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먼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7
에벌린 워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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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줌의 먼지와도 같은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에 매달려야, 아니 매달리지 말아야 하는가?


아무래도 1930년대 전후 영국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등장인물들의 도덕관념이 상당히 박살나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는데 누가 봐도 부도덕적인 상황(예를 들면 불륜)이 굉장히 쉽게 용인되고, 그것을 건조하게 전달하는 문체가 그 자체로 굉장히 시니컬하고 풍자적인 느낌을 준다. 신파는 없고 그저 사건의 전개만 존재할 뿐이다. 어떤 비참한 일을 마주해도 주인공들은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비극은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축소되어버리고, 그래서 상황의 아이러니함은 더욱 극대화 된다. 


얼핏 보면 주인공인 토니가 제일 멀쩡해 보이지만...사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결함되어 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 앞에서 토니는 오히려 사건의 원인이 된 여자의 안위를 신경쓰고, 마찬가지로 비보를 들은 브렌다는 그 순간 불륜남의 건강을 염려한다. 불륜남인 비버는 자신의 애인에는 관심이 없고 애인의 인맥과 명성을 등에 업고 상류사회에 얼굴을 내비칠 기회만 노리며, 토니의 절친이라던 조크는 마지막에 혼자가 된 토니의 부인, 브렌다와 결혼해 버린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읽다 보면 참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전후사회에서 그동안 소중히 여겼던 가치관과 삶의 붕괴를 겪었기에 이렇게 인간사회를 냉정히 묘사하게 된 것일까?


기묘한 지점은 소설의 후반부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어 토니의 정글 탐사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사건전개 중심으로 설명하던 나레이션도 갑자기 후덥지근하고 빽빽한 정글에 대한 묘사로 페이지를 채워나간다. 결말은 가히...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가까스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토니는 고립된 정글에서 벗어나고자 애쓰지만, 책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미치광이) 토드에게 잡혀 평생 찰스디킨스를 읽어주며 살아야 할 운명을 맞이한다... 정말이지 마지막 장면은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토니가 탈출의 꿈에 젖어 방심해 있을 때, 토드는 독한 술을 토니에게 먹여 이틀간 잠재워버리고 그 사이에 토니를 찾으러 온 사람들은 토니를 만나지 못하고 토드로부터 토니가 죽었다는 소식만 듣고 돌아가버리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번째로는, 작가는 왜 이런 결말을 썼을까 하는점이다. 본인의 결혼생활을 반영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던데, 부인의 외도로 본인의 결혼생활이 망가지는 것을 목격한 후 그냥 미지의 곳 어디에서 생을 끝내고 싶은 마음을 소설 속에 녹여낸 것일까? 진짜 후반부는 묘하게 생동감이 도는데  알고 보니 작가가 언젠가 오지에 고립되었을 때 적었던 기록을 토대로 풀어낸 것이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토니이다보니 토니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의 패착을 꼽아보자면 아무래도 지나가버린 유산에 너무나도 집착을 한 것이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보내온 헤턴 저택에 굉장히 집작하며 수입의 상당부분을 그저 저택을 유지하는 데 쏟아붓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입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브렌다는 런던에 가려면 가장 저렴한 날의 3등석 기차를 타야 하는 등 그다지 윤택한 삶을 살지 못한다. 브렌다는 헤턴 저택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며 시골 생활을 지루해 하지만 토니는 자신의 삶에 너무나 만족하고 심취한 나머지 부인의 그런 고충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나 집착하던 헤턴저택이라는 지난날의 유산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브렌다가 떠난 후) 토니에게 삶의 충만함도 안겨주지 못한다. 이런 덧없는 느낌은 소설 결말 부분에서 극대화되는데, 대관절 밀림 오지에서 고립되었을 때 영국의 대저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두번째 의문점은 브렌다가 사랑하던 아들과 브렌다의 불륜남의 이름이 똑같이 "존"이라는 점이다. 소설이 작가가 인위적으로 구성한 세계임을 감안할 때, 둘의 이름을 똑같이 지은 것은 작가의 어떤 의도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둘 다 소설 속에서 브렌다가 (유일하게) 사랑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끔찍하다고 여기는 헤턴 저택에서 브렌다는 아들인 존만 보고 살아가다가, 비버와 우연히 마주치고나서는 비버를 좇아 헤턴저택을 거의 찾지 않는다. 아들 존만이 가장 소중했던 삶이 불륜남 존 비버가 가장 소중한 삶으로 옮아가버린것이다. 아들의 비보를 들었을 때, 브렌다는 하루종일 불륜남 존의 건강을 걱정하다가 그가 무사한것에 모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의미 없이 그렇게 지은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었고, 무척이나 몰입감 있게 읽었다. 재미있는 소설을 마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근래 드문 만족스러운 여정이었다.

