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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망상 - 잘못된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조 피에르 지음, 엄성수 옮김, 김경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집단 망상》(조 피에르)는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세상을 뒤흔드나?”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려는 책입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인지심리학 연구자인 저자는, 음모론자나 극단주의자를 단순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밀어내지 않고, 우리의 뇌 구조와 진화과정을 따라가며 “그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집단적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책을 읽는 동안, 집단 망상이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과 동시에, 그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마음가짐을 배워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자가 집단 망상의 출발점을 “불확실성과 불안”에서 찾는 대목이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느껴질 때, 우리의 뇌는 불안을 줄여 줄 “깔끔한 이야기”를 갈망한다고 말합니다. 경제위기, 팬데믹, 정치 혼란, 기후위기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잇따르면, 우리는 ‘우연과 구조적 복합 요인’이라는 현실보다 ‘보이지 않는 배후’가 모든 걸 조종하고 있다는 서사를 더 편안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때 등장하는 음모론은 일종의 심리적 진통제 역할을 하며, 세상을 쉽게 설명해 주는 대신, 우리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집단적 망상의 문을 엽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여러 인지 편향도 깊이 공감되었습니다. 확증편향은 내가 이미 믿고 싶은 것만 골라 보게 만들고, 가용성 편향은 뉴스나 SNS에서 자주 보는 극단적인 사례를 세상 전체의 평균처럼 느끼게 합니다. 비례 편향은 “큰 사건에는 반드시 큰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게 만들어, 우발적이고 복합적인 사건도 “거대한 음모”로 과장하게 합니다. 여기에 ‘동기화된 추론’이 더해져, 우리의 뇌가 과학자가 아니라 변호사처럼, 이미 좋아하는 결론을 옹호하는 증거만 모으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설명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설명을 따라가다 보니, 음모론이 단지 일부 극단적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기본 설정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납득되기 시작했습니다.

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집단 망상이 개인의 두뇌를 넘어 사회적·기술적 환경과 만나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메커니즘입니다. 저자는 “믿음은 전염성이 있다”고 말하며, 반복해서 듣는 이야기가 어느 순간 증거처럼 느껴지는 과정을 다양한 실험과 사례로 보여줍니다. 친구와 가족, 같은 커뮤니티, 카리스마 있는 리더와의 동조가 더해질수록, 어떤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우리 편”임을 입증하는 행위가 됩니다. 특히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이 분노와 자극적인 콘텐츠를 더 멀리, 더 빠르게 퍼뜨리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지적은 소름 끼칠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은 진실을 가려내지 않고, 참여도·조회수·공유 수만 측정하기 때문에,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강렬한 서사”가 이기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분석이 날카롭게 다가왔습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해독제’는 의외로 냉소나 비웃음이 아니라 “인지적 겸손과 안전장치가 있는 호기심”입니다. 그는 “만약 아무 것도 내 믿음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문장으로 독자를 멈춰 세웁니다. 자신의 믿음을 바꿀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다른 증거와 관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남겨 두라는 제안입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조언은, 의도적으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팔로우하고, 다른 정보원을 찾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체성과 아이디어를 분리해 “모든 것을 똑같이 믿지 않아도 같은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 양극화와 집단 망상에 맞서는 중요한 시작점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깊게 남은 메시지는, 집단 망상에 빠진 사람들을 ‘망상 환자’로 낙인찍고 공격하는 태도야말로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는 경고였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뇌가 진화적으로 패턴을 찾고, 집단을 보호하고, 두려움을 줄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취약성이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특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조롱과 단절이 아니라, “연민과 상호 존중, 공동체 정신으로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대목에서,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말 그대로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취급하는 현재의 인터넷 문화와 정치 환경이 얼마나 위험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총평하자면, 《집단 망상》을 통해 인간의 인지적 취약성을 부끄러워하기보다, 그것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관리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습니다. 앞으로 뉴스를 접하거나 자극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 “왜 이렇게 완벽하게 느껴질까?”, “이게 틀렸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고 한 번 더 질문해 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잘못된 믿음을 단번에 없애는 마법 같은 해법은 없지만, 집단 망상을 ‘남의 병’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중요한 첫걸음을 뗀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