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이 속아온 거짓말
수지 K 퀸 지음, 홍선영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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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시선을 끈 것에 비해서는 그냥 쉽게 읽히는 임출육 에세이다.


사실 제목이 굉장히 시선을 사로잡은 데다가, 열거된 목차들은 하나같이 진실같은 거짓말들의 나열이어서 책을 빌렸건만, 내용은 목차와는 딱히 크게 상관없는 임출육 경험담 에세이였다. 


그래도 책을 읽은 입장에서 몇 자 남기고자 리뷰를 쓴다.


어쨌든 결론은... 임신출산육아는 졸라게 힘들지만 어찌저찌 해내게 되며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의 순간들이 추억이 되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얻게된다는 이야기이다...


머나먼 영국, 선진국으로 생각되는 영국이나 한국이나 임출육의 고단함과 괴로움, 특히 여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크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의의를 부여하고자 한다...


 

부처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무수한 죽음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렉시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내 삶이 끝나버린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하나의 삶이 끝났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5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부모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이 삶은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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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사표 - 며느리 사표를 내고 기적이 찾아왔다
영주 지음 / 사이행성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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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쉽고 쓰기는 어렵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임한 일상의 결과물일까? 나는 과연 내 인생을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면서 평생 제3자로서만 접했던 '며느리'의 당사자가 되었다. 이 단어에 따라붙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 때문인지, '며느리'라는 단어는 그 모양부터가 아주 못생겨 보이고, 어떨때는 모종의 멸칭처럼 보인다. 종종 보이는 '며늘아가'라는 단어도, '아가'라는 그나마 긍정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가져다 붙임으로써 쓰레기에 꾸역꾸역 리본을 달아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무리 쓰레기에 리본을 달고 꽃을 달아 장식을 했다 한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시대가 진짜로 변하기도 했다. 여전히 인터넷과 라디오와 떠들어대는 수많은 사연들에는 고부갈등이 단골소재로 등장하지만, 어쨌든 '옛날만큼' 고된 시집살이를 하는 집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랄까, 이 '며느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여전히 구리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이 찝찝한 어감의 단어가 내 역할이 된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딱히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방인이 되는 기분, 자연스럽게 을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느끼는 기분,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것이 나와 남편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 존나 구리다. 그리고 그것을 시부모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나의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인 엄마가 나를 나무랐다는 사실이 아주 존나게 구려서, 엄마한테 사과를 받았음에도 아직 구린 기분이 남아버렸다.


재차 말하지만 시댁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 '시댁'이라는 단어도 기분이 좀 그렇다. 시댁은 일반적으로 쓰면서 여자의 집은 왜 '처가'를 일반적으로 쓰는가? 둘다 존칭을 쓰려면 '처갓댁'을 일반적으로 써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물론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처갓댁은 맞춤법에 맞지 않다며 쓰려면 '처댁'을 써야 한다고 하겠지. 그럼 처댁을 쓰라고. 뭐가됐든 똑같이 존칭을 붙이란 게 내 요지다.) 그리고 사실 몇 번 가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몇번 가보지도 않은 사이에, 묘하게, 정말 대화에서 묘하게 을의 입장이 되는게 기분이 존나 오묘하다. 

일단 시어머니는 자식자랑을 많이 하신다. 은근한 자식자랑이다. 그리고 친구 자랑도 좀 하시고, 본인 집안 자랑도 하신다. (시아버지는 대화에 끼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것은 이해한다. 우리 엄마도 한 자식자랑 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점은, 이렇게 은근히 끊임없이 자식자랑을 하시면서도, 남편이 (눈치없게) 내 자랑을 하면 묘하게 대화의 주제가 바뀐다거나 시어머니가 못들은척 하신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러시는가 싶었는데 계속해서 그러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이지 웃음이 났다. 

그리고 두번째는 시댁에서의 묘한 을의 나의 입장이다. 요번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시댁에 하루 자고 왔는데 식사준비도 시어머니 혼자 하시고, 마무리도 어머니 혼자 하셨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가 남편보고 설거지라도 하라며 화를 냈다. 물론 우리 집이었다면 내가 나서서 엄마가 상차리는 걸 도와드리고, 아빠는 식후 과일을 손수 깎고, 밥먹은 후에는 내가 나서서 설거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남편의 집이 아닌가? 그러면 무엇을 하던지간에 남편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만약 남편이 나서서 시어머니를 도왔다면 나도 기꺼이 도왔을 것이다. 사회생활 n년차인 나에게 그만한 눈치는 있다. 하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안 했다. 식사를 준비할 땐 덥다고 방에 들어가 에어컨만 쐬었고, 식사 후에도 나서서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뭔가를 나서서 하는 건 웃기지 않나?? 심지어 남편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접시를 나르기는커녕 가만히 앉아만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마가 동생 집 마당에 잡초를 뽑을 때도 내가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가서 같이 도와드리라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장모님이 혼자 잡초 뽑는 걸 구경만 했다.(결국 남동생이 가서 도와드렸다.) 쓰다보니 열받는군. 이런 상황에서 더 열받는 건 엄마가 나에게 설거지도 하지 않았다고 나무랐다는 것이다. 후의 통화에서 나의 생각을 말하자 엄마도 세상이 바뀌었다며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 했지만 뭐, 그 때의 생각만 하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어쨌든 뭐, 이것은 책에 대한 리뷰인만큼 책에 대해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다.