 

"브렌다 부인은 신중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국왕 대소인(代訴人)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 .게다가 돈 문제도 있고요. 현재 합의 내용에 따르면, 브렌다 부인은 죄가 없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법정에서 라스트 씨에게 상당한 금액의 위자료를 청구할 권리를 갖는다는 점은 아시는 거지요?" - P199

인디오 남자 한 명은 총신이 하나인 전장식(前裝式) 장총을 갖고 있었고 다른 몇 명은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에 두른 붉은 무명천을 제외하곤 완전히 알몸이었다. 여자들은 지저분한 옥양목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래전에 어느 순회 설교자가 나눠 준 것을 이럴 때 입으려고 간직해 두었던 듯했다 그들은 어깨에 버들고리를 지고 거기에 달린 끈을 이마에 걸어서 무게 분담을 줄였다. 무거운 짐은 모두 여자들이 이 바구니에 담아서 운반했다. 거기에는 그녀들과 남편들이 먹을 식량도 포함돼 있었다. 거기다 로사는 포브스 씨와의 친교의 유물인, 찌그러진 은 손잡이가 달린 우산까지 챙겨 왔다. - P270

마침내 그는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섰다. 그의 눈앞에는 문이 여러 개 있었고 그의 도착을 축하하는 트럼펫 소리가 성벽을 따라 울려 퍼졌다.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보루에서 보루로 전해져서 마침내 나침반의 네 끝 점에 이르게 되었다. 아몬드 꽃잎들과 사과 꽃잎들이 공중에 흩날렸다. 꽃잎들은 여름 폭풍우가 지나간 뒤 헤턴의 과수원에서처럼 온 길을 뒤덮었다. 금박을 입힌 큐폴라와 설화석고로 만든 첨탑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앰브로즈가 알렸다. "여기 그 도시를 대령하였나이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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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브 연락 없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0
에두아르도 멘도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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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 소설을 진정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작가는 에스파냐에서 유명한 소설가이고, 이 책은 작가의 책 중 제일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라는데, 당최 풍자소설의 재미를 느낄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내 지식의 한계에 따른 것이기에! 


에스파냐, 특히 카탈루냐에 대한 그 어떠한 배경지식도 없는 나에게 이 소설은 그저... 거의 '고도를 기다리며' 급의 혼란함만을 남겨주었달까.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모르는 채 계속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덧붙이자면, 주인공을 외계인으로 설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튀어나온 여성혐오적 시각이 책에 대한 몰입을 상당히 방해했다. 남성 작가의 한계인가...)


책을 덮고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추러스이다. 추러스...먹어야 겠다.

10:15 우리 A그룹이 들어간 사무실이 단출하다.테이블 앞에는 고지식하게 생긴, 턱수염이 하얀 신사가 앉아 있다 그가 세상을 살면서 둘도 없는 호기를 잡는 일은 어렵다면서 자기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환상을 품지 말라고, 품질과 가격을 동시에 충족하고 싶은 이중성을 단념하라고 강변한다. 나아가 이승에서의 삶이란 높은 차원에서 볼 때 기껏해야 눈물의 계곡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런데 한참을 떠들어 대던 그가 느닷없이 가짜 턱수염을 떼서 휴지통에 내던져 버린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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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의 멸종 - 기온이 1도씩 오를 때마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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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것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구체적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기후위기와 저출산을 동시에 떠들어대는 사회 속에서, 나는 양측의 메워지지 못할 깊은 골을 느끼곤 한다. 참 재미있는 점은, 기후위기를 더 걱정해야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기후위기에 관심이 없고, 상대적으로 관련이 덜한 사람들만이 목청높여 소리치고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느끼기에, 자녀가 있는 사람들 또는 자녀 계획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기후위기에 관심을 갖고 환경보호를 실천하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이들은 누구보다 무관심하다. 저출산의 위험을 논하고, 싱글세를 주장하는 이들은 아예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같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해마지않는 자녀가 살아갈 삶이 걱정되지도 않는 걸까? 아니면 과학자들이 무슨 초능력이라도 부려서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믿는 걸까? 


