 그 선입견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한 것은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긴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였다.
<통조림공장 골목>은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에 위치한 통조림 공장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네 하루하루의 삶이란 어찌보면 특별할 것 없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가끔 삐쭉 튀어나오는 시트콤과 같은 상황은 그 평범함으로 가득찬 캐릭터들의 오묘한 결합으로 폭발하는 것과 같이, 이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캐릭터들과 에피소드들의 독특한 색채 역시 일상의 소박한 평범함 속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리청의 식료품점에서 시작하는 첫장부터 그 빛은 자그마하지만 찬연하고 확고하게 이 책의 시작을 알린다.
어느 마을에나 하나씩 있던 슈퍼마켓과 어릴 적 누구라도 한번쯤 해보았을 외상. 그리고 그 외상을 체계적으로 빌리는 집안과 그 체계적인 외상을 역시나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외상이 많으면 더 이상 외상을 주지 않고 빚을 청산하면 다시 외상을 주는 아주 평범한 가게 주인. 어찌보면, 아니 어찌볼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이 모습은 아이들에게 스피어민트껌하나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부정(父情)이라는 촉매제 하나로 자살이라는 폭발에 이른다. 이렇듯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아주 가끔 번쩍 튀기는 불꽃을 정확히 포착한다. 삶이란 모두 그런것이란 것을 꿰뚫어본 사람만의 유쾌할 수 많은 없는 관찰이다. 결국 나는 불과 첫장의 몇페이지만을 넘기자마자 깨달았다. 작품을 표지가 망가뜨려놓았다는 것을.
<통조림 공장 골목>은 흔히 이런 소시민적 일상을 다룬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큰 줄기 하나에 수많은 자그마한 가지가 뻗어있는 작품이다. 즉 이 작품의 큰 줄기는 우리가 흔히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착한 양아치 집단인 맥 패거리와 동네에서 해양연구소를 운영하며 동네사람들에게 알게모르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며 살아가고 있는 닥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런 작품의 관건은 이 큰 줄기속에 얼마나 많은 소소한 사건들을 잘 녹아내었는가이며 그러한 와중에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큰 줄기보다는 그 곳에서 뻗어나오는 자그마한 가지들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만드는가, 그리고 그 가지끝에 얼마만한 결실, 사람을 맺어놓을 것인가가 작품의 몰입여부를 결정짓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완벽하게 그 결실을 맺고 있으며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있다.
결국 맥과 닥 간의 보이지 않는 실타래의 엉킴이 큰 줄기의 흐름이라면 그 안에 수많은 실들이 연결되어있다. 그것은 리청의 가게에도 연결이 되어있으며 도라의 가게에도 연결이 되어있다. 그렇다고 도라와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도라네 집을 보호하는 경비원 엘피와 그 전의 경비원 윌리엄까지도 그 실은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큰 줄기상에서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닥을 좋아하는 프랭키마저도 당당히 하나의 챕터를 차지하고 있으며 맥패거리로 묶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헤이즐과 에디, 휴이와 존스 그리고 달링까지 모두들 당당히 페이지의 구석구석을 활보한다.