내용 자체는 평이하다. 빡센 집안의 맏며느리로 있던 전업주부가 며느리역할에 사표를 내고 홀로 서는 과정에서의 성장을 기록한 에세이다. 시가에 갇혀 살면서, 외도까지 한 남편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았을지 가늠이 되진 않지만 뭐,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스스로를 위한 인생을 찾기 위해 홀로 선 용기와 성찰에는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몇 가지 동의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리뷰를 마무리하겠다.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상대 남자에게 떠넘기고 ‘사랑하니까 다 알아서 해주겠지‘하거나,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대의 야행성 동물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락하는 셈이다. - P113

그것은 시댁에서의 관계뿐 아니라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시댁의 여자들은 아버지나 남편의 뜻에 따랐다. 나는 시댁 여자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그러나 겉으로는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입으로만 그럴 뿐, 행동은 남편이 원하는 대로 따랐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 P163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어서 쓴다는 것이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남편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것을 계기로 남편과 자식의 불균형을 보게 되었고, 어머니처럼 남편에게 의존하는 삶은 보이지 않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P173

그리하여 자신 안의 황금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 안의 괴물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훌륭하지도 않지만, 그럴 능력도 없고 또 능력을 개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으로 자기 대신 다른 누군가가 영웅이 되어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까운 사람, 친구, 동료, 배우자에게 향하는데, 특히 자신의 아이들에게 큰 짐을 지우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으니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대신 이루기를‘ 자녀들에게 원한다. 그 이면엔 자신은 애쓰고 싶지 않다는 게으름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 금이 든 광맥을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개발 안 하는 것과 같다고 로버트 존슨은 말한다. 우리는 자신 안의 세종대왕, 신사임당의 숭고한 특질을 발견해서 실천하기보다는 멀리서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 P207

의식의 여정에서 고통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우리는 고통에서 결코 달아날 수 없는데, 아무리 달아나려 발버둥 쳐도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이중으로 불행할 뿐이다.(중략) 의식을 확대하는 작업에는 잔인하지만 변치 않는 법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고통을 수용할 때에만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피해보려는 시도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업의 쳇바퀴를 돌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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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펭귄클래식 2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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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읽었던 러시아 소설 중 보기 드물게 마음 편한 결말을 맞은 소설이 아닐까싶다.

아니, 물론 밝은 내용의 러시아 소설도 많겠지마는, 유명한 소설이 일단 죄와벌, 안나카레니나 이런 소설이다보니...


어쨌든 초반에 지역과 사람이름에 익숙해 지느라 약간의 장벽이 있었지만 중후반부부터는 아주 술술읽혔다. 주로 스토리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비교적 단순하여 읽는 데 복잡하진 않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좀 넓게 보자면 러시아 기득권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만, 서민의, 평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 어느 시대에건 반란은 이유없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들고 일어난 반란이 득세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가 평민들에게 살기 힘든 시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작중 반란을 일으킨 푸가쵸프는 몇 요새를 점령하며 모스크바에까지 진군한다. 한차례 진압을 당한 뒤에도 그는 죽지않고 살아남아 또 한번 반란을 꾀한다. 결국 잡혀 처형당하지만, 글쎄. 일개 농민인 푸가쵸프가 개인의 능력만으로 그렇게 득세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가 전하는 이야기, 그가 약속하는 미래가 일반 농민들, 살기 힘든 군인들에게 무척이나 달콤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편승은 곧 처참한 현실의 방증이었으리라. 

그러나 여전히 기록은 기득권의 몫이라 귀족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가 이렇게 전해지고, 예카테리나시대였다면 농민에 가까운 나는, 푸가쵸프가 아니라 오히려 귀족의 입장에 이입해 그의 처형에 마음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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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5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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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야욕 참회가 뒤섞인 역사소설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오르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족쇄이자 희망일까? 