그런 것 같다. 기후위기에 대해 사람들과 몇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미래에 누군가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기대라기보단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기후위기 문제를 마치 남의 문제처럼 치워버리고 있었다. 참으로 우수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그렇게 대답을 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하찮은 탈모 문제조차 극복하지 못한 과학이 무슨 수로 전 지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것은 전지구적인 협력이 전제되어야하는 데다가, 삶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하는 어마어마한 일인데 말이다. 현실은 영화 '돈룩업'보다 더 답답하고 잔인한 것이다. 현재 자신의 삶만 신경쓰면 되는 무자녀 싱글들이 기후위기에 대해 목소리 높이는 것을 보면 답이 없는 현재 상황이 개탄스럽기만 하다. 


2023년 IPCC 6차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전문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대로라면 2040년 이전에 지구온도가 1.5도 상승할 것이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 우리는 1.5도선을 제지하지 못할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해 알면 알 수록, 책을 더 찾아보면 찾아 볼 수록 어쩔 수 없이 단념하게 된다. 그 이유는 지금 당장 경종을 울리는 수많은 책과 뉴스에도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하더라도 너무 느리게 변화하는 사회에 있다. 작년, 빌게이츠가 쓴 'How to avoid climate disaster' 이란 책을 읽었다. 책은 코로나때 쓰였고, 서두에서 빌게이츠는 기후재앙을 피하기 위해선 지금 당장 매년 배출중인 온실가스 50억톤을 당장 0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했다. 절반도 아니고 0이다. 50억톤이 말이다. 그리고나서 몇 년이 지났고, 미국은 트럼프가 집권하고 한국은 윤석열이 집권했다. 기후를 위한 정책은 뒷전이 되다 못해 음모론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미국 대선 열기가 뜨거운 지금, 미국은 트럼프의 재집권을 앞두고 있다...


사실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지 모르겠다. 아니 지금은 희망을 찾을 때가 아니라 단념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그 죽는 시점이 조금 앞당겨지고, 조금 더 고통스럽고, 조금 더 구체화 되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종말을 눈앞에 둔 지금, 미래에 대한 큰 꿈 없이 그저 하루하루 한번 더 웃고 한번 더 즐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부디 내 끝은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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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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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바다에서 오랜만에 허우적 거리면서 헤엄치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책장을 넘기는 내내 의무교육과정에 국영수처럼 과학도 필수과목으로 지정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분개와 내 처참한 교양과학 지식 수준에 대한 절망이 번갈아 찾아왔다. 


유전자에 대한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이기적 유전자'였으니 말 다했지... 그동안 매체를 통해 가볍게 유전자를 접하면서 나는 은연중에 키가 크게 하는 유전자, 공부를 잘하게 하는 유전자 같은 것들이 거의 일대일 매칭으로 존재하는 줄 알았다. 거기에 더해 '표현형'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해보아서 그제서야 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다음 책이 '확장된 표현형'이었는지 간신히 이해하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생물학자 치고 책 제목을 감성적으로 잘 짓는군, 하고 생각했었다.) 


이 책의 한장 한장이 내 무지를 깨주는 지식의 불빛이었으며 확실히 이 책을 읽기 전 나와 읽은 후의 나는 같다고 할 수 없다. 이번 독서를 통해 DNA의 메틸화, 히스톤의 아세틸화 등 새로운 용어를 배운 것도 큰 수확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유전자가 사람의 표현형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가장 유익한 부분이었다. 유전자의 발달은 굉장히 복잡한 매커니즘이며 처한 맥락과 경험에 많은 영향을 받는 다는 것...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간략화 해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그렇지 않다. 사건을 간략화 해서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현실의 왜곡도 상당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투브에서 유전에 대한 한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아들을 낳은 일부 모체의 뇌에서 y 염색체가 발견 된 것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것은 임신을 하게 될 경우 남편의 염색체가 모종의 매커니즘을 통해 임신한 산모의 bbb를 뚫고 산모의 신체에 염색체가 일부 남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회수를 뽑기 위함이었겠지만 제목도 제목이거니와 해당 분야 교수가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래서 남자를 잘 만나야 된다는 등, 이래서 아들을 낳은 엄마가 남자처럼 변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전의 생물학적 지식이 전무한 멍청한 나였다면 그 이야기에 십분 공감하며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기본적인 유전자의 작동에 대해 이해하게 된, 이제는 약간의 상식을 갖춘 나로선 고작 염색체 하나로 인해 표현형을 넘어선 사람의 가치관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너무 경악스럽게 다가왔다. 아무리 대중이 멍청하기로서니 저렇게 약을 팔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그 우매한 대중 중 하나였는데! 심지여 아직도 상식의 많은 부분에 구멍이 나 있어 나도 모르는 새 경도당하고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다시금 값진 책은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들고 돌아보게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살면서 이런 책들을 마주치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지은이 데이비드 무어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수월하게 한국어로 습득할 수 있게 해 주신 정지인 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만약 우리가 염색체를 이루는 DNA 뭉치에서 끄트머리를 붙잡고 한 가닥 뽑아 올린다면, 이 가닥은 엉켜 있는 털실 뭉치에서 뽑아 올린 2합사 털실처럼 미끈한 일직선 모양이 아닐 것이다. 뽑혀 나온 DNA 가닥은 실패 같은 것에 단단히 감겨 있는 것처럼 뭉친 마디가 보이고, 그런 다음 이어지다가 다시 또 그런 꼬이고 뭉친 마디가 수없이 반복되는 형태일 것이다. 이 ‘실패‘는 다른 커다란 분자들 몇 개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 P82

