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데이터 이야기 - 디지털 시대에 알아야 할 핵심 지식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청소년 시리즈 1
박옥균 지음 / 이상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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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그곳을 통과하면 거대한 책들의 세상이 펼쳐지고, 또 그 너머에는 세상의 모든 진리가 존재한다. 물론 지극히 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하튼 기쁜 것, 행복한 것,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 적당히 섞여있는 그 진리의 세계를 맛보려면 먼저 책을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입구다. 그곳을 거치지 못하면 책과 그 너머의 매혹적인 세계를 엿볼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입구 또한 책이다. 독서가라면 누구나 자신을 책의 바다에 풍덩 빠지게 만든 책이 존재한다. 감동 아니면 충격을 준 책 말이다. 도끼로 얼음장을 깨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성일님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20년 전 나를 책 세상으로 인도한 책이다. 빛나는 사회과학 이론의 정수를 뽑아 놓은 책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워낙 다루는 분야가 많아 자칫 방만하고 산만해질 수 있는데 이 책은 다르다. 메타서적의 한계를 뛰어넘은 명저다. 그람시의 ‘옥중수고’, 푸코의 ‘감시와 처벌’,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발터 벤야민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접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 한권의 책 덕분이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그래서 각별하다.

 

10년이 넘었다. 난 매주 토요일 도서관에 간다. 입구를 통과해 1층을 지나면 2층이 장서실이다. 신간코너 앞에 선다. 정확하게 말하면 300번대 사회과학 서가 앞이다. 10년 전 책장을 압도하던 인문사회 책이 지금은 초라하게 줄었다. 재테크, 투자, 부동산에서 메타버스, 암호화폐, NFT 까지 온통 돈 이야기가 공공 도서관 300번대 책꽂이를 휩쓸고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모습인지 씁쓸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도 애써 외면하고 싶을 지경이다. 책에 관해 편식이 심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돈이나 부, 인공지능이니 빅테이터 따위에 관심이 별로 없다. 좋은 책이 있을 텐데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나를 인공지능과 AI, 테이터와 코딩의 세계로 끌어줄 책이 필요했다. 다양하고 풍성한 정보로 가득하고 장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책.

 

그러던 차에 좋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데이터라는 풍성한 바다위에 펼쳐진 한편의 스펙터클이다. 코딩과 데이터, 인공지능과 각종 정보통신기술이 쉽고 흥미롭게 전개된다. 단순한 IT 교양서가 아니다. 글쓴이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데이터 이야기가 펼쳐진다. 데이터의 본질이 결국 지식과 지혜 그리고 책이었으니 말이다. 헤겔의 정반합, 마르크스의 물신숭배에서 조선왕조실록과 논어, 스키너의 심리실험과 유발 하리리의 사피엔스까지 철학, 심리학, 뇌과학, 역사, 미술과 음악을 넘나든다. 글쓴이의 엄청난 독서량이 느껴진다. 물론 테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메타버스, 알고리즘에 관한 내용도 알차고 간결하다. 데이터 과학 초심자인 성인에게도 좋지만 무엇보다 청소년들에게 좋은 책이라 자신한다. 읽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 따분하지 않아 좋다. 파트별로 추천 도서가 책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세심한 편집도 장점이다. 분명 이 책이 입구가 되어 책 세상에 이르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라 자신한다.

 

서평을 마치며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책을 마무리 하며 글쓴이는 잠깐이라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벗어나는 삶을 고민하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에 더욱 가치가 빛나는 건 바로 ‘오래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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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카락 마담의 숙소 - 할머니의 우아한 세계 여행, 그 뒷이야기
윤득한 지음, 츠치다 마키 옮김 / 평사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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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삶이다.

서평을 써야 하는데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저 멋지다는 말밖에.

 

앞 두 줄이 내 서평의 전부다.

아래 쓴 글은 사족이다.

 

사업가, 예술가, 여행가, 시인 윤득한.

그(그녀)의 한 세기 남짓한 생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생의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 인연을 만들기 위해 세계를 여행한 경계인이었다. 예술과 사업 중간 어딘가의 경계인이었고 한국인이면서 하이쿠를 사랑한 경계인이었다. 몇 째 아들인지 모르지만 그 아들이 한 말이 정답이다. 경계인이어서 고독하고 외롭지 않았다. 경계에 서 있어 그녀는 자유인이었다. 그녀가 일본이나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선택받아야 했다면 결코 이처럼 멋진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만나고 싶으면 만났다. 보고 싶으며 봐야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말미에 조르바는 두목(카잔차키스)에게 아름다운 돌덩이를 보러 오라고 전보를 친다-두목은 독일에 조르바는 기억나지 않지만 동유럽 어디쯤에 있었다. 당시 유럽은 처참한 경제공황으로 죽어가던 때였다. 카잔차키스는 결국 가지 않는다. 비겁하게. 여튼 조르바는 펜대 운전사라 조롱하며 두목에게는 지옥이 존재할 거라고 답장한다.