각자가 목표로 하는 사다리의 높이와 위치가 다를지 몰라도 상승에 대한 열망 자체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숙명의 굴레인가.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 인간사회의 양상이 1814년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 사회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나폴레옹의 치하에서 신분상승의 격동을 목격한 쥘리앵이, 자신이 살고 있는 왕정복고의 시대에 대해 한탄하는 부분을 볼 때마다 '만적의 난'이 떠올랐다. 브장송의 신학교에서, 그저 배고픔을 면하게 된 가난한 농부의 자식들이 체제에 끔찍히 순종하는 모습은 1984 빅브라더 체제에 비판없이 순응하는 이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챕터마다 해당 내용에 상응하는 구절이 삽입되어있고, 군데군데 작가 갑자기 등장하여 본인의 변명을 하는 부분이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 외에는... 폭풍같은 후반부의 전개를 막 끝마친 지금 드는 생각은, 과연 마틸드의 명예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정말이지 쥘리앵이고 마틸드고 끓어오르는 격정과 젊음에 따라 튀어오르는 인물이다 보니 그들의 행동을 한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다. 마틸드는 과연 자식을 낳았을까? 아마 임신 후 대략 6개월이나 지났으니 낳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비밀 출산을 하였을까? 아니면 가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새로운 청혼자 후보와 결혼했을 것인가...


이 책은 신혼여행과 그 후 대략 한달 동안 나와 함께 하였다. 휴양지로 여행을 간 터라 죽치고 읽을 책이 필요하여 적과흑을 골랐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질 않아 완독하는데 대략 한달 조금 넘는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렇게 장편의 책을 읽고 나면 모종의 흐릿하지만 애달픈 노스탤지어가 몰려온다. 꼭 시간여행을 통해 1830년대의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돌아온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책의 결말이 비극적일수록 배가되는데 그동안 정들었던 인물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나니(그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드 크루아즈누아 후작의 죽음이다! 그는 마틸드의 돌아갈 거처가 되었어야 했는데!) 돌아갈 수 없는 도시를 영영 떠나버린 기분이 든다.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재판에서의 쥘리앵의 연설 아닐까. 거의 자살 선고와도 같았던 그 연설은 1830년대 사회의 핵심을 꿰뚫는 말이자, 여전히 현대사회에도 적용되는 문제를 꼬집는다. 해당 부분을 읽으며 나는 많은 여성들을 떠올렸다. 작은 재판장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잘잘못을 가름하는 권력의 중추에는 여전히 남자들이 많다. 기득권인 남성들. 여성들은 매순간 다양한 이유로 말미암아 이들의 앞에 서고, 편파적인 판정을 받으면서도 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사회에서, 지배와 피지배층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는 성별이 아닐까. 그리고 여전히 이 공식은 유효하며, 두 성별이 동등한 권력을 누리기엔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해 보인다. 여성판사로 가득한 재판장에서도 여전히 성범죄자는 지금처럼 깃털같이 가벼운 처벌을 받을 것인가. 권력의 핵심을 여성이 지배한 세상에서도 여성들이 지금처럼 성범죄에 노출되어 있을 것인가. 두 걸음 전진과 한걸음 후퇴가 반복되는 더딘 발전은 얼마나 더 쥘리앵과 같은 희생자들을 필요로 할 것인가.   

  

"배심원 여러분, 죽음의 순간에 부당한 경멸을 받을까 염려하여 발언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계급에 속하는 영예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본인은 자신의 비천한 운명에 반항한 일개 농부인 것입니다."
여기서 쥘리앵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조금도 환상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 죽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인은 온갖 존경과 찬사를 받아 마땅한 훌륭한 부인의 생명을 빼앗을 뻔했던 것입니다. 드 레날 부인은 내게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내 범죄는 잔혹한 것이며 또한 계획적인 것입니다. 배심원 여러분, 그러므로 본인은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 P373

그러나 내 죄가 좀 더 가벼운 것이었다 해도 사람들은 내 젊은 나이가 동정을 살 만하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를 통해 나와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을 징벌하고 그들을 영원히 의기소침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본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사교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담하게 끼어들려 한 젊은이를 말입니다.
여러분, 그 점이 바로 본인의 범죄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나는 나와 같은 계급의 동료들에게 판결받지 못하는 만큼, 내 범죄는 더욱 더 준엄한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본인의 눈에는 배심원석에 부유한 농민 하나 보이지 않고 오직 분개한 부르주아들만 있을 뿐입니다...... ."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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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싯다르타 (한글판+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205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진권 옮김 / 미르북컴퍼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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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던진 고뇌라는 질문


