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링 마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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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세계와 반복되는 일상, 그 안에서 삶의 의미 찾기


어떤 SF 소설들, 그러니까 지구의 종말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을 가만 읽다보면 현실에서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종말'을 통해 오히려 깊고 투철하게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를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소설들은 세상을 뒤집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 삶 속에 너무 깊게 침투해있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해 준다. 


'단절' 또한 그런 소설이다. 선 열병에 감염된 사람들, 황량해지는 도시, 죽어가는 사람들 만큼이나 죽어가는 도시의 모습. 그리고 이 모든것을 극대화 해주는 것은 기억 회상을 통한, 과거의 찬란했던 모습과의 대비이다. 


어쩌면 '단절' 이라는 것은, 선 열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주는 유일한 예방책이 아닐까? 주인공 캔디스가 선열병에 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을 수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그가 거의 단절의 인간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애착 내지는 집착, 향수를 느끼는 것들과 단절되었기 떄문일 수도 있다. 우선 그의 뿌리부터 살펴보자. 캔디스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단절을 적극적으로 쟁취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어렸을 적 고향에서 있었던 일을 캔디스에게 말해 주었는데 캔디스는 이것을 제 아버지가 마침내 고향인 푸저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냈고 즈강이 고향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꼈기에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어머니 쪽은 어떤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비자발적으로 고향으로부터 단절된 인물이다. 아버지 즈강이 자신의 성취를 위해, 적극적으로 고향으로부터 단절되었다면, 어머니 루이팡은 미국에 대한 애매한 환상과 배우자인 아버지의 설득, 그리고 현실적인 여건 등으로 즈강보다는 덜 적극적으로 고향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 이유로 루이팡은 계속해서 중국 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딸인 캔디스에게도 계속해서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이어주고 싶어했다. 


이제 우리의 주인공, 단절의 인간화 캔디스를 살펴보자. 중국계 이민자로서, 캔디스는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바다 건너 중국에 있다. 그리고 문화적, 거리적 차이로 친척들에게 그다지 많은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다. 캔디스는 아버지를 잃었고, 4년 후에 어머니도 잃었다. 부모님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만한 물건들은 모두 창고 속에 처박아 버린 채, 캔디스는 정처없이 뉴욕 거리를 걷고 또 걷는다. 완전히 고립된 캔디스에게 조너선이라는 연결고리가 생기는가 싶었지만, 선 열병이 뉴욕을 집어삼키기 직전 조너선과도 헤어진다. 그가 남기고 간 것이라곤 머그컵 안에 든 교정유지장치 뿐. 만약 선 열병을 촉발시키는 게 곰팡이 포자 뿐만 아니라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강한 향수라면, 캔디스 만큼 선 열병에 걸리기 어려운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슬픈 이야기이다. 선 열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 기억으로부터, 아니 기억이 불러오는 강한 향수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자신을 뒤흔들만 한, 따뜻하면서도 가슴 깊이 울렁이는, 그런 과거의 기억이 없다는 의미니까. 아니면 적어도 그런 기억상자를 열어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속 깊은 곳에 그 기억상자를 묻어버렸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렇게 괴롭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있을 때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평화로운 내면을 경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반복되고 익숙한 루틴이 주는 평안함 속에서, 그들의 향수가 촉발시킨 그리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을 테니까.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시카고로 간 캔디스는 결국 선 열병에 걸렸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미국 그 어느 지역에도 강렬한 어릴적 향수를 남기지 못한 캔디스는 소설 후반부 조나선의 기억을 제 기억처럼 체화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기억을 자신의 것이라 스스로 믿어버린 것처럼. 조나선이 시카고에 대해 느꼈던 강렬한 애착과 그리움, 평안한 감정 등등을 캔디스도 곧 느끼게 되겠지. 그리고 그것은 캔디스에게 이미 내재된 선 열병의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지난해부터 조너선은 뉴욕에서의 삶에 부쩍 강한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시, 뉴욕이라는 빌어먹을 도시, 진정성이라고는 없이 허울뿐인 데다가 실체 없는 매력으로 사람을 홀리는 지루하고 답답한 도시 등등 운운하며 끝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조너선이 보기에 모든 것이 시눕ㄴ의 상징이었고 모든 일에 과도한 비용이 들었다. 트렌드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소비자도, 유행하는 디저트니 겉치장만 요란한 미술 전시회니 새로운 콘셉트 스토어니 하는 것들을 경험하겠다고 블록마다 긴 대기 줄을 마다하지 않고 서 있는 소비자도 지나치게 많았다. 우리는 전부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선택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그러니까 나도 포함된 우리. - P21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회사원 생활을 유지하면서 달빛이 고와너스 지역을 물들일 때마다 카메라로 사진이나 찍으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그런 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처럼 삶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시간을 흘려보내며 사는 사람이었다. - P21

