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고향 - 한국미술 작가가 사랑한 장소와 시대
임종업 지음 / 소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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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회화)을 본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갖는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일이 잦은 현대인의 눈에 그림의 일차적인 시각자극은 잠시 머물다 가버린다. 작품의 2, 3차 자극이라 할 수 있는 회화의 본질 혹은 심연의 모습은 연습이 없다면 간과하여 지나가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 부단히 노력했다. ‘부단히라는 단어가 조금 멋쩍지만 없는 살림에 허영이며, 사치처럼 보이는 일들을 감행했던 적이 종종 있다. 촌놈이 서울이며 도쿄며 보고 싶은 그림이 있으면 보험을 깨서라도 다녀왔다. 그래봤자 한 두 번이지만. 순간순간을 고려하면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몇 년 동안의 사치는 감히 말하건대 회화의 심연을 잠깐 볼 수 있는 수준이라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 심연과 본질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라고 하면 못한다. 자화자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핵심은 그런 내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황색 얼굴의 서양인이었다.

 

예술이니 회화니 내가 논하는 이론이나 관념은 지극히 서양에 기울어져 있다. 이 책을 읽고 심각성을 크게 깨달았다. 모네와 마네를 이야기하며 인상과 낭만을 내뱉는 내 모습은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 마냥 고매한 귀족인척 하며 살아가는 하인일 뿐이다. 오랜 전통이나 우리의 것이라면 무조건 멀리하려는 거짓 진보의 관성 탓에 나는 이 땅이 품어낸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다.

 

책 속의 풍부한 우리의 그림, 우리의 회화 가운데 나는 태백을 이야기 하고 싶다. 다른 화가와 다른 작품의 고향을 읽고 싶다면 사서 읽으시라. 아주 좋은 책이니까. 여하튼 태백은 내 유년의 고향이다. 검은 세상, 그 검은 세상이 내 인식을 지배했었다. 두 번째 고향이 청정자연의 강원도 정선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검은 선탄장과 검은 길, 검은 사택촌의 기억은 심연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검은 형체와 검은 관념들이 회화로 그려지고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태백을 고향으로 둔 책 속의 작품들(황재형작가의 작품들)은 내게 충격이었다.

 

석탄은 검지만 석탄과 함께 채굴되는 황 성분은 노란 빛이다. 작품 화전삼거리는 내 유년의 태백이었다. 그곳은 검지만 노란 빛이 도는 신비와 매혹의 도시이기도 했다. 완전한 노동의 표본인 광부와 산업화의 상징 검은 석탄. 인간은 그 검은 도시와 지독한 노동 속에서 희망과 행복을 꿈꿨다. 민중의 삶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태백 그곳은 검은 절망과 노란 희망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내다니. 서양화가를 찾아다닌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탄광이 사라지고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그곳은 가진 것 없는 자가 노동을 통해 미래를 꿈꾸는 대신 탐욕스런 자들이 행운에 기대어 대박을 꿈꾸는 곳이 돼버렸다. 사람이 바뀌고 장소가 바뀌어도 태백은 여전히 절망과 희망의 공간이다. 그 절망과 희망이 검정과 노랑으로 겹겹이 표현된 화전삼거리는 그래서 깊은 울림으로 다가 왔다. 회화가 주는 2, 3차의 자극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보고 읽고 느끼는 일에 더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한쪽에 치우친 꼴값도 여기까지다. 책을 쓴 글쓴이의 다식함과 변화무쌍한 표현이 배 아프다.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다. 아직 멀었다. 보는 것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더 연습해야겠다. 뭔가 부족하고 어색하지만 더 쓰려고 해도 능력 밖이다. 좋은 책 그냥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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