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김지연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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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의 치과의사”라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브로네크 야쿠보비치의 홀로코스트 생존기와 함께 읽게 됐다. 치과의사를 거의 읽을 무렵 약사를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홀로코스트 관련 책이라면 일단 사고, 읽게 되었다. 아마 세상이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과 인류는 이제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판단한 이후 일게다. 판단은 시간을 거슬러 2000년 중반, 화석에너지 고갈에서 시작됐다. 석유는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다. 인류 근현대는 석유 기반이고 석유를 대신할 존재는 없다. 사용량과 고갈속도를 생각하면 말이다. 쓰면 쓸수록 말이 길어지니 짧게 가겠다. 이후 난 석유에서 기후변화로 기후변화에서 금융위기 그리고 파탄의 길로 접어든 자본주의 경제체제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물론 결승점은 파국과 종말이다. 아마 궁금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 그래서 관심이 많아 졌을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말이다. 당연히 인류 파멸의 순간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지 않다. 하지만 나치와 유대인이란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비슷하다. 살아남는 사람과 사라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분법 말이다. 붕괴의 순간이 지나면 가진 자와 부자는 살아남을 것이다. 없는 자와 가난한 자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다양한 책들에서 얻은 결론인지라 책 제목이라도 언급해야 하는데 기억나질 않는다. 미안하지만 알아서 찾아들 보시라. 도입부에 말이 길어졌다.

 

약사의 이름은 루마니아 출신의 카페시우스다. 전쟁 전 제약회사 바이엘의 영업사원이었던 그는 친위대원이 되어 아우슈비츠 주임약사가 된다.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어나가든, 고된 노역으로 굶어 죽든, 카페시우스에게 중요한 건 돈이었다. 특히 죽은 유대인의 금니. 아우슈비츠의 최후가 다가오는 순간 약사를 구원한 신은 금니였다. 커다란 가방에는 금니를 뽑아내지 못한 죽은 유대인의 치아가 가득했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카페시우스는 소중하게 가방을 챙겼고, 그 금니로 그는 큰 약국을 경영하며 아주 잘 살다 죽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그가 치클론-B를 다룬 일도, 유대인을 대상으로 신약 테스트를 위한 생체실험에 참가한 일도, 내겐 감흥이 없었다. 오직 금니에 환장한 그만 또렷하다. 하나마나한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그는 여유로웠고 당당했다. 난 그 이유를 돈에서 찾았다. 든든하지 않았겠는가. 돈이 빵빵했으니. 홀로코스트 범죄를 저지른 다른 사람들보다 그는 돈이 많았다. 아니 금이 많았다. 카페시우스는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했고 2년 옥살이를 하고 사면됐다. 역시 결론은 돈이다.

 

살아남을 인류의 마지막 조건 또한 결국 돈이다. 아니면 가치 있는 그 무엇이랄까. 어차피 없는 사람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에 인간들의 생사가 갈릴 것이다. 기후변화와 전쟁에 대비하는 슈퍼리치들은 전문가들을 동원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든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지역에 자가 발전 시스템으로 에너지를 얻고 수경재배를 비롯한 최신 농업기술로 먹거리를 해결하는 자급자족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것이라 했다. 불가능은 없다. 돈 앞에선. 그들에게 다수의 가난한 자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다. 호모 사케르. 버려지는 생명이다. 우리와 그들, 나치와 유대인이라는 철저한 이분법. 인종주의라는 말같지 않은 비과학이 합리적 믿음으로 자리 잡은 비결은 경제위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바 없다. 누구든 배불리 먹여준다면 인종주이 할아비라도 믿고 따르는 것이 인간이다. 이제 다가올 파국의 순간 우린 상상할 수 없는 비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성과 도덕은 야만의 광대가 되어 춤출 것이고 인류애와 사랑은 생존의 본능 아래 짓밟히고 말 것이다. 인간이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코로나 시대인 지금을 찬찬히 뜯어보라. 타인을 대하는 인간이 어떤 행동과 말을 쏟아내는지.

