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빅토르 E. 프랑클 지음, 박현용 옮김 / 책세상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고 나는 이분의 팬이 되었다. 이미 돌아가신 고인이라 안타깝게도 만나볼 수는 없지만, 그분의 책을 통해서 그분의 생각들을 접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삶에 대해서 나는 정말로 궁금한 것이 많다.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나조차도 관점이 서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이분의 '로고테라피'에 관해 궁금증이 생기고 정말로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에 이분의 책을 선택해서 읽게 된다.

이 책은 책 제목처럼 빅터 플랑클이 많은 책을 썼지만 90세 때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자서전같이 쓴 글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사생활까지 알고 싶은 느낌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3년 반을 보내면서 생사에 갈림길에 여러 번 서게 된 빅터 플랑클이 느낀 삶이란 무엇일까? 이미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여러 번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 외 다른 책들을 통해서도 그의 생각을 듣고 싶어졌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맞는 것일까? 나 좀 알아야겠다. 내가 좀 정의를 내리고 이거야!!!!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왜냐하면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천지차이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청소년들이 이 질문에 답을 하게 된다면 사춘기도 없어질 것이고, 또 살면서 고난과 힘듦도 잘 극복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이다.

삶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다. 동양고전에서도 그렇고 성경에서도 삶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삶에 대한 욕심이 많기 때문에 내가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질문이 많은 것 만큼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 같다. 행복한 고민이다. 뭔가를 고민하고 갈구하는 게 있다는 것이 참 좋다.

< 다시 읽고 싶은 글귀>

탈무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영혼을 구원한 사람은 오 세상을 구원한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열다섯 혹은 열여섯 살 무렵에 이 모임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발표를 했다. 당신 나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사유를 전개시켰다. 그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물어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대답을 해야 한다. 우리 존재를 스스로 책임질 때 우리는 이런 삶의 문제에 대해 답을 할 수가 있다.

또 다른 사유는 삶의 최종적인 의미는 우리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한마디로 초월적인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초월적인 의미만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만 한다. 그리고 설령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항상 초월적인 의미를 믿고 있다. 아마도 같은 시기, 같은 해였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이자면, 햇빛이 쏟아지는 어느 오후에 항상 산보를 다니던 타보르슈트라세의 그 자리에서 나는 나 자신을 대면했다. 그리고 내가 높이 평가하는 명언을 가만히 곱씹었다. 운명을 축복하기를! 운명의 의미를 믿기를!

거듭 말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저 믿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모르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나는 이미 1929년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하는 세 가지 가치와 가능성에 대해 구상했다. 그 세 가지 가능성은 바로 우리가 하는 행동, 우리가 하는 일, 그리고 경험, 만남,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설령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운명과 대결한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의 능력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능력, 즉 인간의 고통을 인간의 업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증언하면서 삶의 의미를 쟁취할 수 있다.

내가 책 제목을 "... 그리고 바보는 진실을 이야기한다"라고 구상했던 것은 심리치료 속의 심리주의와 싸우면서, 아픈 것이 절대로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즈음 이것을 로고 이론이라고 부르곤 한다. 로고테라피는 모든 것을 병리학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주장과 맞서 싸울 것을 선포한다. 혹여 책 제목을 다르게 붙인다면 앞에서 밝힌, "편집증 환자가 주장했더라도 2x2=4이다!라고 할 것이다.


"인간이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해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에 부닥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마치 뭔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내게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마치 뭔가가 결정되어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어." 그렇게 솔직한 마음을 쏟아내자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순간에 선량한 폴락만큼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늙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도 없다. 그런 까닭에 '나이가 드는 만큼 성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늙는 것이 전혀 대수롭지 않다.'라고 말하곤 한다. 2주 전에 쓴 원고가 2주 뒤에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원고를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글이 좋아지는지는 거의 분별할 수 없다.

결국 늙는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의 측면이다. 하지만 이 덧없음이 근본적으로 삶을 책임지게 하는 유일하게 큰 자극제이다.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임감에 대한 인식. 그렇기 때문에 로고테라피 치료의 원칙은 인간 개개인의 자전적 관점과 관련짓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나는 이 원칙을 어느 날 꿈속에서 생각하다가 잠에서 깬 뒤 급하게 글로 옮겨 적어서 저서 <의료 성직자>를 통해 발표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라. 첫 번째 인생을 잘못해서 모두 망쳤는데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도 지난번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라. 실제로 책임감은 그런 가상의 자서전을 거쳐 진짜 자신의 삶으로 옮겨가게 된다.

프랑클은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뒤에 자신의 고통스러운 체험을 바탕으로 정신의학의 셋째 사상으로 불리는 '로고테라피' 심리치료 이론을 발표했다. 로고테라피는 '로고스'와 '테라피'를 합한 용어인데, 로고스는 '이성' '의미'를 뜻한다. 따라서 로고테라피는 우리말로 '의미 치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자아가 무너진 사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쾌락 의지'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 '권력의지'를 제시하는데 반해, 프랑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로고테라피는 고통에 처함 사람에게 앞날에 그 고통 자체가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심리치료법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인간에게는 '삶의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생생한 증언은 일상에 젖어 사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내게 주어진 삶의 과제를 찾지 못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정신없이, 치열하게 살다가도 어느 순간 깊은 상실감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우울증은 로고테라피의 관점에서 보면 생물학적 요인이나 사회적인 요인보다는 결국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실존적인 공허'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지닌 의의는 위대한 한 인간의 인생을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아무 의미도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이란 결국 삶에 대한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평범한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해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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