그렇다면 가족의 소유물이 남아 있는 창고에 가 보게 되려나. 그런데 그곳은 그저 차디찬 상자 모양의 보관 시설일 뿐이다. 언젠가 솔트레이크시티 근처에 가닿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아마 계속 가던 길을 갈 것이다. 추억을 회상한다는 것은 몹시도 우울하고, 영혼이 산산조각 날 만큼 몹시도 슬픈 일이다. 과거는 일종의 블랙홀로, 현재로 침투해 들어오는 과정에서 상처를 남기며 과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니 계속 움직여야만 한다. - P198

나는 위아래가 거꾸로 된 애슐리의 눈을 쳐다보았다. 애슐리는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나를 인식하지도 못했다. 동공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 눈빛은 뭐랄까, 누군가가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거나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을 때의 눈빛과 가장 흡사하다. - P211

시카고에서는 밀워키 길에 있는 빨래방 위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조너선이 말했다. 도심으로 나갈 때면 아파트 바로 앞 정류장에 서는 56번 버스를 탔다고 했다. 이따금 그저 출퇴근만 하면서 한 거리 위만 오가는 느낌도 들었다고 했다. 평일 밤과 주말에는 글을 쓰고 평일 아침이 오면 출근을 하며 지냈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그길로 일터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 P227

타임스스퀘어에 모인 군중이 나를 맞이했다. 뉴욕은 정말 대도시였다. 뉴욕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다는 착각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선택지는 저녁 식사 자리의 앙트레와 칵테일, 나이트클럽에서 내는 봉사료처럼 무언가를 소비하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었다. 길거리 곳곳의 대형 체인 매장들도 묵직하게 울리는 베이스 소리와 화려한 조명으로 쇼핑을 부추겼다. 의류제조업체가 해외로 이전하면서 몇 블록 정도 되는 크기로 규모가 줄어든 가먼트 지구에서는 도매상점들이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서 수입한 작물과 장신구들을 판매했다. - P259

루이팡이 입은 남색 셔츠 드레스는 푸저우에서라면 세련돼 보였을 옷이었지만, 데님 미니 스커트와 어깨끈이 가느다란 드레스를 입은 무리 속에 있으니 지극히도 보수적인 차림새로 보였다.
영어가 유창했더라면, 수줍어하며 머뭇거리는 태도를 극복할 수 있었더라면 루이팡은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꺼이 털어놓았을 터였다. 푸저우에 살 때 공인 회계사로 일했다는 얘기도, 담당 고객 중에 다양한 지자체 공무원들이 있었다는 얘기도 했을 것이었다. 여동생들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시골로 쫓겨나 수년간 단순 노동을 해야 했단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자신은 푸저우에 남았을 정도로 중요한 일을 했다는 얘기도. - P282

난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단,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난 널 너무 잘 알아. 넌 이상주의자처럼 사는 사람이지.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잖아. 일정한 수입도, 의료보험도 없으면서, 툭하면 일도 그만두고 넌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볼 때 넌 철두철미하게 자린고비처럼 아끼고 아껴가며 볼품없고 값싼 삶을 살고 있을 뿐이고 그런 삶 역시 자유는 아니야. 넌 외접원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어. 불법 복제 영화를 보고 1달러짜리 조각 피자를 먹으면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 그 변두리만 돌고 도는 거지. 예전에는 열정적으로 자기 신념을 붙들고 사는 너를 - 고결하다고 생각했고 - 동경했었지만, 그런 네 삶의 방식을 5년간 지켜보면서 난 조금 바뀌었어. 이 세상에서는 돈이 자유야. 이탈하는 건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야. - P335

나는 언제나 뉴욕의 현실보다 뉴욕의 신화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인간이었다. 뉴욕에 그렇게나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도 어떤 것의 본질보다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더 사랑해서였다. - P416

블로그 독자들이 남긴 요청을 나는 내가 주어진 임무로 삼았다. 임무를 완수할 때마다 그 결과를 블로그에 게시했다. 요청 사항을 지역별로 분류한 다음 임무 수행 일정을 계획했다.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날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기쁨이었다. - P417

어쩌면 오늘이 계약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잠재의식이 나를 밖으로 끌어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더 이상 스펙트라와 맺은 계약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게 과연 중요하기는 한 걸까? 아빠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일은 그 자체가 보상이란다.‘ 일은 그 자체로 위안이기도 했다. - P440

캔디스 씨는 젊어요, 마이클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어쩌면 캔디스 씨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단지……나는 당황한 나머지 쩔쩔매며 적절한 말을 떠올려 보려 했다. 저는 단지 제 삶의 폭이 이렇게 순식간에 좁아 드는 게 내키지 않아서요. 일 자체는 괜찮습니다만, 여기에 평생 몸담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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