맞다. 글쓴이에겐 지옥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조르바와 결이 다르지만 그녀는 완전한 자유인이었기에.

 

사족이 길다.

생각나는 대로 적겠다.

유쾌한 로마의 덩치 좋은 남정네들. 스코틀랜드의 무반주 첼로곡, 베를린의 택시 운전사, 깁스를 예술로 승화시킨 지중해 의사들, 캐나다에서 만난 정중한 홍콩신사. 무엇보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열린 최초의 한국전.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 아름다운 하이쿠.

읽어야 알게 될 것이다. 자유와 예술을.

눈이 띄는 하이쿠 한 편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가을 국화꽃 피는 골목 느긋한 고양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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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극장 - 산만한 관객 K의 사유하며 영화 보기
김형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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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거리두기가 시작되었을 때 푸코의 생체권력을 떠올렸다. 물론 생명과 건강권을 둘러싼 철학적 사유에 대한 깊이는 없다. 정치권력이 어떤 시스템으로 생명을 부여잡고 시민에게 강제를 휘두르는지도 잘 모른다. 평소 숨 쉬듯 자연스러웠던 행동권의 범위가 제한되는 순간 반사적으로 생각났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정신병원과 책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리고 잭 닉콜슨이란 단상이 줄을 이었고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검색했다. 네이버 블로그에 영화에 대한 번득이는 비평을 읽었고 이런 분이라면 책을 써도 될텐데라며 글쓴이의 내공이 부러웠다. 작년 일이다.

 

“후르비네크의 혀”는 내가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비평집이다. 2차대전 유대인 대학살, 5.18 광주, 세월호 참사와 같은 타살된 대규모 죽음에 관한 문학작품에 대한 김형중 교수의 비평이 담겨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 인간은 일상의 언어로 대화할 수 없다는 것 혹은 이성과 감정으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현실을 반영하는 장르가 환상문학이다(정확하지 않다. 책을 읽고 느낀 내 감정이다) 따위의 깨달음을 얻은 책이다. 책 제목 후르비네크도 말과 언어에 대한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다. 좋은 책이다.

 

“무서운 극장”이라는 책은 영화 비평이다. 반가운건 지은이가 김형중 교수란 사실. 책을 구입하고 목록을 살피던 중 ‘뻐꾸기 중지 위로 날아간 새’가 보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책을 넘겨 그 부분을 확인해 보니 작년에 블로그에서 읽은 글이 아니던가. 다시 블로그를 찾아보니 글쓴 사람이 김형중이었다. 블로그도 일반적이 블로그가 아니라 씨네 21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자질구레(?)한 정보에 둔감한 내게 자주 있는 일이다. 기이한 우연이다.

 

지난 1년 동안 의미 없음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사유의 허무함도 사무쳤다. 읽는 내용 족족 현실과 동떨어진 꿈처럼 느꼈다. 쓰는 글은 모두 문자 쓰레기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모든 것이 과정이었다. 아닐 수 있겠지만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는 과정. 경로의존과 확증편향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이라 혼자 결론지었다. 이렇게 놓았던 정신줄을 다시 잡는 시기에 무서운 극장은 마침맞았다. 보고도 알지 못했던 정보, 다른 방향의 사유와 성찰의 존재를 알려준 책이다. 시집보다 조금 큰 작은 책에 어마어마한 깊이가 느껴진다. 특히 책 앞 부분의 세 개의 글에 주목하기 바란다. 숫자 3이 1이 되는 마법이다. 깊이와 울림, 사유와 성찰을 가득 품은 글! 이렇게 쓸 수 있다니, 내공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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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상상력 -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 정치란 무엇인가
김병권 지음 / 이상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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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문장과 문장은 따로 놀았고, 맥락은 아득히 먼 나라로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 밥에 그 나물. 맛이 없었다. 휴일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다음 휴일에 펼쳐보지 못한 채 반납됐다. 책을 대신한 건 넷플릭스 동영상이었다. 하지만 영상을 통해 본 세상은 허무하고 씁쓸했다. 내겐 텍스트가 주는 단단한 통찰과 위안을 현란한 화면으로 대체하기 불가능했다. 뭐든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이 바로 진보의 상상력, 바로 이 책이다. 벌써 읽어야 했어야 했는데 이리도 변명이 길다.

