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세계사 - 교과서는 못 가르쳐주는 KODEF 안보총서 13
남도현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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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어린 시절 가슴속에 그려 보았던 꿈이 생각난다. 지금도 고향집 근처에 친척들이 여럿 모여 살고 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옆집이 할아버지가 사셨던 큰집이고, 앞집은 작은 고모집이, 또 그 옆집에 외삼촌집이, 뒷집에는 작은집이 있어 마치 작은 촌락을 이루고 살았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대가족의 유대관계가 보기 좋게만 느껴졌고, 내가 장성해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다면 제대로 된 커다란 집을 짓고 그 집에 온 친척들이 모여 살면 좋겠다는 꿈을 그렸었다. 혈연으로 연결된 친족들은 작은 국가와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집안에도 대통령과 같은 어른이 있고 그의 의중에 따라서 집안의 모든 일들이 결정되고 진행된다. 때문에 집안의 어른의 지혜로운 판단이 집안을 번영시킬 수도 있지만, 섣부르거나 잘못된 판단은 집안의 몰락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어느덧 세상이 변해서 핵가족의 단위를 뛰어넘어 결혼을 기피하는 1인세대가 늘어가는 시대이다. 하지만, 가족의 구성원이 줄어들었음에도 예전보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짐에 따라서 친인척의 개념은 마치 족보속의 기록으로만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가 라를 생각을 하게 한다. 문득 요즘의 친족과 가족의 개념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은 책<교과서는 못 가르쳐주는 발칙한 세계사>를 읽고 나서 과연 절대자중심의 국가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며, 현재의 내가 그 교훈을 발현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에 대한 고민에서였다. 결국 그 고민의 귀착지점은 가족이고, 친인척과의 관계로 잡게 되었다. 가족의 구성원이 줄어듬에도 불구하고 가족 내에서, 친인척간의 관계에서 크고 작은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비단 모든 가족들이나 친인척들 간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태평성대의 중간중간의 전쟁사가 있는것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이 내재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런 가족 내, 친인척간의 관계의 전쟁의 불꽃은 예나 지금이나 상속 등의 경제적인 문제에서 대부분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 동안 오순도순 큰 문제없이 지내던 집안에서 갑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상속재산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불협화음이 시작되고, 심지어 그로 인한 갈등이 깊어질 경우 가족간의 안면몰수는 기본이고, 패륜적인 행위까지 서슴치 않게 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 세계사의 크고 전쟁들 또한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각자의 실리와 명분을 가지고 개전하고, 참전하게 되지만 결국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들만 남겼을 뿐 긴 역사의 흐름속에 그리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생각해보건대 결국 전혀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가족간의, 국가간의 전쟁을 막고 보다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르아닌 헤게모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고, 구성원들과의 부단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화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지혜를 키워가는 것이라 생각 된다.

<교과서는 못 가르쳐주는 발칙한 세계사>의 내용은 주로 1,2차 세계대전의 전개과정과 독일중심의 추출국과 영국,프랑스,미국과 러시아 중심의 연합국의 전후사정, 주변국들의 면면까지 분석적으로 다루고 있다. 중간에 동서양간의 전쟁사도 들어있으며, 초반부에는 중국의 중원 쟁탈기를 소개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과 더불어 부족한 우리나라의 부족한 역사의식에 대한 쓴소리도 담고 있다. 그 수 년에서 수 백년간을 이어 온 수많은 전쟁속에서 끝없이 몰지각한 지도자의 전쟁노름에 판돈이 되어 희생 된 무고한 국민을 통해서 전쟁의 무의미함을 전하기도 한다.