 

희망이 가능할까? 나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 우울한 글을 썼으니 조금 인간다운 이야기로 마무리하겠다. 앞서 말한 아우슈비츠의 치과의사 브로네크는 약사 카시우스와 다른 수용소에 있었다. 지역만 같았을 뿐. 브로네크는 수용소 간수와 친위대 대원들의 이를 치료주곤 했다. 친위대 장교의 이를 땜질하기 위해 금이 필요했던 그는 죽은 유대인 치아에서 금니를 뽑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실행한다. 브로네크는 죽은 유대인의 금니를 뽑으며 절규한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며 자신의 행동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다. 인간의 모습이었다. 금니를 두고 보인 카시우스와 브로네크의 상반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국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가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인류 문명이 붕괴되는 그 순간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건 결국 순수한 인간이다. 난 그 순수한 인간의 필요조건을 부끄러움과 수치심이라 생각한다. 굳이 짜내고 짜내 한 방울의 희망이란 걸 이야기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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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품격 -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와 다사한 애도를 위하여
윤득형 지음 / 늘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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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해 쉽게 쓰인 책이다. 좋은 죽음과 삶의 방향을 일러준다. 물론 여기서 “좋다”라는 형용사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지에 대한 평가와 결론은 오롯이 개인 몫이다. 죽음이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 그 무게감에 짓눌려 고민하기를 미룬다면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허둥지둥 할까 나는 항상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도 두렵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삶을 고민하는 시간만큼 죽음을 고민하려 한다.

 

책을 쓴 사람이 목회자였던 터라 당연히 하나님과 성경이 자주 등장한다. 죽음과 종교의 거리가 가깝기에 난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하지만 종교가 거슬리는 사람에게 책을 추천하고 싶진 않다. 꽤 많이 나오니까. 책에는 불교와 천주교와 같은 다른 종교의 죽음관도 종종 보이고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책에서 얻은 이야기가 꽤 많은 걸 보면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균형감이 느껴졌다.

 

여하튼 책의 큰 줄기는 인간의 죽음이 필연이니 평소 사람을 사랑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서 시작해 웰빙과 웰다잉으로 가지를 뻗는다. 존엄사와 호스피스로 알아보는 죽음의 모습, 망자와 산자를 위한 애도와 위로 이후 죽음학 교육의 필요성과 작가의 경험이 이어지고 반려동물에 대한 기도로 책은 마무리 된다. 그냥 스르륵 읽힌다. 죽음이 뭔지 궁금한 초심자에게 좋은 개론서가 아닐까 싶다. 삶과 죽음에 대한 내공이 쌓여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나 인류 문명의 붕괴와 함께 발생하는 대규모 죽음이라는 사회학적 고민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이미 익숙한 내용일테니까. 여기까지가 책을 읽은 내 느낌이다. 그리고 내린 내 결론은 죽을 때 품위 있게 죽으라는 것이다.

 

품위 있게 죽음을 떠올려 봤다. 두 가지 죽음이 떠올랐다.

프레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는 이탈리아에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다가올 죽음을 알고 있었다. 이송을 며칠 앞두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이를 둔 어머니들은 달랐다. 평소와 똑같이 그들은 자식을 위해 간식을 준비하고, 아이들의 옷을 세탁했으며 모여서 기도했다. 죽음을 날은 그저 평온한 일상의 연속이란 듯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님에도 어머니들은 담담하게 일상의 한 부분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품격이다.