 

진보와 미래라는 단어가 낯설어진지 꽤 됐다. 현실과 동떨어진 진보, 곧 붕괴될 지구 문명의 미래라는 관념이 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일부러 피했다. 이런 느낌이다. 읽어봐야,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기본 소득, 탈탄소, 진보정치를 말하는 게 몽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십 수년 전까지 난 탈핵주의자였다. 전기료가 인상되더라도 핵발전소가 없어지는 것이 정의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명 붕괴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자리 잡을 때 까지 원자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가용 자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말이다. 기본소득도 그렇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그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난 모르겠다. 수출을 늘려 돈만 팡팡 벌면 되는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든 수입만 많으면 되는 건지, 무기를 팔아 얻는 수익도 괜찮은 건지(우리나라 방산수출액은 20조 이상이다). 당연히 시민 개개인의 의지로 과연 탄소를 줄일 수 있을지 난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개인과 시민단체의 힘으로 가능할까?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한 곳으로 수렴된다. 각 나라의 정치권력이 위기 대처에 앞장서야 한다고. 탈탄소, 기본소득, 소득 불평등, 기후위기에 대한 강력한 법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이는 몇몇 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동참해야 한다고. 하지만 과거 역사와 현재 진행형인 국제정치를 바라보건데 모든 국가의 일치된 힘이란 꿈같은 이야기다. 법과 정의와 도덕이란 국제무대에서 힘없는 국가의 자기위안일 뿐이다. 파국에 맞선 개인의 저항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인류 문명의 붕괴에 가장 큰 요인은 불평등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불평등. 구조화된 불평등은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기형적인 사회를 만든다. 중요한 것은 불평등이란 개인과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세계 정치의 매커니즘으로 구조화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는 불평등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통해 각 나라, 각 공동체, 각 개인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불평등의 구조화는 위에서 아래로 전개된다. 당연히 문제 해결 또한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개인과 시민단체의 안간힘으로 어림없다는 말이다.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책을 충분히 읽어 볼만 하다. 많은 자료와 관련 서적을 접하고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녹아있다.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찾기 위해 글쓴이가 가진 모든 걸 쥐어 짠 듯하다. 파국의 눈덩이에 조금 큰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책이다.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입장에서 벗어나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거대한 붕괴 앞에서 우리가,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 난 모른다. 단지 무너지고 부서지는 현실을 바라보며 붕괴의 과정에서 뭔가를 얻기 바랄 뿐이다. 그 뭔가를 찾기 위해 언제까지 무의미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의미와 무의미의 반복이겠지만 그 사이에 의미를 넘어선 소중한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희망한다. 무척 어리석어 보이지만 난 이성과 논리가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에 기대를 건다.

 

소설가 허준(나도 근래에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이 쓴 “잔등”이라는 소설 속 국밥집 할머니 이야기로 글을 마치려한다. 할머니의 하나 남은 막내아들은 노동운동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면회 때 아들은 함께 투옥된 일본인 동료에 대해 말한다. 일본인 동료는 일본인은 일본에서 잡히는 멸치만 먹고 살아도 넉넉히 잘 산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아들은 해방 한 달 전에 옥사했고 할머니는 해방 후 편하게 모시겠다고 찾아온 아들 친구들을 모두 물렀다. 사방에 굶고,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이 천진데 어떻게 자신만 편히 살 수 있겠냐며. 국밥집 할머니는 그토록 미워하는 일본인들(패전국 국민으로 온갖 박해를 받고 있던)에게 묵묵히 국밥을 말아준다. 일본인이 밉지만 아들이 말한 그 일본인 친구 때문에. 혐오와 차별이 넘치는 세상에서 미워하는 이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할머니의 (책에서 표현된) 슬픈 너그러움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서서히 타올라 꺼지기 직전의 잔등(殘燈)은 희미하지만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소중한 무언가가 아닐까? 무의미와 의미, 이해의 지평 건너편에 존재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말이다. 희미하지만 따뜻한 빛을 뿜는 잔등과 슬프지만 너그러운 할머니의 잔상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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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김지연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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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의 치과의사”라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브로네크 야쿠보비치의 홀로코스트 생존기와 함께 읽게 됐다. 치과의사를 거의 읽을 무렵 약사를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홀로코스트 관련 책이라면 일단 사고, 읽게 되었다. 아마 세상이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과 인류는 이제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판단한 이후 일게다. 판단은 시간을 거슬러 2000년 중반, 화석에너지 고갈에서 시작됐다. 석유는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다. 인류 근현대는 석유 기반이고 석유를 대신할 존재는 없다. 사용량과 고갈속도를 생각하면 말이다. 쓰면 쓸수록 말이 길어지니 짧게 가겠다. 이후 난 석유에서 기후변화로 기후변화에서 금융위기 그리고 파탄의 길로 접어든 자본주의 경제체제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물론 결승점은 파국과 종말이다. 아마 궁금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 그래서 관심이 많아 졌을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말이다. 당연히 인류 파멸의 순간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지 않다. 하지만 나치와 유대인이란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비슷하다. 살아남는 사람과 사라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분법 말이다. 붕괴의 순간이 지나면 가진 자와 부자는 살아남을 것이다. 없는 자와 가난한 자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다양한 책들에서 얻은 결론인지라 책 제목이라도 언급해야 하는데 기억나질 않는다. 미안하지만 알아서 찾아들 보시라. 도입부에 말이 길어졌다.