 요즘은 그나마도 바쁜 탓에 줄어든 듯 하지만 연말이나 명절 때 친척들의 모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중의 하나가 ‘고스톱’이다. 친목도모라는 미명아래 시작되는 푼돈이 오가는 게임이지만, 간혹 즐거운 만남에 감정이 상해서 다음 명절에 얼굴을 내밀지 않게 되는 악순환의 원인을 제공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고스톱의 가장 큰 룰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이 접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고스톱에는 지역을 달리하며 다양한 룰이 있다. 하지만, 지역을 달리해도 변함없는 극명한 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낙장불입(落張不入)’바둑에서라면‘일수불퇴(一手不退)’일 것이다. 한 번 내놓은 패는 절대 거두어들일수 없다는, 한 번 놓은 바둑알은 옮길 수 없다는 신중한 선택을 강조하는 룰이다. 지난 세계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들을 전장으로 내몬 권력자들은 낙장불입과 일수불퇴의 의미를 상기했을까? 아마도 전쟁을 게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승리를 위한 포석을 다지기 위해서 나름의 신중을 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한 신중함은 이미 세상을 손에 쥐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신중함이었지, 국민들의 평화에 기인한 신중함은 아니였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평화의 기치로 그들을 막아선 연합군 또한 승리 후 실리적인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한 승전국간의 또 한 번의 탁상전쟁을 치르게 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2차 대전의 패전을 눈앞에 두고도 마지막까지 국민을 판돈으로 삼아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막 전쟁의 도박판을 즐겼던 히틀러에 빗대어 표현하기를 “그것은 마치 빚에 몰린 가장이 회생절차를 밟아 가정을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고 아기들 돼지저금통까지 들고 도박장으로 달려 나간 것과 같은 꼴 이었다”(p.291) 라고 했다.
자칫 <교과서는 못 가르쳐주는 발칙한 세계사>에 담긴 내용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윤리적을 해석한 것은 아닌가 싶다. 분명 전쟁에서 패자는 물론이고 승자 또한 얻는 것은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뿐이다. 불가피한 방어를 위한 전쟁이라면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또한 이전에 접경국과의 무던한 관계라면 전쟁을 그리 쉽게 촉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역사의 소요돌이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적어도 빚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고 생각을 모아야지 아이들의 돼지저금통을 들고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누를 범함으로써, 한 번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는 낙장불입(落張不入)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될거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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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문 - 생명의 근원에 이르는 구도자의 인생산책
최민자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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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지문을 갖은 사람이 없듯 우리는 비슷한 듯 제각각의 삶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반복되는 일상 중에 자신의 삶의 최종 도달점은 어디이고, 이 땅에 이 시대에 태어나서 해야 할 천명적인 사명은 혹시 무엇인가? 에 대한 미궁의 자문 속에 빠질 때가 있다. 분명 나에게도 어떠한 절대자가 의도하는 삶의 지문이 있을 텐데 과연 나는 그 삶의 지문을 따라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책<삶의 지문>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명확한 정답은 아닐 지라도 정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짧은 이정표와 더불어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시야를 갖게 만들어 준다. 결국 세상의 만물을 바라보는 생각과 시야의 넓이가 커질수록 정답에 근접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삶의 지문>은 저자 최민자 교수의 구도적인 삶의 길의 발자취를 시간의 흐름순서에 따라서 크게 3부로 작게 12장으로 나누어 그려져 있다. 한 장 한 장 그 발자취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때로는 강의실에서 12가지의 다른 과목의 강의를 듣는 듯하다. 저자의 구도과정중의 깨달음과 더불어 책 중에 담긴 삶의 진리를 향한 정진의 열매와 같은 선지자들의 고매한 가르침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속된 마음이 치유되는 듯하다.
제1부 연꽃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에서는 세상의 거울 속에 비추어진 삶에 급급하지 않고, 열린 마음을 담기 위한 삶의 진리, 세상의 진리를 찾아 때로는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때로는 스스로 처연한 동굴수양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었던 깨달음의 긴 발자취를 담고 있다.

