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김지연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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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의 치과의사”라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브로네크 야쿠보비치의 홀로코스트 생존기와 함께 읽게 됐다. 치과의사를 거의 읽을 무렵 약사를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홀로코스트 관련 책이라면 일단 사고, 읽게 되었다. 아마 세상이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과 인류는 이제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판단한 이후 일게다. 판단은 시간을 거슬러 2000년 중반, 화석에너지 고갈에서 시작됐다. 석유는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다. 인류 근현대는 석유 기반이고 석유를 대신할 존재는 없다. 사용량과 고갈속도를 생각하면 말이다. 쓰면 쓸수록 말이 길어지니 짧게 가겠다. 이후 난 석유에서 기후변화로 기후변화에서 금융위기 그리고 파탄의 길로 접어든 자본주의 경제체제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물론 결승점은 파국과 종말이다. 아마 궁금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 그래서 관심이 많아 졌을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말이다. 당연히 인류 파멸의 순간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지 않다. 하지만 나치와 유대인이란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비슷하다. 살아남는 사람과 사라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분법 말이다. 붕괴의 순간이 지나면 가진 자와 부자는 살아남을 것이다. 없는 자와 가난한 자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다양한 책들에서 얻은 결론인지라 책 제목이라도 언급해야 하는데 기억나질 않는다. 미안하지만 알아서 찾아들 보시라. 도입부에 말이 길어졌다.

 

약사의 이름은 루마니아 출신의 카페시우스다. 전쟁 전 제약회사 바이엘의 영업사원이었던 그는 친위대원이 되어 아우슈비츠 주임약사가 된다.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어나가든, 고된 노역으로 굶어 죽든, 카페시우스에게 중요한 건 돈이었다. 특히 죽은 유대인의 금니. 아우슈비츠의 최후가 다가오는 순간 약사를 구원한 신은 금니였다. 커다란 가방에는 금니를 뽑아내지 못한 죽은 유대인의 치아가 가득했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카페시우스는 소중하게 가방을 챙겼고, 그 금니로 그는 큰 약국을 경영하며 아주 잘 살다 죽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그가 치클론-B를 다룬 일도, 유대인을 대상으로 신약 테스트를 위한 생체실험에 참가한 일도, 내겐 감흥이 없었다. 오직 금니에 환장한 그만 또렷하다. 하나마나한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그는 여유로웠고 당당했다. 난 그 이유를 돈에서 찾았다. 든든하지 않았겠는가. 돈이 빵빵했으니. 홀로코스트 범죄를 저지른 다른 사람들보다 그는 돈이 많았다. 아니 금이 많았다. 카페시우스는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했고 2년 옥살이를 하고 사면됐다. 역시 결론은 돈이다.

 

살아남을 인류의 마지막 조건 또한 결국 돈이다. 아니면 가치 있는 그 무엇이랄까. 어차피 없는 사람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에 인간들의 생사가 갈릴 것이다. 기후변화와 전쟁에 대비하는 슈퍼리치들은 전문가들을 동원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든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지역에 자가 발전 시스템으로 에너지를 얻고 수경재배를 비롯한 최신 농업기술로 먹거리를 해결하는 자급자족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것이라 했다. 불가능은 없다. 돈 앞에선. 그들에게 다수의 가난한 자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다. 호모 사케르. 버려지는 생명이다. 우리와 그들, 나치와 유대인이라는 철저한 이분법. 인종주의라는 말같지 않은 비과학이 합리적 믿음으로 자리 잡은 비결은 경제위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바 없다. 누구든 배불리 먹여준다면 인종주이 할아비라도 믿고 따르는 것이 인간이다. 이제 다가올 파국의 순간 우린 상상할 수 없는 비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성과 도덕은 야만의 광대가 되어 춤출 것이고 인류애와 사랑은 생존의 본능 아래 짓밟히고 말 것이다. 인간이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코로나 시대인 지금을 찬찬히 뜯어보라. 타인을 대하는 인간이 어떤 행동과 말을 쏟아내는지.

 

희망이 가능할까? 나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 우울한 글을 썼으니 조금 인간다운 이야기로 마무리하겠다. 앞서 말한 아우슈비츠의 치과의사 브로네크는 약사 카시우스와 다른 수용소에 있었다. 지역만 같았을 뿐. 브로네크는 수용소 간수와 친위대 대원들의 이를 치료주곤 했다. 친위대 장교의 이를 땜질하기 위해 금이 필요했던 그는 죽은 유대인 치아에서 금니를 뽑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실행한다. 브로네크는 죽은 유대인의 금니를 뽑으며 절규한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며 자신의 행동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다. 인간의 모습이었다. 금니를 두고 보인 카시우스와 브로네크의 상반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국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가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인류 문명이 붕괴되는 그 순간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건 결국 순수한 인간이다. 난 그 순수한 인간의 필요조건을 부끄러움과 수치심이라 생각한다. 굳이 짜내고 짜내 한 방울의 희망이란 걸 이야기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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