 

다른 죽음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나는 평소 자살하는 사람에 대해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 험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자살조차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모질고 악착같은 사람이다. 이에 비해 자살하는 사람들은 여리고 선한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음의 방식에 대해선 일단 선을 긋겠다. 대통령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끈을 놓아버렸지만 난 그분의 죽음은 품위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유서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직전 대통령은 직접 쓴 유서를 수정했다고 한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손을 댄 부분은 호응관계가 어색한 문장이었다고 한다. 평소 문장가로 알려진 분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다시 읽고 고치는 행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없는 세상에 알려질 유서지만 대통령은 죽음 이후까지 고민했던 것이다. 곧 떠날 이승이지만 호응관계가 그토록 마음에 걸렸던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지만 나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죽은 이후까지 내다보았다. 유서는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마지막 얼굴일테니. 대통령은 당당하고 담담하게 삶의 정리했다. 난 그것이 품격이고 품위라 생각한다.

 

내가 충분히 납득하는 죽음이라면 그래서 당당하게 삶의 마지막을 맞을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죽음일 것이다. 내가 사라져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품위 있게 죽은 나로 기억된다면 그것이 좋은 죽음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죽음 앞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 잘 살기위해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하기를 멈추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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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에디터스 컬렉션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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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이 불친절함을 미리 밝힌다. 마음 가는대로 쓸 예정이다. 글이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아니다 싶으면 읽지 않으시면 된다.

 

책을 몇 달 전 읽었는데 등장인물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책을 펼치기도 귀찮고 검색도 귀찮다. 그래서 나와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의 부인과 선생님의 친구 이름은 직접 찾으시던가 아님 책을 읽으시면 되겠다.

 

나는 제국대학 학생이고 선생님은 제국대학을 졸업한 제법 돈이 좀 많은 백수이시다. 나는 여름방학 때 피서지에서 선생님을 만났고 이상한 동경에 이끌려 선생님 댁에 들락거린다. 선생님의 부인인 사모님은 미인에다 말이 별로 없다. 남편을 지극히 받들지만 사모님과 선생님 사이에 뭔가 비밀이 있음을 나는 느낀다. 나의 아버지는 병이 들었고 나는 고향집에 가게 된다. 돌아가실 날이 머지않은 상황에서 나는 선생님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보단 묵직한 자서전이다. 급하게 도쿄를 향하는 기차에 올라 나는 편지를 읽는다. 긴 편지에 선생은 나에게 평소 왜 그리 세상을 등지고 사람을 믿지 못했는지, 부인과는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 털어놓는다. 그리고 선생님의 친구이야기도 등장한다.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직접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마음은 고코로라고 발음한다. 마음이란 우리말은 따뜻함이, 코코로란 일본말은 산뜻한 느낌이 든다. 팔랑팔랑 가벼운 그런 간지(느낌이). 소세키의 소설 마음은 차갑고 불투명하다. 아주 무겁다. 변덕스럽다. 읽기가 시작될 때 가벼움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무시무시한 무거움으로 바뀐다.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예전 초코파이 CF는 마음을 전하고 정을 나누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관념적으로 마음은 뭔가 따뜻하고 좋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자. 아니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라. 내가 해봤는데 어찌나 찌질하던지. 아주 그냥 내가 싫어질 정도다. 우선 분단위 초단위로 내 마음은 변덕을 부린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보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데 내 마음은 온 힘을 집중한다. 삶의 유한성을 성찰할 때도 어떡하면 안 아프고 오래 살지 고민한다. 내로남불의 굳건한 성채를 구축한지 꽤 오래다. 누군가에게 솔직함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가? 진실된 말 이면에 사리사욕이 자리하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물론 난 당당하게 말 못한다. 내 마음을 담은 초코파이는 결코 달지도, 맛있지도 않음을 단언할 수 있다.