천지는 가장 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 없다.
사계는 명백한 법을 가지고 있지만 따지지 않는다.
만물은 완전한 질서 원리를 가지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p.69 장자-<지북유>편)

이렇듯 말이 없는 천지와 사계를 완전한 질서 원리를 담고 있는 만물을 향한 정진의 과정들을 보면 마치 유별난 사람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정진의 열매들을 드러내 보였을 때는 지금의 세상과 자신에 대한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여해스승과의 선문답과 도가의 큰 성인 왕진인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남긴 깨달음 천천히 마음에 새기듯 읽어 내려가면 어느새 가슴속에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한 느낌이다.

“지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 낮은 데로 흐르는 물과 같이 스스로의 처신을 낮추는 겸허함이 있고, 스스로의 형상을 고집하지 않는 물과 같이 상대를 거스르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으며, 약함으로 나가기 때문에 도리어 강한 힘을 내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생활태도는 물과 같은 것.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면서도 결코 상대를 거스르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p.139)

왕진인을 찾아 나선 발걸음 중에 만난 ‘상선약수(上善若水)’에서 느낀 이러한 감흥들을 접하면서 결국 자연의 만물 속에 진정한 삶의 진리가 살아 숨 쉬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피가 흐르는 생명체’ 라고 피력한 역사에 대한 고찰, 지난 나라의 수난으로 왜곡되고 버려지 유구한 우리나라의 상고사에 관한 부분을 접하면서 왜곡된 역사를 진실이라 믿으며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가는 것은 ‘지금의 우리는 선조들의 거룩하고 의로운 목숨과 희생이 담긴 불멸의 정신을 무시하며 살아 왔구나’ 라는 회한을 느끼게 한다.
제2부 대륙에서 대륙으로 에서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의 현 상황 속에서 자칫 우리의 상고사가 묻혀버린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어가는 역사의 사실들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중의 하나인 장보고 기념탑의 건립에 담긴 과정과 역사적 의미를 전한다. 이는 분명 시작일 뿐이다. 고조선과 발해, 고구려에 걸친 대륙안에서 펼쳐놓은 우리 선조들의 불멸의 유산들은 분명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저자 최민자 교수는 1995년부터 현재까지 민간인신분으로 세계의 중심축의 이동과 다가올 정신문명시대의 도래의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는 ‘황금의 삼각주’ 라 불리는 중국, 북한, 러시아 3국의 접경인 두만강 하구 일대에 가칭 ‘유엔세계평화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 이를 추진하게 된 배경과 과정, 이러한 인류를 통합할 수 있는 상징을 통해서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종교 간의 모든 파열음을 하나로 묶어 태어날 생명장(生命場) 부활의 의미를 전한다.
제3부 지혜의 길 행위의 길 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이 비록 선지자들과 같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이치에 좀 더 다가가고, 마음수양을 통해서 우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안식의 길을 보여 준다. 인간으로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개인의 자아발견과 성찰에서 제대로 된 국가관의 확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물질계와 의식계의 상호소통을 인식하는 방법 등 진정한 삶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준다. 보이는 물형계(物形界)의 성과도 영적 진화 과정의 부산물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의 동기와 의도의 순수성과 일관성, 성실성에 기인한다는 것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 더불어 영적확장의 결혼에 대한 의미등도 우주의 섭리를 통해 해석해 놓고 있다.

<삶의 지문>에서 어찌 생각하면 쉽게 보고 느낄 수 없는 사상계의 원리들을 접하다보니 왠지 내 삶을 세상과 동떨어진 삶으로 고착시켜주지는 않을까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하지만 저자 역시 오랜 구도와 수행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일진데, 책 한권으로 그 만고의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깨달음을 전함으로 받는 마음이 미동이 후에 나비효과처럼 커다란 삶의 진리에 대한 파도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자아발견의 시간도 중요했지만, <삶의 지문>을 통해서 전해들은 우리 선조들의 묻혀진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갖게 되는 자손된 자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은 앞으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층 더 넓혀주는 듯 했다.
늘 부족하다 생각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삶의 진리를 향한 작은 미동을 더해 준 글이 있어 나누고 싶다.

