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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경제학 1 - 부동산의 비밀 위험한 경제학 1
선대인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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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깨에 힘을 빡 주고 살았나 싶다.  거창한 말들이 온통 내 리뷰에 담겨져 있다. 부끄러워 숨기고 싶지만, 내가 좀 더 자랐구나 눈물도 좀 난다. 참 좋은 1000원짜리 막걸리 한 병 마시고 난 지금 글을 쓴다.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시골 동네 개천 다리 옆에 앉아 한참 보름달을 보아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달을 냅다 한 대 때려주고 싶기만 했다. 내 10살짜리 고양이가 다큰 자기 새끼를 데리고 달빛 아래로 왔다갔다 했다. 미치도록 감상적일 때가 댁들도 있지 않는가. 그게 오늘이다.

 

    섧고 섧어서 이 글을 쓴다. 그렇다고 내가 뭐 굶어죽기라도 살림이 어렵단 말인가. 부모 덕에 액면 그대로 굶지는 않고 있다. 마음이 눈물이 질끔질끔 날 정도로 짠하다. 쓸쓸하고 고독한 게 내 팔자란다. 덕분에 책은 실컷 읽는다. 내 관념은 점점 커졌고, 그것은 고독의 다른 뜻일 것 같다. 무슨 책들이 내 앞으로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이번에 빌려온 책이, 삼성을 생각한다와, 위험한 시장이라는 2000년대 초반의 양장본 책이다. 천주교 정의구현단을 통해 삼성의 비리를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의 책과 내가 쓰고 있는 이 리뷰의 책과도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내가 고독할 수록, 세상은 점점 더 동물의 왕국이 되어갔고, 그래서 나는 더욱도 고독을 원하게 되면서, 나는 더욱더 혼자가 된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 방을 비운 2, 3년여 동안 실컷 주식책들을 읽고, 주식을 공부했다. 돈을 위해서 문학을 사랑했더니, 결국 돈을 경멸하게 되었었다. 친구가 경제가 삶의 큰 한 면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고, 난 자본주의를 읽기 시작했다. 문학이 결국은 주식이었다. 경제는 문학의 큰 중심이었다. 주식은 경제의 꽃이었고, 경제는 또한 예술의 정치적인 장을 형성시켰다. 그 나라의 경제력이 노벨상을 수여케 했고, 칸 영화제의 수상작이 되게 했으며, 트렌드한 유행이라는 대중문화를 선도하게 하는 핵심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학 평가의 주관성이 정치보다 질이 낮다는 것을 아는 순간, 경제는 바로 얼마나 선명하고 정직한 산수인가. 홈쇼핑의 광고가 다큐멘타리보다 깨끗하고, 영화평론가의 평론이 광고주가 물려 있는 부동산을 팔아치우기 위한 신문상의 아파트분양광고보다 허위적이었다.

 

 

                                                       *

     술이 깰라. 아니 조금 깨기 시작해서 흥이 덜해진다. 그나마 흥을 버티려면 논리를 버려야 한다. 리뷰는 리뷰다. 이 책의 리뷰를 쓸필요도 없고,  쓰기 위해서 기승전결따위의 이치성을 갖다 붙이려고 하면 결국 나는 이글을 다 쓰지도 못할 것이다. 다 쓰고 싶지도 않고, 다 쓰기도 싫다. 나는 그저 취한 상태로 있고 싶고, 말하고 싶을 뿐이고, 내 옆에 애인이라도 있어서 육체를 섞기도 싶고, 그것보다 더 정말로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달을 보고 있으면서, 개천의 물소리까지 들리는 이 밤에. 더위도 사그러들어 시원한 밤. 그 밤에 개천 옆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발을 개천쪽을 두고 흔들면서, 멋지다. 달빛까지 은은한 밤에. 느티나무 밤 그늘 속에 앉아서, 교보문고에서 아가씨를 구경한다는 덜떨어진 친구 녀석의 전화를 받고, 미칠듯이 화를 내면서도, 누끄러뜨려야하는 내 청춘의 불.  을 잠시 뒤 막걸리로 삭인 뒤, 보이는 자위의 한숨. 그래도 아름답다. 시골의 시원한 여름밤이 청춘이 가고 있다. 청춘이 달빛과 함께 머물고 있다. 그 속에서 술이 취한 채 있고 싶을 뿐이다.