 

소설을 읽고 내 마음의 찌질함을 고해성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란 생각보다 복잡하고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루카치가 그랬던가, 창공의 별이 우리 길 인도했던 시대에 행복했다고. 근대이후 우리의 별은 너무 많아졌던지 아님 아예 없어져 버렸다. 과거의 확실한 길은 잡초로 우거져 어디가 어딘지 모른다. 내 마음을 내가 모르는데 남의 마음을 안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누구나 고통스러운 삶을 경험한다. 정신적으로 말이다. 근데 그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삶이란 그런거다. 나도 힘들고 당신도 힘들다. 쉽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생각하는 존재로써 인간은 어쩔 수 없다. 싫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 마음을 부여잡고 살아야 한다. 남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타인과 나, 세상과 나를 고민할 때 조금은 힘을 빼시라. 내가 책을 읽고 얻은 교훈이니 말이다. 내가 다른 책을 읽고 마음이 바뀌어 삶을 열정적으로 불라불라 해라라고 해도 그 또한 어쩌겠는가. 마음이란 원래 그런 걸 말이다.

 

스포일러를 남기지 않고 글을 맺으려 했는데 내 마음이 바뀌었다. 사람 마음이 원래 이렇다. 여하튼 소설에선 부여잡을 수 없는 그 마음이란 것 때문에 두 사람이 자살한다. 그만큼 마음이란 게 무서울 때도 있다. 마음이란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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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사는 법 - 여성을 위한 생활 법률 가이드
정관성.김지혜 지음, 이환춘 감수 / 리더스가이드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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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서평을 쓰는 지금 TV엔 온통 평양회담으로 들썩이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닌데 여전히 내겐 금기가 깨지는 묘한 느낌이 든다. 내가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였지만)에 다닐 때 북한은 승냥이들이 득실대는 지옥으로 그려졌다.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배웠다. 해마다 6월 25일에는 김일성 인형을 불태웠다. 김일성은 똘이 장군에 거대괴물돼지로 등장했다. 절대악의 상징이었다. 그건 당연하고 지당했다. 결코 만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곳이 북한이었다. 그런데 이제 통일을 이야기한다. 당연하고 지당한 통일이다.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변하는 게 세상이다.

 

말이 나온 김에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덧붙여보겠다. 나는 가난한 산골에서 자랐다. 지금은 사라진 광산이 있어 다른 산골보다 사람은 많았지만 시골은 시골이었다. 가난한 동네에 애들은 많았다. 그 가난한 동네의 딸들은 중학생이 되지 못하고 서울로 돈벌러갔다. 설이나 추석에 선물을 가득 안고 시골로 내려오는 동네 누나들을 보며 우리 누나가 야속했다. 하지만 야속함은 잠시였다. 내 누이도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로 돈 벌러 갔으니 말이다. 동네 형들은 어땠을까?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몇은 대학에 갔다. 한 동네에 살던 누나들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건 당연하고 지당했다. 남녀는 그렇게 달랐다. 아니 차별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성별에 차별을 둬선 안 된다. 당연하고 지당하다. 세상이 변했다.

 

당연하고 지당한 책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곳은 온갖 차별과 혐오로 얼룩져있다. 오랜 세월동안 눌려 있던 것들이 터지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래야 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우리사회는 준비가 덜 됐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일상은 여성들에게 법은 아직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고 남성중심의 사회는 냉랭하기만 하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페미니즘이고 여성해방이지만 여성에게 도움을 줘야하고 여성이 도움을 청할 실체가 모호하다. 그 모호함을 걷어내는 책이라 감히 말하겠다.

 

법률에 관한 책이다. 딱딱한 법률용어보다 친밀한 수다로 구성된 책이다.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는 성희롱이나 언어폭력, 데이트폭력과 같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법률개념이 제시되고 덧붙여 관련 사건의 과정과 결론도 추가된 구성이다. 물론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다. 수다 한마당이 흥미를 부르고 상황의 심각성을 법률로 확인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대책을 안내한다. 단순히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다. 책의 절반은 일상법률 즉 부동산, 금융, 자영업에 관한 법률정보로 채워져 있다.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구분자체의 사라짐이 변화의 종착일지 모른다. 여자에 방점이 찍혀있는 이 책의 다음은 사람이 사는 법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글쓴이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기에. 그게 당연한 일이겠다.