“가섭아, 마음은 바람과 같아서 획 지나가 붙잡을 수가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아니한다.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서 많은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
마음은 번갯불가 같아서 났다가는 순간에 사라져버린다.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 여섯 가지 욕망에 한없이 얽매인다.
마음은 그림 그리는 사람과 같아서 곧잘 여러 가지 행동을 만들어낸다.
마음은 원수의 집과 같아서 온갖 괴로움과 번뇌를 준다.
마음은 미친 코끼리와 같아서 흙과 모래를 짓밟듯이 일체의 좋은 갚음을 받을 행동을 파괴해 버린다.
마음은 파리와 같아서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 생각하고 집착한다.
마음은 악한 도둑과 같아서 온갖 착한 행동을 약탈한다.
마음이 항상 빛을 탐내는 것은 마치 여름밤에 부나비가 불에 달려드는 것과 같다.
마음이 항상 소리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군인이 승리의 북소리를 즐기는 것과 같다.
마음이 항상 냄새를 탐내 집착하는 것은 마치 돼지가 더러운 데 누워 있기를 즐겨함과 같다.
마음이 항상 맛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와 여인이 맛있는 음식 먹기를 탐내는 것과 같다.
마음이 항상 접촉하기를 탐내는 것은 마치 파리가 기름에 달려드는 것과 같다.
가섭아, 마음의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움이 위에 말한 바와 같으니라.”
(p. 360~361) 

‘참나’를 찾아 나서는 발걸음은 먼저 이런 속된 마음의 헤아림부터 시작하여, “가고 가고 가는 가운데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는 속에 깨닫게 된다.” 라는 여해 스승님의 말씀처럼 부단한 헌신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이치를 공부해 나아갈 때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지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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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다르지 않다 인물로 읽는 한국사 (김영사) 5
이이화 지음 / 김영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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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주변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것은 남의 말이나 평(評)이다. 자신이 정말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심리학에서 말하는 소위 ‘사회성의 법칙’에 이끌려 다수의 생각이 맞을거 라는 생각에 남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게 되고 스스로도 그 사람에 판단을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그로 인해서 생기는 판단의 오류가 바로 편견이 될 수도 있다. 학창시절 우리는 우리나라의 5천년이 넘는 긴 역사를 책 한 두권의 짧은 요점으로 배우고 받아들인다. 비록 역사교육을 담당한 선생님들의 좀 더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지긴 하겠지만, 결국 요약에 집중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미 역사서 안에 그 사건과 인물에 대한 시대적인 판단까지도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역사적이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아무래도 TV에서 방영하는 사극이나 영화의 역할이 크다 할 수 있다. 때론 시청률과 흥행을 고려한 흥미위주의 픽션으로 역사를 지나치게 훼손시켜 전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낳긴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줌으로써 역사에 대한 시각과 판단의 기준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책<진리는 다르지 않다>도 우리에게 역사의 한 단면에 대한 혜안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이다.

