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격양된 목소리에 놀란 나는 청소하며 손에 주운 한 줌의 쓰레기들을 어디에 버려야 할지 몰라 가방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처참했다. 그날 비참했던 내 심정이 마치 그 꾸겨진 쓰레기와 같았다.

안희정은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였다.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보아왔기에 나를 드러내지 않고 수사 기관에 수사를 요청한다면, 이 사건이 덮이거나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지켜봐달라고 말하는 것만이 내가 죽지 않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거대 권력 앞에서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 P64

나는 숨겨질 수 없었다. 블라인드 위에서 미투를 한다면 온갖 억측이 사건을 가리고 수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폭력 사건 본질 그대로, 진실 그대로 알려지길 원했다.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을 테니 제발 사건에 집중해달라, 제발 제대로 수사해달라, 진행 과정을 지켜봐달라 애원하는 마음으로 나를 방송에 드러냈다. - P65

나 자신을 돌볼 시간이 전혀 없었다. 아니,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고 되니며 살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괜히 어려움을 드러내봤자 내 평판만 깎일 뿐이었다. 늘 괜찮은 척 웃으며 일했다. - P106

모든 것을 혼자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미 생활과 업무의 경계를 잃고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 무력하게 젖어든 상태였다. 섬에 갇힌 듯 일에 매몰되어 갔다. 그 중간 중간 자행되는 성폭력과 곧바로 이어지는 사과에 혼란스러움은 더 가중됐다. 도망치고 싶어씨만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정신도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 P106

불법과 부정이 횡행했지만 모두가 눈 감았다. 그곳에서 조직의 대의와 목적 이외 모든 것은 사사로웠다. 사람도 인권도 정의도 그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것에 불과했다. - P109

나는 사실을 밝히면, 물론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내 생각은 순진했다. 내가 상대해야 할 가해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권력 조직이었다. 내가 순진했음을 깨닫고 후회한 적도 많다. - P117

나의 미투로 세상의 무엇이 바뀔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벗어나고 싶었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고 싶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잘못을 하면 있는 그대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한 인간의 힘으로 다른 이의 인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 P118

끝없이 외모 품평을 받던 환경에서 시작된 높은 굽 생활이 끝나던 날이었다. 불편한 줄도 몰랐던 그 굽 높은 신발이 정말로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물론 가끔은 내 의지로 높은 굽도 신고, 멋진 옷도 입고 싶다. 어디까지나 내가 원할 때 말이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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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발한 암일수록 생존율이 낮다고 했다. 모든 것이 두번째였기 때문에 포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암이 전이된 간의 일부와 담도를 적출한다고 했을 때도, 다섯번의 항암 치료를 더 하게 되었을 때도, 1년 이상 생존할 확률이 20퍼센트가 넘지 않는다는 결과를 들었을 때도 우리 모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 P91

그가 자꾸 자신의 가족에 대해, 자신의 성장배경에 대해 얘기하는 게 불편하면서도, 좋았다. 가족 얘기를 할 때면 자기감정에 취해 마치 연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구는게 좀 웃겼고,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은 좋았다. 숱한 밤 동안 그의 얘기를 하염없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자리한 그라는 존재의 퍼즐을 완벽히 맞추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그의 인생, 내가 모르는 그의 습관, 내가 모르는 그의 호흡까지도 오롯이 재구성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 P115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 - P169

병이라는 것은 인간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누구보다도 강건하고 언제나 앞만 보고 걷던 그녀가, 간지러운 소리라고는 할 줄을 모르던 그녀가 노을을 보며 저런 소리까지 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꾸만 나도 뭔가를 털어놓고 싶게 만들어버린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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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통과해 온 시간을 말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기에 내 이야기를 쓸 때 글은 가장 고유해진다. - P129

다른 언어나 악기, 드로잉을 배울 때처럼 쓰기에도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용기,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좀 더 솔직해지려는 노력, 머리에서 머물던 이야기를 손으로 옮겨 적어보는 실천. 이 세 가지는 꾸준한 쓰기를 통해서 단련할 수 있다. - P133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존 버거는 자신이 거의 80년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던 동력을 이렇게 표현한다. - P176

비문이나 맞춤법은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차별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고 눈물샘을 건드린다. - P194

나는 왜 당연히 집필로 밥 벌어먹기 힘들다고 생각했을까. 왜 우리의 서사를 드러내는 일은 자기만족에서 그치는 거라고 폄하했을까. 왜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사실, 당연하면 안 되는 일 아닌가요?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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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꺾어 신는 재희의 등에 대고 말했다.
-수술하는 건 넌데 막상 간다니까 왜 내가 떨리냐.
-별거 있니. 그냥 여드름 짜러 간다고 생각해.
-그게 같냐?
톡 쏘면서도 내심 마음이 놓였다. 그래, 본인이 괜찮다는데, 괜히 내가 오버할 일은 아니지. 평소에는 다소 짜증이 났던 재희의(무신경함에 가까운) 담대한 성격이 이렇때는 퍽 고마웠다. - P31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모르지 나도. - P45

누구든 떠들어대도 괜찮지만, 그 누구가 재희라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도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재희니까. 재희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둘만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리 둘만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라도. - P52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때에 맞춰 블루베리를 사다 놓던 재희.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내 연애사의 외장하드 재희.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며, 가당찮은 남자만 골라 만나는 재희.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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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모든 건 먼지가 됩니다. 잔뜩 굳은 어깨에 힘을 푸세요. 지그 우리가 쓰는 글은 언젠가 먼지가 되고 세상에는 수많은 먼지 같은 말들이 떠다니다가 가라앉을 거예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해요. 나를 망칠 수 있는 우일한 사람은 나 자신이에요. 다른 말로, 나를 망칠 권리는 오직 나에게만 있어요. 굳이 지금 그 권리를 써야겠습니까?" - P109

‘집필은 노동이다.’ ‘작가’라는 말에는 왠지 돈과는 무관한 어떤 숭고한 느낌이 있는데, 그런 인식을 나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출퇴근 시간이나 작업 시간이 뚜렷하게 정해진 건 아니고, 결과물도 일정하지 않고, 수입도 불안정하고, 생계 노동을 따로 해야 집필을 지속할 수 있지만 내가 하는 이 작업이 노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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