 

 

    내 맘 속에 있다. 강준만이 있고, 유시민이 있고, 노무현이 있고, 곽노현이 있고, 매력적인 전현희도 있다. 김광수도 있고, 이책의 저자인 선대인도 있다. 그가 쓴 이전의 책인 부동산 대폭락시대가 온다가 처음 내가 부동산 경제의 지식을 전해준 책이었다는 걸 이 리뷰 주인공의 저서를 읽고 알았다. 김재연도 이쁘다. 무슨 좌파적인 이야기를 해서 통진당에서 쫓겨나는 의결 중인지는 모르지만, 기득권의 마녀가 되어 추방되어서는 않되겠다. 조선일보의 1면 반공기사 속에서 희생되는 기득권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면 그녀를 위해 살고 싶다. 네이버에서 검색되지 않는 김용철처럼, 자본주의가 점점 더 반자본주의가 되어가고 있고, 나는 그래서 사랑한다. 수수한 내 서민의 꿈은 달빛 속에서 누워 있다. 내가 언제 한 번 미칠듯이 사랑을 할 수 있었던가. 팔딱거리는 심장으로 열렬히 상대를 앉고 사랑을 나누고, 마음 껏 한 번 그녀와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가. 숨을 쉴 수가 없이 나는 가난했다. 그 가난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책은 나의 반기득적인 사상을 키우게 했으니, 가난이야말로 기득권이 두려워 해야할 흉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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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난 지렁이를 살려준다. 개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햇볕에 타들어가는 지렁이를 나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태양은 차라리 지렁이의 죽음에서는 나은 편이다. 개미다. 온몸에 달라붙어 살을 찢는 개미들의 군대 속에서 죽어가는 지렁이를 본 적이 있다면 말이다. 죽어가는 지렁이의 끈적거리는 분비물이 싫어 나는 풀을 꺾어 지렁이의 몸 중간 속에 집어넣어 풀 숲으로 던져넣어 해를 피하게 한다. 수돗물을 한 통 받아 지렁이의 피부에 발라 한숨을 놓게 한다. 지렁이의 입을 문 개미를 떼어내고, 난 손에 든 지렁이에게 괜찮다,널 살려주려는 거다, 살려주려는 거다, 중얼거리며 그늘 속에다 지렁이를 넣어두고 그처럼 다시 물을 부어준다. 내가 살려준 개구리가 밤에 나타나서 알은 채를 한다고 환각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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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각하!   이 명박 각하!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직 당신의 가슴에다 쏠, 권총이 시판되지 않아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 업의 고리가

             현대에 있기를 바라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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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들전투: 캔들의 형태로만 매일 5% 이상 수익을 올리는 비법 - 지킬박사 주식 아카데미 3
이상암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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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팔자가 더러워서 그런가 보다.  