<진리는 다르지 않다>에서 다룬 역사는 삼국시대의 종교의 대중화를 이끌고, 국난의 현장에서 몸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선 불교, 초월의 사상으로 늘 핍박받는 민중들에게 위안의 메시지를 전한 도교, 근대로의 불을 밝혀준 천주교과 기독교, 개화기 구국의 길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횃불을 서슴없이 쥐고 앞장섰던 민족종교의 중심에서 때로는 민중과 나라를 위한 진정한 진리의 불꽃을 밝힌 종교가들에 대한 역사이다.
책에 열거된 종교가들은 우리가 역사교육 등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낯익은 이름들이다. 그래서 책에서는 잘 알고 있는 행적과 더불어 좀 더 깊은 이면의 시각으로도 조명을 해 보고 있다. 왜냐하면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역사속의 인물에 대한 판단은 시대의 다름에 따라 또 다르게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한양 천도를 둘러싼 이성계, 정도전, 무학, 이방원의 갈등관계속에서 음모를 위한 이미지조작등이 있었음은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커다란 궁금증을 자아내고, 인물에 대한 판단을 쉽사리 하기가 어렵다. 이책이 그러한 판단에 큰 잣대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심층적인 접근을 한 것 만은 사실이다. 결국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다르지 않다>를 읽다보면 책에 소개된 인물들이 적어도 그 종교의 시작과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들이기에 그들의 행적과 그에 담긴 일화들을 보는 것만으로 지난 우리의 역사속에 함께 했던 각종교들의 태동과 더불어 변화상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
저자 이이화님의 약력이 보여주듯 마지막장 ‘구국의 길에 횃불을 밝힌 민족종교’ 편은 근대사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좀 더 상세히 설명이 가미되어 있어, 다소 관심이 미흡했던 민족종교의 살아있는 이면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진리는 다르지 않다>라는 좀 색다른 책의 제목을 접하고, 이 책을 통해서 ‘종교 지도자들이 구도한 삶의 발자취를 통해서 진정 전하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자문을 던지며 궁금했는데, 이런 나의 질문에 ‘종교가 대중들에게 진정 갖는 의미’ 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감흥을 던져준 분의 이야기에서 오래도록 책장이 머물렀다. 무교회주의와 민족신앙의 얼을 밝힌 김교신과 종파와 교파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종교계의 현실에 비수를 던진 함석헌이야 말로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가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중 함석헌의 “종교는 하나다” “이단이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며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 선언과 함께 싣고 있는 ‘대선언’이라는 詩이다.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p.184)

아마도 모든 종교지도자들의 생각이 이 詩구절과 같았더라면 좀 더 각종교의 부흥과 더불어 대중들에게 추앙받고 스스로도 제대로 된 진리를 위한 구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책에서 강증산이 주장한 이 세계의 시대를 선천(先天)-말세-후천(後天)으로 분리했던 것이 문득 떠오른다. 이제는 지난 과거를 말세로 구분하고 영원한 선경(仙境)의 후천(後天)을 향한 민중과 호흡하는 종교만이 세상과 어우러져 훌륭한 뒷사람의 길잡이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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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윤영무 지음 / 브리즈(토네이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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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의 경제공황사태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10년전 IMF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폭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10년이란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의 사회와 가정의 변화는 대한민국의 남자들의 강한 자존심을 자포자기로 내몰았다. 10년 전부터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져가면서 회사는 오륙도, 사오정, 38선등의 신조어들로 의기소침해친 남자들의 등을 떠민다. 