 

약사의 이름은 루마니아 출신의 카페시우스다. 전쟁 전 제약회사 바이엘의 영업사원이었던 그는 친위대원이 되어 아우슈비츠 주임약사가 된다.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어나가든, 고된 노역으로 굶어 죽든, 카페시우스에게 중요한 건 돈이었다. 특히 죽은 유대인의 금니. 아우슈비츠의 최후가 다가오는 순간 약사를 구원한 신은 금니였다. 커다란 가방에는 금니를 뽑아내지 못한 죽은 유대인의 치아가 가득했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카페시우스는 소중하게 가방을 챙겼고, 그 금니로 그는 큰 약국을 경영하며 아주 잘 살다 죽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그가 치클론-B를 다룬 일도, 유대인을 대상으로 신약 테스트를 위한 생체실험에 참가한 일도, 내겐 감흥이 없었다. 오직 금니에 환장한 그만 또렷하다. 하나마나한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그는 여유로웠고 당당했다. 난 그 이유를 돈에서 찾았다. 든든하지 않았겠는가. 돈이 빵빵했으니. 홀로코스트 범죄를 저지른 다른 사람들보다 그는 돈이 많았다. 아니 금이 많았다. 카페시우스는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했고 2년 옥살이를 하고 사면됐다. 역시 결론은 돈이다.

 

살아남을 인류의 마지막 조건 또한 결국 돈이다. 아니면 가치 있는 그 무엇이랄까. 어차피 없는 사람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에 인간들의 생사가 갈릴 것이다. 기후변화와 전쟁에 대비하는 슈퍼리치들은 전문가들을 동원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든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지역에 자가 발전 시스템으로 에너지를 얻고 수경재배를 비롯한 최신 농업기술로 먹거리를 해결하는 자급자족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것이라 했다. 불가능은 없다. 돈 앞에선. 그들에게 다수의 가난한 자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다. 호모 사케르. 버려지는 생명이다. 우리와 그들, 나치와 유대인이라는 철저한 이분법. 인종주의라는 말같지 않은 비과학이 합리적 믿음으로 자리 잡은 비결은 경제위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바 없다. 누구든 배불리 먹여준다면 인종주이 할아비라도 믿고 따르는 것이 인간이다. 이제 다가올 파국의 순간 우린 상상할 수 없는 비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성과 도덕은 야만의 광대가 되어 춤출 것이고 인류애와 사랑은 생존의 본능 아래 짓밟히고 말 것이다. 인간이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코로나 시대인 지금을 찬찬히 뜯어보라. 타인을 대하는 인간이 어떤 행동과 말을 쏟아내는지.

 

희망이 가능할까? 나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 우울한 글을 썼으니 조금 인간다운 이야기로 마무리하겠다. 앞서 말한 아우슈비츠의 치과의사 브로네크는 약사 카시우스와 다른 수용소에 있었다. 지역만 같았을 뿐. 브로네크는 수용소 간수와 친위대 대원들의 이를 치료주곤 했다. 친위대 장교의 이를 땜질하기 위해 금이 필요했던 그는 죽은 유대인 치아에서 금니를 뽑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실행한다. 브로네크는 죽은 유대인의 금니를 뽑으며 절규한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며 자신의 행동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다. 인간의 모습이었다. 금니를 두고 보인 카시우스와 브로네크의 상반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국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가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인류 문명이 붕괴되는 그 순간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건 결국 순수한 인간이다. 난 그 순수한 인간의 필요조건을 부끄러움과 수치심이라 생각한다. 굳이 짜내고 짜내 한 방울의 희망이란 걸 이야기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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