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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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사전정보가 거의 없이, 표지가 예쁘고 추리소설이라길래 재미있어 보여서 골랐는데 생각보다는 그닥 내 취향은 아니다.


기욤뮈소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건 대략10년 전... 아마 대학 때였던 것 같은데, 그때 친한 선배에게 읽을 만 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니까 기욤 뮈소의 종이여자를 추천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기욤뮈소 라는 이름이 너무 독특해 기억에 남았었는데... 몇 년 전쯤 이 책이 신간으로 나왔을 때 알라딘 홈페이지에서 책 표지를 보고 표지가 예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나서 저번주쯤 방문한 도서관에서 마침 이 표지가 보이길래 빌렸다. 근데 흠... 확실히 수수께끼가 풀리기 전인 초반보다는 후반부가 더 재밌긴 하지만 왜 이 책이 프랑스 베스트 셀러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파리 곳곳의 지명과 장소가 등장하고, 그리스로마 신화가 흥미롭게 접목되어 그런가? 그리스로마 신화가 유럽에서 어느 정도 위상을 가지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도깨비 설화나 뭐 조왕신, 삼신할매의 존재 같은, 믿음과 허구의 경계에 걸쳐져 있어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그런 위치일까?


어쨌든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대뜸 디오니소스의 등장은 굉장히 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처음 등장한 도플갱어가 사실 도플갱어가 아니라 연기였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간 것은 무척 흥미로웠지만,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 것과 낯선 지명, 그리고 생뚱맞은 신화의 등장이 소설에 완전히 몰입하는 데 조금 어려움을 겪게 했다. 최근에 읽은 같은 추리소설을 떠올려 보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나일 강의 죽음이 좀더 흥미롭고 몰입이 쉽게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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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의 죽음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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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동안 SF에 빠져있을 때 이 책을 알게되었다. 그때 굉장히 인상깊게 읽은 코니 윌리스의 단편선이 있었는데 작가 후기란에 코니 윌리스가 해당 단편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을 읽고 영감을 받아서 쓴 책이라고 했고,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이 내용이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은 학창시절에, 그러니까 중고등학생 때 꽤 열심히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이 생각나진 않는다. 추리소설을 안읽은지도 꽤 되었고, 요즘 글을 읽는 데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머리도 환기할 겸 빌려보았는데 나쁘지 않았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요즘 읽던 소설들과 다르게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고, 한 사건에 몇 개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부분이 특히 인상깊었다. 사실 책의 초반부부터 범인은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뻔한 범인을 밝혀내는데 이렇게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기에 후반부의 반전은 상당히 인상깊었다. 중간에 월스트리트라던가, 귀족 출신의 공산주의자, 재산 하나 없이 가문의 이름만 남은 귀족 들을 보면서 그때 사회의 혼란스러운 단면이 일부 엿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간에 청혼 장면은 왜 넣었는지 좀 의문이긴 하다. 독자 입장에선 너무 뜬금없는 전개라... 해당 등장인물들에 대한 서사가 좀 부족해 후반부 일부분에서 당황스러웠던 점만 빼면 꽤 재미있는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기회되면 영화도 봐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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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
수지 K 퀸 지음, 홍선영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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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시선을 끈 것에 비해서는 그냥 쉽게 읽히는 임출육 에세이다.


사실 제목이 굉장히 시선을 사로잡은 데다가, 열거된 목차들은 하나같이 진실같은 거짓말들의 나열이어서 책을 빌렸건만, 내용은 목차와는 딱히 크게 상관없는 임출육 경험담 에세이였다. 


그래도 책을 읽은 입장에서 몇 자 남기고자 리뷰를 쓴다.


어쨌든 결론은... 임신출산육아는 졸라게 힘들지만 어찌저찌 해내게 되며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의 순간들이 추억이 되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얻게된다는 이야기이다...


머나먼 영국, 선진국으로 생각되는 영국이나 한국이나 임출육의 고단함과 괴로움, 특히 여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크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의의를 부여하고자 한다...