이렇게 가정으로 회귀한 가장들과 사회에 연착중인 청년들을 아내와 자식들의 따뜻한 격려 맞이해 줬으면 좋으련만, 격려대신 매일같이 그렇지 않아도 차갑게 느껴지는 밥공기에 잔소리로 모래알을 섞고, 앉아 있는 자리를 온통 가시밭으로 만든다. 결국 가정에서도 경제적인 이유를 붙여 이혼으로 시작된 가정파탄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또 다시 내몬다.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갈 곳이 없다. 이제 갈 수 있는 곳은 어느덧 어머니배속과 같은 편안함을 줄 것이란 착각 섞인 기대가 서려있는 한강주변 다리들의 난간위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남자로 살고 있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씁쓸함과 허무함은 공포감이 되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누가 왜 이렇게 대한민국의 남자들을 괴롭히는 것인가...? 결국 갈 곳은 한강다리 밖에 없다는 것인가...? 결국 이에 대한 뚜렷한 해답 또한 IMF보다 처절한 경제사정에 맞물려 희망의 빛은 사그라져만 가고 있다. 이렇게 고요한 어둠을 향해 사그라져만 가는 빛에 다시금 희망의 작은 불씨와 더불어 충만한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 바로 책<대한민국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무엇보다 읽으면서 이 책은 대한민국의 남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대한민국의 남자들과 함께 이마를 맞대고 호흡하면 살아가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이 읽고 남편과 아버지에게 사랑이 담긴 격려의 한마디를 전함으로써 더 큰 희망의 용기와 자신감를 심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1부 ‘대한민국의 남자로 살아가기’ 에서는 비록 전체는 아닐지라도,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동감하며, 고민하는 현실의 회사와 가정에서 겪는 일상의 고통들을 나열해 놓고 있다. 늘 자신의 비참함을 들어내지 않으려 가슴으로 울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남자, 아내의 의미없는 ‘공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린 남자, 어느 덧 가부장적 의식의 최종적인 피해자로 남게 된 남자, 눈물을 흘릴 수 없어 술로 울어야 하는 남자, 이 모든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단 하루만이라도 대접받고 싶은 지극히 소박한 바램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가는 우리사회와 회사의 일원이며, 가정의 가장들이고, 아들들이다. 위에 열거한 남자들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의 그림자로 다가왔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해법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을 등진 회사와 아내와 자식들에게 반감으로 대처한다면 끝없는 파국만이 기다리겠지만, 다시금 자신을 추스려 작을 지혜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이들 모두에게 당당한 남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향한 지혜를 담은 지침서가 2부에 덧붙여져 있다.
 2부 ‘남자들, 새로운 삶의 문을 두드리다’ 에서는 1부의 사회와 가정에서 받는 괴로움과 고통의 굴레에서 당당히 일어서 새로운 삶의 불을 밝히기 위한 희망의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일상으로부터의 외도로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자신감,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긴 깊은 父情의 전달, 자신만의 취미활동을 통한 즐거운 인생의 활로,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 얻을 수 있는 무한의 상상력이 줄 수 있는 원대한 희망바이러스, 아내 즉 반려자를 통해서 갖고 있는 에너지를 배가 시켜가는 법등... 결국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무엇으로 살아야할지에 대한 이정표를 그려준다. 그 중 두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에서 한 구절이 공감하며 적어본다.