   주식으로 돈을 좀 벌어보려고 이 책 저 책 주식책을 뒤적거렸다. 동창 중에 하나가 11년 전 주식으로 돈을 좀 벌어 쫄딱 망한 뒤 철학책이나 읽어제치는 나에게 와서 우린 친구가 되었다. 6000만원을 번 뒤 미수까지 써서 1억을 벌어 결혼하려고 했던 게 실패로 돌아갔다. 6000만원은 하한가를 두 번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6천만원은 2000만원이 되었고  그 뒤 정신줄을 놓은 친구는 마구 거래를 하다 빈털털이가 된 게 우리집에 온 계기였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돈이 없이 결혼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을 게다.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애인의 마음을 그는 잡을 수 없었고 그는 혼자가 되었다. 그래도 그는 주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딛고 일어서야 한다! 라는 것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그는 20대 중반이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에게 남은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한가지.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좌절된 마음을 추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에게 나는 이미 삶을 관조하는 경지에 오른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난 아마튜어지만 당당하게 소설 당선 경력이 있는 인문자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날 만남으로해서 봉을 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런 시골바닥에서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인문자가 바로 나였고,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주위에 글을 쓰고 있는 유일한 지인이 바로 나였을 테니까 말인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도 호재였다. 잘걸렸다 싶었다. 쓸쓸한 시골에서 나는 외로웠다. 냉이국이나 끓여먹으면서 내가 키우던 10살짜리 늙은 암놈 고양이에게나 말동무나 하던 나에게 드디어 강의를 들으러 오는 제자를  만난 것이다. 나에게 드디어 제자가 생기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나 홀로시골에 쳐박혀 첩거를 하며 글을 쓰고 있던 나는 입이 심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고독과 가난은 당연히 인문자주의자가 감수해야할 (경외스럽기까지한 ) 다소 낭만주의적인 세계관 속에서 빠져 멩랑꼴리한 상태를 예찬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지내고 있었던 것게 당시 나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 뒤 우린 그렇게 얼추 썩 괜찮은 듀엣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불온한 정신세계를 내 심오한 사상을 통해 개도를 하게 된 것처럼, 나또한 그가 가져온 먹을거리를 통해 실제로 결핵을 면하게 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처음 3년 동안 나는 신나게 자본주의를 비판해주었다.  

    허풍같은 학력으로 잡동사니 책이나 읽는 나는 나의 내공을 총동원해서 그를 꼬드겼다. 수 많은 죽어버린 명사들이 그의 앞에서 패대기쳐졌고, 그는 어느새 친자본주의자에서 안티초울트라 반자본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가 내 말에 감동을 받을 때 마다 나는 공산당선을 외치는 맑스의 열정적인 표정을 지은 채로, 그 미친 니체와 같은 광기어린 눈알을 부라린 채로  더욱더 자본주의와 주식시장의 악질성을 강조했다. '알겠어? 나쁜 것은 바로 이것이라구!'

    <실물경제와는 무관한 단순히 돈이 오고가는 시세차익만을 노리는 금융경제의 무의미성(주식을 거래하는 일이 기업을 살리는 이이라니, 도대체 어떤 근거로 ? 단순히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증자와 같은 수단이라서 말인가?)! 보람된 노력과 결실(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서 오는 뿌듯함과 같은) 이 없는 비정하고 탐욕만이 넘쳐나는 이기적인 주식시장이 지닌 잔인성에 대한 질타. 게다가 사채업자와 짜고 개미들을 우려먹는 회사대표들의 모럴헤저드. 더 나아가 주식시장이라는 괴물을 낳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거짓의 모습들(광고와 매체들의 스토리와 이미지들)과 그런 자본주의의 환상 뒤에서 고통받는 진실들. 그 환상들 때문에 추방당하게 되는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들>을 나는 잔인하게 비판해가면서 그를 개도해나갔다.  

   그는 실제로 나를 만나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안정을 되찾아갔다.  

    주식을 통해 큰 빌딩하나쯤은 가져야되지 않겠느냐는 그의 욕망은 이제 커피한잔을 즐길 수 있는 준중산층 수준의 작은 건물 하나와 여유로운 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자신의 욕망이 부질없음을 진심으로 회개를 했던 것이다.   

    아니 사실 그는 진심으로 회개를 하는 척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본주의는 악하다는 전형적인 인문자의 생각을 하는 와중에서도 큰 빌딩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을 삭여야 한다는 끓어오르는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기 위해 더더욱 내 말을 강박적으로 신뢰하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그는 자신의 큰 빌딩이라는 욕망을 죽이는 척 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이룰수 없는 큰 꿈과 현실이라는 괴리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자신의 무능력이 주었던 주식에 대한 공포감을 억압해서, 다시말해서 그럼으로써 자신이 일단 심리적으로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억업하려고 했던 것이다.  