무척이나 동양적인 제목에 이끌려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부처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고타마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아니었고, 동명이인의 싯다르타라는 자의 삶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었다. 작품 해설을 보니 해세 본인의 삶이 굉장히 투여된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야기가 얼핏 있었다. 그 말은 결국 이 책 또한 삶의 고뇌에 대한 절대 진리라기보단, 헤르만 헤세가 본인의 삶을 통해 찾아낸 본인만의 대답을 그려낸 것이란 얘기다. 아니 사실, 고뇌에 대한 절대 진리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다. 각자의 생이 던진 질문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만들어 가는 것이 삶이니까. 모두에게 통용되는 진리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굉장히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고 아리송한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말은 불신하고 사랑할 수 없지만, 사물들은 사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싯다르타의 말을 듣고 있자니, 결국 나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지 않나 싶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한참 고민하던 때, 잘 읽지도 않는 자기계발 서적까지 들추어가며 생을 고민하던 때, 수많은 명강사의 가르침과 명언들을 핸드폰에 저장하며 흔들리던 때를 보내다가 문득 든 생각이 이 모든 것은 결국 흩어져갈 '말'에 불과하고 생은 현재에 있다는 것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언들, 격언들, 가르침들을 꽁꽁 가슴에 묶어두고 싶었지만 그것들은 결국 살짝 구기면 바스러져버릴 말들이었고 중요한 것은 내 생에 대하여 내가 세울 진리이자, 태도였다.

 

이것은 내 삶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삶의 원칙을 세우게 되면, 그 외의 것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태도로, 내가 가장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원칙을 세운다면, 여러 명언을 가슴에 품지 않아도 충분히 스스로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참으로 단순하고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결국 방황의 시간이 없었다면 그만큼 스스로에게 설득력과 진실함을 지니지 못했을 나의 결론이다. 


현재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모종의 약소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삶이 크게 변화하지는 않는 듯싶다. 그저 덜 신경쓰고, 덜 흔들리고, 쉽게 기뻐하고, 쉽게 털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이 삶이 언제까지 얼마큼의 평온함을 내게 가져다줄진 모르겠지만... 부디 나도 생의 쇠락, 나의 쇠락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쇠락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상인들이 장사하는 것을, 귀족들이 사냥하러 가는 것을, 상을 당한 이들이 고인들 때문에 통곡하는 것을, 기생들이 몸을 파는 것을, 의사들이 병자들을 위해 애쓰는 것을, 승려들이 파종하는 날을 정하는 것을, 연인들이 사랑하는 것을,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보았다. 그가 보기에 모든 것이 가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모든 것이 악취를 풍겼다. 모든 것이 거짓의 악취를 풍겼으며, 모든 것이 의미 있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썩어 없어질 것이었다. 세상은 쓰고, 인생은 번뇌였다. - P21

오, 고빈다! 나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허비해 왔고, 아직도 그것을 끝내지 못하고 있네.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그런 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네. 오, 나의 친구! 오직 깨달음이 존재할 뿐이지. 그것은 어디에나 있네. 그것은 아트만이야. 그것은 내 안에 있고, 자네 안에 있고, 모든 존재 안에 있네. 그래서 나는 깨달음 앞에서는 알고자 하는 것, 배움보다 더 사악한 적은 없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네. - P29

이 세상이 선한지 악한지, 이 세상에서의 삶이 괴로운지 즐거운지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단일성, 모든 사건의 연관성, 크고 작은 모든 것이 동일한 흐름과 법칙, 생성과 소멸되는 일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이것이 당신의 고매한 가르침에서 밝게 드러났습니다. - P46

"저는 손님께 뱃삯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님은 다음번에 제게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싯다르타가 명랑하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저는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강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사마나 당신 또한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당신의 우정을 뱃삯으롱 하겠습니다. 신들께 제사를 올릴 때면, 잊지 말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P65

싯다르타는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고, 많이 들었을 뿐 별로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말라의 말을 기억하면서, 그는 결코 상인에게 종속되지 않았다. - P87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또한 아무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랑을 기교로써 행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어쩌면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인배들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비밀일 것입니다." - P97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그는 생각했다.
‘모두 스스로 맛보는 것은 좋은 일이야. 속세의 쾌락과 부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어렸을 적에 배웠다. 나는 그것을 오래전에 알았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것을 제대로 체험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단지 기억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마음으로, 위로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 P127

아니, 진실로 구하는 자, 진실로 찾고자 하는 자는 아무런 가르침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미 찾은 자, 그 사람은 그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고, 모든 길, 모든 목표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영원 속에 살면서 신성한 것을 호흡하는 수천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결코 다를 바 없었다. - P144

당신이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만은 번뇌와 고통과 환멸을 겪지 않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이 그런 것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아들을 위해서 열 번을 죽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아들의 운명을 조금도 덜어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 P158

그는 카마스바미를 보았고, 하인들, 떠들썩한 술자리, 노름꾼들, 악사들을 보았고, 새장 속에 갇힌 카말라의 쏙독새를 보았고,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살려 냈고, 윤회를 호흡했고, 다시 한 번 늙고 피곤했으며, 다시 한 번 혐오감을 느꼈고, 다시 한 번 자신을 없애고 싶은 욕망을 느꼈고, 다시 한 번 그 성스러운 ‘옴‘의 힘으로 자신을 치유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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