이 작품의 또 한가지, 내가 더욱 사랑하는 매력은 점과 선으로 연결된 구조와 그속에서 튀어나오는 단편들이다. 작품은 수십개의 챕터동안 맥 패거리가 닥에게 파티를 해주기 위한 계획과 실행을 쭉 진행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가끔씩 이 흐름이 끊기는 챕터가 이따금 튀어나온다. 마치 삶이란 이런 뜬금없음이란 것과 같이. 그리고 역시 이러한 예정에 없는 사건들이 주는 재미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착실함과는 또다른 재미들이 이 뜬금없는 단편들에서 마구 발산된다. 또한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이런 급작스런 사건들이 주는 어두운 당혹감과 같이 이 각각의 단편들은 삶에 대한 존 스타인벡의 다소 침중한 시선을 담아내어 당혹스럽게 만들며, 그 당혹함 가득한 하나하나의 단편들이 너무나 깊은 여운을 남겨놓고 큰 줄기를 타고 흐르는 유쾌한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이 모든 것이 삶이란 듯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단편들은 모두 그 짧은 분량만큼이나 운명적인 찰나의 순간이나 짧게 맞닥뜨릴수 있는 위트를 그려내는데 그 처음과 끝의 단편이 특히 인상깊다. 도라네 가게의 전 경비원 윌리엄. 그는 이상하게도 통조림공장골목에서도 소외받는 사람이다. 밖에서 보기엔 모두들 다 한통속이고 같은 무리일것만 같은 그저그런 사람들 속에서도, 이상하게 맥패거리마저도 윌리엄을 무시하고 멀리한다. 도라네가게의 여자들에게는 동질감을 느끼는 맥이 오히려 그녀들의 가게의 경비원은 멸시하는 모습은 조금 애매모호하고 많이 기괴하다. 결국 윌리엄은 홧김에, 그저 홧김에 죽어버릴거라는 말을 던진다. 그리고 그 말은 이제 그를 옥죄는 부메랑으로 다가온다. 그저 농담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의 농담한마디와 눈빛 잠깐으로 이미 생과 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고 마는 이것. 삶이란 그저 이런 어리석은 것들이라는 듯이 작가는 무심한 시선을 던진다.
이런 작가의 무심한듯 날카로운 시선은 마지막 뒤쥐의 에피소드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선 무심함보다는 삶에 대한 날카로운 고뇌가 조금 더 빛난다. 큼지막한 뒤쥐 한마리가 공토의 아욱덤불속에 터를 잡는다. 완벽하다. 아욱과 치즈 등 먹을거리는 풍부하다못해 넘치며 땅역시 흙을 파내 구멍을 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뒤쥐로서는 완벽한 생활공간이었다. 단 한가지만 빼놓고서는. 뒤쥐는 혼자였다. 아무리 먹을것을 쌓아놓고 기다려도 다른 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쥐들은 모두 덫이 놓은 달리아정원에서 살았다. 아무리 이곳이 좋아도, 혼자 아무리 찍찍거려도 다른 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뒤쥐는 그 모든 완벽함을 포기한채 사방에 덫이 놓인 달리아정원으로 이사를 갔다.
결국 삶이란 이런 것이다. 삶이란 늘 뜻한바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죽고 싶지 않다고 느낀 순간 스스로 죽어야 하고, 누군가를 위한 선행은 결국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아무리 완벽한 조건을 갖추어놓더라도 결국 그 완벽함은 스스로 파기되고 권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끌벅적함 속으로 홀로 찾아들어가야 하는 곳. 항상 어떤 계획이든 그것은 계획으로만 완벽한 곳. 언제 어디서 어떤 글이,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그것은 이 소설과 깊이 닮아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결말대로(작은 가지이든 큰 줄기이든) 언제나 그것은 사람들로 연결된다는 것. 어찌되었든, 좋은 결말이든 나쁜 결말이든 그것은 결국 사람들을 향해 가야 한다는 것. 어디로 흘러 들어갈 지 모르는 개구리들처럼 어디로 가서 끝을 맺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결국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끝이 난다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결국 이 소설은 구조에서도 담고 있는 내용에서도 온전히 삶을 담아내고 있다. 이 소설 자체가 삶과 같다는 듯이 그는 이 소설의 모든 것에서 삶을 표현하고 있다. 그 안에는 예측가능함과 예측불가능함, 평범함과 독특함, 일상속의 폭발력과 연민과 고뇌, 희망과 회한이 모두 다 혼재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릴것이란 없다. 내가 작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가해함마저도.
작가는 결국 대화합과 같은 파티를 통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모두가 모두가 만족한 그 파티와 함께 일단 우리가 살짝 엿본 캐너리 로의 아주 잠깐의 시간은 지나갔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맥패거리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닥의 연구소를 세네번쯤은 작살낼 것이고, 리청의 가게에는 많은 외상목록이 쌓이고 지워질 것이다. 도라네 가게는 아주 잠시동안, 어쩌면 꽤 오래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고 보일러관의 부부와 손님들은 기어코 막힌 창문에 커튼을 달 것이다. 그냥 그럴 것이다. 별다른 이유나 목적 없이. 삶이란 그냥 그런것 전부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