   돈은 단지 허상일 뿐이다! 돈은 단지 허상일 뿐이다! 라고. 

     그러나  허상은 돈이 아니었다. 위의 말의 바로 허상이었다.   결국 그는 여전히 강하게 돈을 벌고 싶어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가 내 말을 믿으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그 욕망을 억제(주식거래에서 치자면 마인드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역설적으로 더욱더 돈을 못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말을 믿으려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돈을 벌고 싶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해야한다는 그 사실을 시인했다. 나는 그런 시인이 더욱더 자신을 강하게 한다고 말했고, 그는 그러자 자신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그 뒤 돈을 벌고 싶기 때문에 인문주의자가 되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에게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도구였던 철학과 문학 따위들이, 이제 그에게는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우스웠고, 묘했다. 뭐라고 할까. 이런 걸 꿩먹고 알먹고 라고 표현해냐 되나 아리송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나는 간단하게 그를 눌러 심리적으로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런 경우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발언이라고 했고,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리얼리즘에 대한 모더니즘같은 발언이라고 정의를 내려버렸다. 그는 결국 내 말을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당연히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만남이 그에게만 이득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도 소득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도 큰 소득이었다. 일단 나는 그를 통해 생리적으로 허기진 배를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올 때마다 과일이며, 빵이며 커피 따위의 먹을 것을 갔다주었다. 나는 그걸로 내 부족한 영양분을 얼마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근의 빈집으로 쫓겨난 상태였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통해서라도 어떤 음식도 주지 말고 타지역으로 나를 내쫓으려고 했기 때문에 제대로 밥조차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져온 그런 먹을거리가 내겐 큰 의미일 수 밖에 없었다. 친구가 오는 게 반가웠던 동시에 나는 그 친구의 손에 들려져오는 음식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얼마 뒤 부터 나는 긍지에 차서 경탄했다. 하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라면서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그를 점점 만나며 깨달아갔지만 내가 그를 가리키면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나의 멋진 말발이었다.  

     그렇다 말발. 그를 통해 나는 나의 탁월한 언어구사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가 정말 소크라테스 뺨치는 말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소피스트 앞에서 독배를 마시기전 군중을 향해 자신의 말발을 자랑하던 소크라테스의 언어 능력을 능가할정도의 화려한 말빨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그를 통해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주식에 미쳤던 그가 그는 나에게 그걸 불러일으켜주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니, 연기론이니, 니체며, 자연주의며, 그런 답은 없지만 근사한 말따위를 나불거리기만 하면 너 말 정말 잘한다고 내 말에 심취한 표정의 그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항상 지어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독배를 마시지도 않았고, 나는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그 앞에서만은 최고였고, 무죄였고,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기뻤다.

    나는 나의 화려한 말발을 통해 내가 어쩌면 천재이고, 교주를 해 남을 우려먹어도 될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10년 동안 독거하며 자본주의를 증오한 효과를 이제야 톡톡히 보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찬란한 노력한 보람의 대가인가 말이다. 자본주의를 증오하면서도 배까지 불릴 수 있다니 나는 묘한 성취감 같기도 한 야릇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그에게 설교를 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그를 만난지 5년 뒤부터 나는 어느새 주식거래자가 되었다. 내가 주식책을 읽고 직접 거래를 하게 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니 가만히 생각을 숨기고 있었던 것을 보니, 아니 다시 말해 정작 나 스스로도 나 자신을 숨기고 있었던 것을 새삼 말하고 보면 내가 결국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결국 그 소설 당선금이라는 돈 때문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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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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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가 가볍게 읽히기를 원한다는 식으로 하자면,   

   a. 좌파 흉내를 내는  한겨레의 고급 고수(저자)가 나와서 우파 흉내를 내는 조중동을 쓸어버리는 화려한 무협 드라마.  

