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100쇄 기념 에디션)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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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엄청난 스테디셀러 책이다. 어떻게 이 책을 선택해서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서 혹은 어느 책에서 나온 것을 보면서 내가 읽고 싶은 책 목록에 넣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 작가가 보인다. 작가의 문체 속에서 작가의 성격이 보이고, 그 사람의 밝음이 보인다. 이 책에서도 그랬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왠지 장영희 작가님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분의 기사를 찾아봤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이시다. 1살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으로 사셨지만,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서강대학교 교수님이 되었다. 그리고 꾸준하게 계속 글을 쓰셨다. 그녀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책을 읽어보니 오래된 느낌이 든다. 이 책에 나온 감정이라든지 배경들이 벌써 10년 전이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든다. 올드 한 느낌이 다 좋지 않은 건 아니다. 그 안에서 향수를 느낄 수 있어서 그런 느낌이 정말 좋았다.

1994라든지, 1988이라는 드라마를 책으로 읽는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때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 자신의 형제 외에 자녀도 없고 가족도 없다. 그런데 그녀가 외롭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를 따르는 제자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10년 전만 해도 교수님과 제자의 사이가 유별났던 것 같다. 지금은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일지 모르겠다. 작가님은 자신의 자녀처럼 제자들을 돌보았고, 그들의 이름을 외워서 불러줬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교수님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의 글에서 유독 제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냥 제자라고 뭉텅거려도 되는 것을 일일이 이름을 다 적어주셨다. 그만큼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가님은 암 투병을 하면서 이 책을 쓰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이 출판될 즈음 이미 돌아가셨다. 작가님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 책은 100쇄를 찍은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추모 10주년을 기념으로 해서 올해 다시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정말 작가로서 얼마나 뿌듯할까?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하늘나라에서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기뻐할 것 같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런 점이 부럽기도 하다. 내가 죽은 뒤 10년 후 내 책이 다시 이렇게 재출판 된다면 정말로 좋을 것 같다.

요즘에는 투병 중에 글을 쓴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그것만 가지고 화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작가님은 이 책에서 자신의 장애라든가 병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기사를 찾아보기 전까지 몰랐을 정도이다. 굳이 그것을 넣을 필요도 없었고, 투병을 하면서 쓰는 것이라 그런지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굳이 들어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책을 쓰셨고, 책에는 작가님의 밝은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래서 더 멋있게 느껴졌다. 아픔을 팔아서 쓰는 책이 있다. 회복한 것을 책으로 써서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지만, 그래도 그것을 굳이 오픈하려 하지 않았지만 스며듦을 느끼게 될 때 오히려 그 느낌은 더 배가 되는 것 같다.

<다시 읽고 싶은 글귀>

'운명의 장난'은 항상 양면적이야. 늘 지그재그로 가는 것 같아. 나쁜 쪽으로 간다 하면 금방 '아, 그것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군'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일이 생기거든. 협소 공포증이 생겨 엘리베이터 걸을 그만두고 나서 나는 정원 장식용품 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했고, 거기서 죽은 우리 남편을 만났지. 재작년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우린 53년을 같이 살았어. 남편을 만난 건 내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이었어.

어렸을 때 우리 집 우산 하나가 살이 빠져 너덜거렸는데 그 우산이 다른 우산에 비해 컸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학교에 갈 때는 꼭 그걸 쓰셨다. 업혀 다니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게다가 너덜거리는 우산까지... 그래서 비 오는 날은 학교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때 내가 찢어진 우산을 쓰고 다녔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아마 지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찢어진 우산이든 멀쩡한 우산이든 비 오는 날에도 빼먹지 않고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아무리 내가 입 아프게 말해도 이 모든 것은 절대로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짜 몸으로 살아 내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진 어느 가을날, 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 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 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아닐까.

상갓집에 가면 보통 육개장, 송편 전 등 자금자금한 음식들이 나오고 상추쌈이나 갈비찜 같은 음식은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상갓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련을 남긴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이제는 아무리 하찮은 음식일지라도 먹을 수 없는 망자 앞에서 보란 듯이 입을 쩍 벌리고 먹는 것은 무언의 횡포라는 것이다.

어부라는 시에서 김종삼 시인을 말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라 못 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 멋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얼마 전 다시 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대령과 사랑에 빠진 마리아가 '그 무언가 좋은 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난 심술꾸러기였고, 내 청소년기는 힘들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이렇게 사랑하는 당신이 거기에 서 있으니, 내가 과거에 그 무언가 좋은 일을 했음에 틀림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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