 

부처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무수한 죽음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렉시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내 삶이 끝나버린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하나의 삶이 끝났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5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부모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이 삶은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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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사표 - 며느리 사표를 내고 기적이 찾아왔다
영주 지음 / 사이행성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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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쉽고 쓰기는 어렵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임한 일상의 결과물일까? 나는 과연 내 인생을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면서 평생 제3자로서만 접했던 '며느리'의 당사자가 되었다. 이 단어에 따라붙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 때문인지, '며느리'라는 단어는 그 모양부터가 아주 못생겨 보이고, 어떨때는 모종의 멸칭처럼 보인다. 종종 보이는 '며늘아가'라는 단어도, '아가'라는 그나마 긍정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가져다 붙임으로써 쓰레기에 꾸역꾸역 리본을 달아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무리 쓰레기에 리본을 달고 꽃을 달아 장식을 했다 한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시대가 진짜로 변하기도 했다. 여전히 인터넷과 라디오와 떠들어대는 수많은 사연들에는 고부갈등이 단골소재로 등장하지만, 어쨌든 '옛날만큼' 고된 시집살이를 하는 집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랄까, 이 '며느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여전히 구리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이 찝찝한 어감의 단어가 내 역할이 된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딱히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방인이 되는 기분, 자연스럽게 을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느끼는 기분,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것이 나와 남편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 존나 구리다. 그리고 그것을 시부모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나의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인 엄마가 나를 나무랐다는 사실이 아주 존나게 구려서, 엄마한테 사과를 받았음에도 아직 구린 기분이 남아버렸다.


재차 말하지만 시댁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 '시댁'이라는 단어도 기분이 좀 그렇다. 시댁은 일반적으로 쓰면서 여자의 집은 왜 '처가'를 일반적으로 쓰는가? 둘다 존칭을 쓰려면 '처갓댁'을 일반적으로 써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물론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처갓댁은 맞춤법에 맞지 않다며 쓰려면 '처댁'을 써야 한다고 하겠지. 그럼 처댁을 쓰라고. 뭐가됐든 똑같이 존칭을 붙이란 게 내 요지다.) 그리고 사실 몇 번 가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몇번 가보지도 않은 사이에, 묘하게, 정말 대화에서 묘하게 을의 입장이 되는게 기분이 존나 오묘하다. 

일단 시어머니는 자식자랑을 많이 하신다. 은근한 자식자랑이다. 그리고 친구 자랑도 좀 하시고, 본인 집안 자랑도 하신다. (시아버지는 대화에 끼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것은 이해한다. 우리 엄마도 한 자식자랑 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점은, 이렇게 은근히 끊임없이 자식자랑을 하시면서도, 남편이 (눈치없게) 내 자랑을 하면 묘하게 대화의 주제가 바뀐다거나 시어머니가 못들은척 하신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러시는가 싶었는데 계속해서 그러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이지 웃음이 났다. 

그리고 두번째는 시댁에서의 묘한 을의 나의 입장이다. 요번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시댁에 하루 자고 왔는데 식사준비도 시어머니 혼자 하시고, 마무리도 어머니 혼자 하셨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가 남편보고 설거지라도 하라며 화를 냈다. 물론 우리 집이었다면 내가 나서서 엄마가 상차리는 걸 도와드리고, 아빠는 식후 과일을 손수 깎고, 밥먹은 후에는 내가 나서서 설거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남편의 집이 아닌가? 그러면 무엇을 하던지간에 남편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만약 남편이 나서서 시어머니를 도왔다면 나도 기꺼이 도왔을 것이다. 사회생활 n년차인 나에게 그만한 눈치는 있다. 하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안 했다. 식사를 준비할 땐 덥다고 방에 들어가 에어컨만 쐬었고, 식사 후에도 나서서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뭔가를 나서서 하는 건 웃기지 않나?? 심지어 남편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접시를 나르기는커녕 가만히 앉아만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마가 동생 집 마당에 잡초를 뽑을 때도 내가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가서 같이 도와드리라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장모님이 혼자 잡초 뽑는 걸 구경만 했다.(결국 남동생이 가서 도와드렸다.) 쓰다보니 열받는군. 이런 상황에서 더 열받는 건 엄마가 나에게 설거지도 하지 않았다고 나무랐다는 것이다. 후의 통화에서 나의 생각을 말하자 엄마도 세상이 바뀌었다며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 했지만 뭐, 그 때의 생각만 하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어쨌든 뭐, 이것은 책에 대한 리뷰인만큼 책에 대해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다.