   고급 고수가 쓰는 무기인 칼의 이름은 청룡 반월도. 그 반월도를 한 번 휘둘러 검기(이데올로기)를 풍기면 반미, 비우호적인 글로벌 자본주의와, 친공, 반사회적인 범죄나 양태들에 대한 우호적인 대변들(사형 폐지, 극단적 범죄자에 대한 사회유기적인 변호)로 대변되는 살기(?)가  

   우파 흉내를 내는 조중동의 가슴을 후벼파내게 된다. 그러허나 철갑(우호적인 정부 권력과 메이저 대기업의 입김으로 만들어진( 따라서 아랫것들인 취재부서, 정열에 찬 정의파 신입기자들과, 돈에 이제 미련없을 만큼 절은 논설위원이나, 편집국장이 박살난 뒤에 오는))에 의해 반월도의 반월형의 거대한 검기는 산산히 흩어지고, 그 기운이 이제 서민들을 개도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일종의 코믹액션.  

   서민을 앞에 놓고 벌이는 두 이데올로기의 화려한 내공액션들. 우리가 배워야하는 것은 두 이데올로기(조중동은 당연히 친미, 친자본주의, 범죄의 극단적 처벌, 반공)의 충돌을 보면서 살짝 한 번 비웃어 주는 것이다. 한겨레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마치 서민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유인하는 한겨레 풍 고수의 아름다운 판타지에 우리는 한 방 먹고는 얼른 정신을 차리는 것.  

    즉 책은 범주체계이며, 따라서 범주는 사고와 연결되어 있고(상위개념-하위개념(즉 제목, 목차, 내용식의), 사고란 저자의 뇌의 언어적(혹은 시냅스적 전기전 연결망) 모티프(사상, 관념,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캐치해내는 것.  

     한겨레풍 고수의 입김을 감지하라는 것. 

      그래도 한 번 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한 쪽 볼(조중동이 때린)에만 싸대기를 맞으면 입돌아가기 때문. 양 쪽 볼에 번갈아 손바닥을 맞아야  돌아간 입은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  

    내 생각에 세이고여! 책은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네.  기본적으로 책은 균형감각이지. 언어를 마음의 표상 위에서 풍요롭게 재배열하는 과정이니까. 언어(세계를 읽기 위해 포도 위에 깔린 개념들)에는 다시 말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속독술의 원리-의미의 비슷함-가 쓰이게 된다는 거지).  '근데 세계는 과연 이론일까?' 라고 묻는 이유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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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대폭락 시대가 온다 - 한국경제 대전망
심영철.선대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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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를 낸다는 것은 비록 주관적일지라도(혹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는) 정당성을 보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화를 낼 때, 화를 내는 당사자는 자신의 어떤 정당한 것에 대한 침해의 인식에서 화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죄를 지은 죄인이 그 죄에 대한 모욕감을 주었다고 해서 화를 낼 수가 있을까. 그는 오히려 죄를 추궁하는 상대방에게 화가 아닌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란 따라서 나의 정당한 것, 세상이 나에게서 침해해주지 말기를 바라는  나의 자존적 거리감일 것이다. 즉 나의 자존감에 대해 침해해주지 말기를 바라는 세상과의 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은 화란 강자의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을 침해당한 그 순간 '약자'의 부르짖음일 것이다. 강자가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약자가 토라지듯, 강자는 부르짖을 필요도 세상에 대해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말하고 있는 존재이며, 통용되는 존재이며, 세상에 대해 체계화된 권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지금 행복한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해야 나는 당신에게 뒤의 글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글의 위상을 가늠하는 척도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해보면 좋은 글의 지형도일 것이다.  좋은 글은 권위적일 수 없다. 좋은 글은 권력과 야합할 수도 이익을 따질 수도 없다. 좋은 글은 부르조아적일 수 없다. 좋은 글은 약자의 편이어야 하며, 좋은 글은 소외된 자들의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당신이 느낀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말해야 하며, 그것은 입(글)을 통해서 발설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지식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어떤 흠, 부족, 개선의 여지, 소통의 욕구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해볼까?  