  “아들아, 아버지와 아들은 철길이다.
끝까지 하나가 될 수 없는 평행선이다.
그저 옆에서 너희들이 세상에 빛나길 기도한다.” (p.131)

지나친 기대나 관심이 아버지와 자식 둘을 망가뜨린다. 그저 평행한 철길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기도하는 것으로도 아버지와 자식은 빛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2부에서 다룬 저자의 생각들 중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혼에 대해서 다소 절대적인 반대의사를 표한 점에 대해서 비록 이혼이란 것이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 도덕적 물의를 가져오는 부분도 있지만, 예전에 비해 개인주의 성향으로 치닫는 현실의 상황과 가치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혼을 막는 것만으로는 최선의 치료법은 못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는 힘든 시대다. 이제는 이혼도 때에 따라서는 남녀가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의 폭은 확장을 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꼭 내 품안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묵은 생각이며 이기주의의 소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한민국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며, 결국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그 중의 한사람인 내 자신이 힘든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의 행복을 찾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이유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던져봤다. 그러던 중 내가 찾은 답은 이것이었다. 가끔 인터넷에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글을 올리고, 누군가 내가 쓴 글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자신이 받은 느낌을 댓글로 또 전한다. 이때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단지 그것을 읽고 공감 할 한사람을 위한 일로써 충분하다 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남자들 또한 자신의 지친 일상의 흔적들을 여기저기에 남김은,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 줄 단 한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위해서 한 몸 바쳐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이유는 필요없을거라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 남자들이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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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심리학 - 마음을 읽어내는 관계의 기술
이철우 지음 / 경향미디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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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매일 아침 대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어제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어제 늦도록 술을 먹고 자서 눈동자 주위에 실핏줄이 여전히 남아있고, 막판에 허전함을 라면 한 그릇까지 추가해서 달랬다면, 저게 정말 내 얼굴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후회막급의 심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건 단지 하루 폭식하고 폭음으로 잠시 달라진 모습이다. 폭식, 폭음이 없었던 날에도 우리의 모습은 조금씩 변한다. 사람 몸의 세포는 3년을 주기로 생성과 사멸을 반복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도 3년 만에 만난 친구는 생물학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전혀 딴 친구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어떤 사진작가는 식물과 꽃의 사진을 365일동안 관찰하여 매일매일 미세하게 변화한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고 한다. 하루사이의 미세함까지 찾아보려는 프로정신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나 라는 사람은 지난 세월 수없이 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비춰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저 크게 무리없다고 생각만해도 다행스러운데, 혹시 내가 미쳐 생각하지도, 느끼지 못하는 단점이 행동이든 말을 통해서 남들의 뒷담화꺼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은 아무리 완벽은 추구했다해도 뒤안에 남기 마련이다. 자의든 타의든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거미줄처럼 관계에 관계를 더해가고, 연결되어 한 평생 살아간다. 그래서 대인관계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만 갖고 있어도 ‘그래도 한 평생 행복하게 살았구나!’ 하고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관계의 심리학>은 자신이 주위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에 대한 자성과 반성을 통해서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테스트를 통한 자각하고, 내일의 작은 변화를 모색해 봄으로써, 행복한 내일의 태양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요즘의 심리학 책의 주류는 과학적인 입증을 통해서 가설의 정의화를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관계의 심리학>에서도 Chapter마다 한 개의 테마를 중심으로 대부분 실험을 통해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를 통계학적으로 전달하며, 보편적인 정보로 독자들이 쉽게 호흡할 수 있도록 이끈다. 더욱이 Chapter끝에서는 간단한 테마에 관련해서 스스로 자신의 심리를 진단해 볼 수 있는 테스트가 마련되어 있어, 자가진단을 통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심리상태를 점쳐보고, 극복내지는 개선 노력의 실마리를 던져 준다. 테마는 인상, 시선으로부터 시작해서 수용과 가치관까지 심리학의 전반적인 이론보다 우리가 일상중에 접하는 인간관계에 있어 소홀하기 쉽고, 잘하고 있는 것은 잘하고 있는대로, 고쳐나간다면 좀 더 원할한 인간관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원할한 인간관계를 위한 심리학의 접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접목들을 읽어 가다 보니 나 역시 내생각과는 달리 모라토리엄형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내가 얼마만큼 자기중심주의가 강한지, 대인지향성은 높은지, 21세기의 페스트라는 우울증에 원인이 되는 고독감의 지수는 어느 정도나 되는지 스스로 결과를 통해서 반문하고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책에 담긴 엘리노어 루즈벨트가 전하는 짧은 명언은 자각한 문제점에 대한 극복과 개선에 힘을 실어준다. ‘수용’편에서 엘리노어에 대한 일화에 담긴 얘기가 어쩌면 관계의 심리학을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맘속으로 새겨야 할 부분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불행한 경험으로 담고 살았다는 3가지 교훈!

“나는 매력적이지 않다”
“나에 대한 누구의 애정도 지속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를 실망시킬 수 있다”

(p.244)

이 3가지의 교훈은 아마도 책으로 자각한 자신의 잘못된 관계로 몰고 갈 수 있는 성격이며, 심리상태로부터 자치 방치하고 회피하고 싶은 생각들을 날려줄 만한 교훈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자그마한 변화를 추구하고 싶다면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진정 지금의 자신을 사랑하고, 앞으로의 자신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호 할 수도 있게 만드는 것이다.

수년 수십년의 세월의 때라 묻어서 형성된 자신의 관계, 부족함을 자각해도 한순간에 바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부족하고 잘못된 점에 대한 인정을 시작으로, 주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보다 깊이 돌아봄으로서 조금씩 조금씩 바꿔나가야 할 긴 인생의 숙제인 것이다. 앞으로 매일 저녁 일과에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면서 자신의 맘속에 디지털 카메라도 셀카를 찍어보듯 미세하게 변화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화상을 연사로 기록해보라. 아마도 1년 후 10년 후, 이전의 디지털 카메라에 셀카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자신의 얼굴과 마음속에서 사람들의 관계(=人情)를 먹고 자란 행복의 꽃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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