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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환의 다시 만난 한국사 ㅣ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3
정재환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역사를 공부한다고 하면 으레 연표와 연도, 왕의 이름과 사건명을 암기하는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학창 시절 내내 역사는 그런 과목이었습니다. 외웠다가 시험이 끝나면 잊고, 다시 외우고 또 잊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사라는 말을 들으면 어딘가 막막한 기분이 먼저 들곤 했는데, 정재환의 『다시 만나는 한국사』는 그 막막함을 말끔히 걷어내는 책이었습니다. 역사를 사실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 5000년의 시간이 놀랍도록 선명하게 지금의 나와 연결되었습니다.

이 책은 EBS 교양 프로그램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3의 한국사 편을 한 권으로 엮은 것으로, 전곡리 주먹도끼부터 조선어학회 사건까지 10가지 결정적 순간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압축하여 풀어냅니다. 저자는 각각의 사건에서 단순한 사실 나열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문화 속에 어떤 '유전자'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추적합니다. 이 '유전자'라는 개념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시각입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전곡리 주먹도끼를 다룬 첫 번째 강이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주먹도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서구 학계의 오랜 편견을 단번에 무너뜨린 전곡리 발견 이야기는, 역사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편견에 맞서온 인간의 도전 그 자체임을 보여줍니다. 구석기인들에게 석기가 생존과 직결된 도구였듯,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온 것이 바로 한국사의 첫 번째 유전자라는 저자의 시각은 신선하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훈민정음을 다룬 여섯 번째 강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세종이 단순히 문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가장 적은 수의 글자로 가장 많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영어 알파벳이 26자이지만 실제로는 104자를 공부해야 하는 것과 달리, 훈민정음은 최소한의 기본자로 조합의 원리를 활용해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자 창제가 아니라, 소통을 민주화하려는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저자가 이를 '소통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수원 화성을 다룬 일곱 번째 강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10년 계획으로 시작한 대공사가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다는 대목에서, 저자가 한국 사회의 '빨리빨리 문화'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하고 너스레를 놓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단순한 속도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조의 강력한 의지, 당대 최고의 기술과 경륜이 한데 모인 집중력, 그리고 백성이 잘 먹고 잘 사는 이상 도시를 향한 꿈. 그것이 기록적인 완공 속도를 만들어낸 진짜 이유였습니다.

만민공동회를 다룬 아홉 번째 강은 현재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였습니다. 1898년 종로 거리에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민주주의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광장 민주주의가 결코 근래에 생겨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120여 년 전의 그 광장이 오늘의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저자의 시각은, 역사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는 현재임을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마지막 강인 조선어학회 사건에서는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곧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언어를 잃으면 나라도 잃는다는 것을, 그 시대의 한글 학자들은 목숨을 걸고 증명했습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한참 동안, 지금 내가 자연스럽게 쓰고 읽는 한글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의지 위에 놓여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구조라는 저자의 말이 비로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사에 관심은 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 학창 시절 배운 역사가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고 느끼는 분, 혹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떤 뿌리에서 자라났는지 궁금한 분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두꺼운 통사서를 펼칠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이 책은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입니다. 과거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나를 설명하는 가장 가까운 이야기라는 것을 이 책이 조용하고도 분명하게 증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