    세상이 적어도 아름다운 곳이라면 당신은 화를 내지 않는다. 당신이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당신이 기득의 체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세상과 거리를 잴 필요가 없다. 당신은 여태껏 세상과 당신을 지켜왔던 자존감의 거리를,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나의 밖에 있는 아름다운 세계를 굳이 나라는 자존감에 충돌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혀는, 자아는, 자존감은 세상을 빨아들여 그것이 나 자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란 이제 사라진 것,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존재해야 화를 내듯이, 화를 낼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화를 낼 수 있듯이, 나는 이제 더이상 약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저자는 아닌 것 같다.  

     다시 말해 이 저자는 약자, 그러니까 우리의 우울한 베이비붐 세대 이후의 미래를 위해 진정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책이 화를 내는 책이라면 기꺼이 나는 한표를 던지겠다. 이 한표는 결국 내가 약자라서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이 작가가 바로 진정한 약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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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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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느낌(35p-감각): 언어가 구체적인 현실성을 드러내는 장치가 바로 법인 것이다. 관념과 실재, 언어와 사물이 만나는 지점이 설정되게 되었다. 따라서 관념(철학적 사유, 논리의 범주)은 정치성과 권위를 이성으로부터 부름받는다. 이성이 감각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적(기독교적) 죄의식은 그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이성의 체벌이다. 왜냐하면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감각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하지만 감각은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관념으로부터 학대를 당하는 감각에 대한 역사의 궤적은 종교와, 사회, 정치, 사상 모두에까지 영향을 미침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감각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성의 역할은 교환 될 것이다. 감각은 순수한 지각의 소여로서 찬양받을 것이며, 지각 이후의 불온한 것들에 대한 응징을 가할 운명을 예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성의 범주들(논리, 관념, 사상, 이데올로기, 정치, 학문 등)은 금기의 영역으로 속죄의식(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정당성을 요구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살아있음조차 불안 위에 구조되었다는 것이, 그리고 감각적 쾌락조차 무언가에 대한 대가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는 것과 같이)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이다.  그녀의 이 느낌은 그런 여성성의 부활에 대한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닫아버리고 감각의 극점으로까지 밀고가서 감각밖에 남기지 않는 주인공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말했듯이 거시의 극에 놓인 채 미시의 (여성의) 소리지름, 여성의 정체성, 여성의 존재성을 대변하기 위한 가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소리치고 있다. 인간의 감각은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감각은 지각을 통제하고 이성을 규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감각은 <말할 수> 있다. 

   

    2. 틈(150p-기억):  아련하면서도 말하지 않은 채 분위기와 기운으로 소설을 밀어내버리는 잔잔하지 않은 오히려 거대한 여운. 인과를 밀어내고 다만 현실의 단면만을 절연해서 보여주는 것에서 오는 것. 독자의 상상은 열려 있고, 작품으로 빨려들어가고, 마지막 달밤의 영상처럼 은은하게 슬프게 묘사되어지는 풍경이 그래서 기억 같다. 구멍은 그래서 분위기로 상징되는 아련함의 도구, 현실을 낭만화하기 위해 인간의 인식이 가져오는 결점, 기억에 대한 망각이 주는 늬앙스인 것 같고 여성성의 비극을 훨씬 넘어 말해지는 것 성에 대한 본질적으로 내포된 비극을 비유하는 것 같고, 그러나 이런 늬앙스를 위해 성을 인식하게 되는 아이들이 통로이지만 작가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위해 풍경이 등장되어 지게 되는 것이다. 기억에 대한 관념적 사색, 기억의 현존성의 요구, 현재에 침투하는 과거의 성질에 대한 탐구, 어찌보면 근원적으로 물리성을 초월하고 싶은 낭만적 노발리스.

           

    철학적인 작품이 사회성을 지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어필이 되는 소설이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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