 

철옹성 같았던 북한이 변하고, 내 어릴 적 세상도 변했다. 잊고 살지만 변화는 언제나 고통과 혼란이라는 친구를 함께 데리고 다닌다. 고통이 사회와 개인이 짊어질 고행이라면 혼란은 좋은 길잡이로 조금씩 덜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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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고향 - 한국미술 작가가 사랑한 장소와 시대
임종업 지음 / 소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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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회화)을 본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갖는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일이 잦은 현대인의 눈에 그림의 일차적인 시각자극은 잠시 머물다 가버린다. 작품의 2, 3차 자극이라 할 수 있는 회화의 본질 혹은 심연의 모습은 연습이 없다면 간과하여 지나가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 부단히 노력했다. ‘부단히라는 단어가 조금 멋쩍지만 없는 살림에 허영이며, 사치처럼 보이는 일들을 감행했던 적이 종종 있다. 촌놈이 서울이며 도쿄며 보고 싶은 그림이 있으면 보험을 깨서라도 다녀왔다. 그래봤자 한 두 번이지만. 순간순간을 고려하면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몇 년 동안의 사치는 감히 말하건대 회화의 심연을 잠깐 볼 수 있는 수준이라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 심연과 본질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라고 하면 못한다. 자화자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핵심은 그런 내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황색 얼굴의 서양인이었다.

 

예술이니 회화니 내가 논하는 이론이나 관념은 지극히 서양에 기울어져 있다. 이 책을 읽고 심각성을 크게 깨달았다. 모네와 마네를 이야기하며 인상과 낭만을 내뱉는 내 모습은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 마냥 고매한 귀족인척 하며 살아가는 하인일 뿐이다. 오랜 전통이나 우리의 것이라면 무조건 멀리하려는 거짓 진보의 관성 탓에 나는 이 땅이 품어낸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다.

 

책 속의 풍부한 우리의 그림, 우리의 회화 가운데 나는 태백을 이야기 하고 싶다. 다른 화가와 다른 작품의 고향을 읽고 싶다면 사서 읽으시라. 아주 좋은 책이니까. 여하튼 태백은 내 유년의 고향이다. 검은 세상, 그 검은 세상이 내 인식을 지배했었다. 두 번째 고향이 청정자연의 강원도 정선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검은 선탄장과 검은 길, 검은 사택촌의 기억은 심연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검은 형체와 검은 관념들이 회화로 그려지고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태백을 고향으로 둔 책 속의 작품들(황재형작가의 작품들)은 내게 충격이었다.

 

석탄은 검지만 석탄과 함께 채굴되는 황 성분은 노란 빛이다. 작품 화전삼거리는 내 유년의 태백이었다. 그곳은 검지만 노란 빛이 도는 신비와 매혹의 도시이기도 했다. 완전한 노동의 표본인 광부와 산업화의 상징 검은 석탄. 인간은 그 검은 도시와 지독한 노동 속에서 희망과 행복을 꿈꿨다. 민중의 삶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태백 그곳은 검은 절망과 노란 희망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내다니. 서양화가를 찾아다닌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탄광이 사라지고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그곳은 가진 것 없는 자가 노동을 통해 미래를 꿈꾸는 대신 탐욕스런 자들이 행운에 기대어 대박을 꿈꾸는 곳이 돼버렸다. 사람이 바뀌고 장소가 바뀌어도 태백은 여전히 절망과 희망의 공간이다. 그 절망과 희망이 검정과 노랑으로 겹겹이 표현된 화전삼거리는 그래서 깊은 울림으로 다가 왔다. 회화가 주는 2, 3차의 자극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보고 읽고 느끼는 일에 더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한쪽에 치우친 꼴값도 여기까지다. 책을 쓴 글쓴이의 다식함과 변화무쌍한 표현이 배 아프다.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다. 아직 멀었다. 보는 것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더 연습해야겠다. 뭔가 부족하고 어색하지만 더 쓰려고 해도 능력 밖이다. 좋은 책 그냥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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