DNA 가닥이 둘둘 감겨 있는 이 ‘실패‘는 히스톤이라는 큰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히스톤 역시 단백질이며, 여덟 개의 히스톤이 모여 하나의 ‘실패‘를 이룬다. - P83

염색체가 DNA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염색체 안에는 DNA 외에 히스톤이 함께 존재한다. 실제로 염색체를 이루는 ‘물질‘, 즉 염색질에는 DNA보다 두 배 많은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단백질은 주로 히스톤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염색질 중에서도 DNA가 아닌 이 분자들이다. 염색체의 비DNA 요소들은 실제로 우리의 DNA, 다시 말해 유전자와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있으므로, 글자 그대로 ‘유전자 위에 있다‘라는 의미에서 후성 유전적이다.
- P83

몇몇 종류의 경험은 사람에게 분명히 후성유전적 영향을 준다. 아동 학대 경험은 GR 촉진유전자와 세로토닌 수송체 촉진유전자의 메틸화 증가에 영향을 미치고, 태내에 있을 때 가정폭력에 노출된 것은 GR 촉진유전자의 메틸화 증가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중략) 이 모두를 종합해볼 때 드러나는 증거는 다양한 사회적 스트레스 요인이 우리의 후성유전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 영향이 때로는 수년간 지속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 P196

이러한 부계 연구에서는 경험의 효과가 아비의 정자를 통해서만 새끼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포유류 수컷은 태아를 배고 있지 않고 따라서 태아에게 출생 전 환경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연구가 몇 건 이루어졌는데, 그중 한 연구에서 실험자들은 교배하기 전 달에 수컷 생쥐에게 특정 음식을 뺀 먹이를 먹였다. 이 먹이 조작은 새끼들의 혈당 수치가 비정삭적으로 낮아진 결과로 이어졌는데, 이 발견은 아비의 영양 경험이 정자의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에 따라 새끼의 태아기 환경과 관계없이 새끼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시사한다. - P327

특히 언론은 환경적 요인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특정 질병 상태나 작은 키 같은 표현형을 독자적으로 초래할 수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후성유전적 결정론으로 슬그머니 빠져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식의 글은 수십 년 동안 생물학에 들러붙어 있던 "한 표현형을 담당하는 유전자"라는 식의 착각, 즉 특정 표현형을 지시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가정과 똑같은 착각을 영속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글들의 유일한 차이는 ‘유전자‘ 대신 후성유전적 성격이 가미된 ‘유전자 스위치‘라는 단어를 쓴다는 점뿐이다. 하지만 키 같은 특정 표현형이나 질병은 유전자나 유전자 스위치 같은 단 하나의 요인으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간 상호작용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생한다...(중략) 표현형의 발달은 후성유전적 표지가 (물론 다른 발달 관련 요인들과 함께) 속해 있는 맥락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 P363