내용 자체는 평이하다. 빡센 집안의 맏며느리로 있던 전업주부가 며느리역할에 사표를 내고 홀로 서는 과정에서의 성장을 기록한 에세이다. 시가에 갇혀 살면서, 외도까지 한 남편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았을지 가늠이 되진 않지만 뭐,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스스로를 위한 인생을 찾기 위해 홀로 선 용기와 성찰에는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몇 가지 동의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리뷰를 마무리하겠다.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상대 남자에게 떠넘기고 ‘사랑하니까 다 알아서 해주겠지‘하거나,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대의 야행성 동물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락하는 셈이다. - P113

그것은 시댁에서의 관계뿐 아니라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시댁의 여자들은 아버지나 남편의 뜻에 따랐다. 나는 시댁 여자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그러나 겉으로는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입으로만 그럴 뿐, 행동은 남편이 원하는 대로 따랐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 P163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어서 쓴다는 것이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남편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것을 계기로 남편과 자식의 불균형을 보게 되었고, 어머니처럼 남편에게 의존하는 삶은 보이지 않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P173

그리하여 자신 안의 황금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 안의 괴물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훌륭하지도 않지만, 그럴 능력도 없고 또 능력을 개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으로 자기 대신 다른 누군가가 영웅이 되어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까운 사람, 친구, 동료, 배우자에게 향하는데, 특히 자신의 아이들에게 큰 짐을 지우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으니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대신 이루기를‘ 자녀들에게 원한다. 그 이면엔 자신은 애쓰고 싶지 않다는 게으름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 금이 든 광맥을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개발 안 하는 것과 같다고 로버트 존슨은 말한다. 우리는 자신 안의 세종대왕, 신사임당의 숭고한 특질을 발견해서 실천하기보다는 멀리서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 P207

의식의 여정에서 고통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우리는 고통에서 결코 달아날 수 없는데, 아무리 달아나려 발버둥 쳐도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이중으로 불행할 뿐이다.(중략) 의식을 확대하는 작업에는 잔인하지만 변치 않는 법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고통을 수용할 때에만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피해보려는 시도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업의 쳇바퀴를 돌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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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ㅣ 펭귄클래식 2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펭귄클래식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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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었던 러시아 소설 중 보기 드물게 마음 편한 결말을 맞은 소설이 아닐까싶다.

아니, 물론 밝은 내용의 러시아 소설도 많겠지마는, 유명한 소설이 일단 죄와벌, 안나카레니나 이런 소설이다보니...


어쨌든 초반에 지역과 사람이름에 익숙해 지느라 약간의 장벽이 있었지만 중후반부부터는 아주 술술읽혔다. 주로 스토리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비교적 단순하여 읽는 데 복잡하진 않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좀 넓게 보자면 러시아 기득권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만, 서민의, 평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 어느 시대에건 반란은 이유없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들고 일어난 반란이 득세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가 평민들에게 살기 힘든 시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작중 반란을 일으킨 푸가쵸프는 몇 요새를 점령하며 모스크바에까지 진군한다. 한차례 진압을 당한 뒤에도 그는 죽지않고 살아남아 또 한번 반란을 꾀한다. 결국 잡혀 처형당하지만, 글쎄. 일개 농민인 푸가쵸프가 개인의 능력만으로 그렇게 득세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가 전하는 이야기, 그가 약속하는 미래가 일반 농민들, 살기 힘든 군인들에게 무척이나 달콤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편승은 곧 처참한 현실의 방증이었으리라. 

그러나 여전히 기록은 기득권의 몫이라 귀족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가 이렇게 전해지고, 예카테리나시대였다면 농민에 가까운 나는, 푸가쵸프가 아니라 오히려 귀족의 입장에 이입해 그의 처형에 마음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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