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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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존재에 대한 고뇌를 포착해냈음에도 불구

남성작가로서의 사상적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


현대사회인의 정신과 실존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특히나 기존의 지배적 가치관이 무너져내린 지금, 그 어떤것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온 피부로 깨닫게 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사유는 그 짙음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의 발 앞에 놓인 길일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자전적 일기에 가깝다. 

어렵고 난해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나 한장 한장 차분히 읽다보면 존재에 대해 파고들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구절절 공감까진 아니어도, '아 세상에 나같은 존재가 있었구나' 하는 위로감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계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저 광활한 우주에 던져진 인간이 두려움과 필요에 의해 그룹지어 관념화 해 놓은 것들 뿐이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인간이 저 자신이 창조해놓은 관념속에 묻혀 아예 그것들이 태초부터 관념 그 자체의 모습으로 존재해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그들은 그저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것 외에도 신경써야 할 사회적 관념이 너무 많아 태초의 그 존재의의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기 때문에. 거기까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없다. 로캉탱이 내뱉은 것처럼. 그렇게 '구토'를 느끼며 세상이 사방에서 짓누르는 거대한 압박 속에서 사물의 존재를 느낀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인식만이 있을 뿐이다. 


아!

관념속에 파묻혀버린 인간.

그것만큼 지금의 사회를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기가 무섭게 관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 결국 저 자신의 삶조차 관념화 해버리는, 그래서 그 순간에 존재하지 못하고, 제 삶이 과거가 된 후에야, 그제서야 제 삶을 관념화하여 인식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야만 안정을 얻는 인간...


거대한 도서관. 그것은 과거이며 관념화된, 원인과 결과과 뒤바뀐 이야기들이 묻힌 곳. 

결국에는 왜곡된 인식에 박차를 가하는 땔감들이 모여있는 곳.


그리고 존재에 대한 무력감, 죄책감, 그 두려움의 안정제는 회상을 통한 과거 뿐이다.

과거를 통해서만,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인간은 존재의 '구토'로부터 해방감을 찾는다.



하지만 '구토'는 존재에 대한 지난하고도 처절한 사유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가 가진, 남성작가로서의 사고력의 한계를 군데군데에서 드러낸다.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훌륭한 사상가를 연인으로 두었음에도 불구, 이정도로밖에 책을 써내지 못하다니. 특히나 역자의 전근대적 틀에 갖힌 구닥다리 번역과 후반부로 갈수록 뒷심이 딸리는 것인지 단어 그대로 가져다 적은 부분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흡사 경운기를 타고 자갈길을 질주하는 것 같았다. 공감가는 부분 못지 않게 실망스러운 부분이 도처에 깔려있는데, 사르트르의 가련하고도 한정적인 고뇌와 사유는 저 자신을 '강간당한 소녀'라고 칭했을 때 절정에 치달은 것으로 보인다.


여성에 대한 편협한 사고는 모든 남성들이 넘어서야 할, 특히 사상가라면 일생의 과업으로 삼아야 할 거대한 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제 아버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세상의 반쪽에 갇힌 채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을 기르지 못한다면 그 상태로 제 존재에 대해 골몰하고 괴로워해봤자 그것은 그저 단층적인 사고밖에 하지 못하는 가련한 짐승의 불쌍하고도 하찮은 몸부림과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그것이 남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그 책의 조그마한 박명이 나의 과거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아마도, 나는 그 책을 통해서, 나의 생활을 아무 혐오감 없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아마도 그 어느 날, 등을 오그리고 내가 탈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 이 음울한 시간을 분명히 회상하면서, 나는 아마 가슴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그날, 그 시간이다." 라고 말할 때가 오리라. 그리고 나는 - 과거에서, 과거에 있어서만 - 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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