교훈1: DNA 혼자 형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형질들은 유전과 후성유전, 환경이라는 다양한 요인들이 통합된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작동하며 상호작용한 결과 발달한다. 형질은 단 한 가지 요인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존재다. 발달과학자들은 수십년 전부터 유전자 결정론이 발달의 현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잇었다. 오히려 우리가 현재와 같은 존재인 것은 우리의 발달기 동안 조상에게 물려받은 다양한 자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때문이며, 발달이 일어나는 맥락도 그 자원의 일부다. 맥락에는 우리가 수정될 당시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자 이외의 생물학적 요인들 그리고 삶을 영위하는 문화적 환경과 물리적 환경도 포함된다. 이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스스로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착각을 몰아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이다. - P407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발달하는 동안 속해 있는 맥락에서 심층적인 영향을 받으며, 어느 정도는 그 맥락을 통제할 힘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줄 알고 깨어 있으며 성취하는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후성유전학의 위상이 높아지면 모든 이에게 이런 메시지가 전해질 것이다. ‘당신이 생물학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분투하라. 아이들을 주의 깊게 보살피고 돌보아라. 환경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구축하며, 지속적인 건강과 발달을 증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라. 중요한 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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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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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까지 발현되는 인간중심 사고방식과 상상력의 한계



SF장르로 분류된 콘텐츠를 가만히 보다보면, 약간의 상상력만 가미되어 있어도 SF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안에는 정말 한 범주에 묶을 수 없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어서 그 중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고르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 기본적으로 흥분하지만, 이런 류의 작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이냐 하면, 인간을 닮은 지적인 외계생명체가 등장하는 종류이다.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뚜렷하다. 나는 그 인간의 시혜적인 마인드가 싫다. 이미 일상 생활속에서, 수많은 매체에서 접하고 있는데 그걸 내가 좋아하는 장르에서까지 그 기만적인 모습을 굳이 보고 싶지 않다. 한편으로는 작가의 한계가 뚜렷이 보여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구체적으로 따져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외계 지적인 생명체가 인간을 웃도는 지적능력 또는 인간은 가늠할 수 없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전수준이 인간보다 뒤쳐졌다는 설정이 너무 웃기고 기만적으로 보인다. 작중에서 오필리아는 <종족>의 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지만 <종족>의 파란망토는 오필리아가 놀랄 정도로 정확히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그들 <종족>은 인간의 발명품을 이해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별다른 가르침 없이 그들은 기계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고, 소통하고, 습득한다. 이것부터가 굉장히 모순적이지 않은가? 지적인 능력은 인간을 상회하고, 인간은 알 수 없는 자기들끼리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소통능력을 지녔는데 인간보다 발전 수준이 낮다는 사실이?? 굉장히 기만적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웃긴 점은 대개 이런 지적생명체를 구상해내는 작가들은 그들에게 뭔가 인간이 가지지 못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평등이나 존중이나.. 뭐 그런 가치들 말이다. 이런 가치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내말은, 이렇게 이상적이고 능력도 인간을 상회하는 외계생명체가 어떻게!! 인간보다 발전 속도가 더뎌서 더 우매한 생명체인 인간이 이들에게 가르침을 선사하는 그런 우스꽝스런 그림이 그려지냐 이말이다. 우리로 치환해서 보자면, 우리보다 추론능력이 떨어지는 침팬지가 발명해낸 뛰어난 문명을 우리가 감탄하며 침팬지들로부터 문명을 배우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얼추 그림이 비슷할것이다. 우습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나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읽을 때도 약간의 조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누구냐 그... 갑각류를 닮은 외계생명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결국 눈이 보이지 않고 방사선인가...할튼 우주의 필수 요소를 이해하지 못해 그들의 우주발전 기술에 결함을 보였다. 그걸 주인공은 보완해주며 가르쳐줬고. 이렇게 우주에서조차 우리가 최고로 발전했을거란 그 근거없는 자신감에 나는 상당히 거부감이 든다. '지구에서도 우리가 최고의 지적 생명체이니 우주에서도 마찬가지일거야! '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게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계지적생명체의 등장이 아닐까 한다. 웃기는 점은 이런 그 인간 스스로에 대한 오만함에 대한 보완책인지 뭔지 작가들은 대체로 이런 외계생명체에게 우리에게 없는 특수한 능력과 사상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작품이 더 우스꽝스러워지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금 말하지만 인간보다 지적능력이 우수한데 인간보다 발전이 더디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 이건 마치 아이큐 50인 사람으로부터 아이큐200인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고 모순적인 상황과 다름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이 아무런 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긴 했다. 결국 작가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가치, 늙고 나이든 여자를 천대하는 것에 대한 반박과 그 후세대를 양육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 등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외계생명체를 도입한 부분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좀더 아쉬운 부분도 있다. 작가들은 대체로 SF란 장르를 통해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가치와 이들에 대한 환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가치의 중요성에 비해서 그닥 내용이 신선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도는 좋았다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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