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꺾어 신는 재희의 등에 대고 말했다.
-수술하는 건 넌데 막상 간다니까 왜 내가 떨리냐.
-별거 있니. 그냥 여드름 짜러 간다고 생각해.
-그게 같냐?
톡 쏘면서도 내심 마음이 놓였다. 그래, 본인이 괜찮다는데, 괜히 내가 오버할 일은 아니지. 평소에는 다소 짜증이 났던 재희의(무신경함에 가까운) 담대한 성격이 이렇때는 퍽 고마웠다. - P31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모르지 나도. - P45

누구든 떠들어대도 괜찮지만, 그 누구가 재희라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도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재희니까. 재희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둘만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리 둘만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라도. - P52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때에 맞춰 블루베리를 사다 놓던 재희.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내 연애사의 외장하드 재희.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며, 가당찮은 남자만 골라 만나는 재희.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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