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전투: 캔들의 형태로만 매일 5% 이상 수익을 올리는 비법 - 지킬박사 주식 아카데미 3
이상암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1  

   팔자가 더러워서 그런가 보다.  

   주식으로 돈을 좀 벌어보려고 이 책 저 책 주식책을 뒤적거렸다. 동창 중에 하나가 11년 전 주식으로 돈을 좀 벌어 쫄딱 망한 뒤 철학책이나 읽어제치는 나에게 와서 우린 친구가 되었다. 6000만원을 번 뒤 미수까지 써서 1억을 벌어 결혼하려고 했던 게 실패로 돌아갔다. 6000만원은 하한가를 두 번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6천만원은 2000만원이 되었고  그 뒤 정신줄을 놓은 친구는 마구 거래를 하다 빈털털이가 된 게 우리집에 온 계기였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돈이 없이 결혼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을 게다.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애인의 마음을 그는 잡을 수 없었고 그는 혼자가 되었다. 그래도 그는 주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딛고 일어서야 한다! 라는 것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그는 20대 중반이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에게 남은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한가지.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좌절된 마음을 추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에게 나는 이미 삶을 관조하는 경지에 오른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난 아마튜어지만 당당하게 소설 당선 경력이 있는 인문자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날 만남으로해서 봉을 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런 시골바닥에서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인문자가 바로 나였고,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주위에 글을 쓰고 있는 유일한 지인이 바로 나였을 테니까 말인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도 호재였다. 잘걸렸다 싶었다. 쓸쓸한 시골에서 나는 외로웠다. 냉이국이나 끓여먹으면서 내가 키우던 10살짜리 늙은 암놈 고양이에게나 말동무나 하던 나에게 드디어 강의를 들으러 오는 제자를  만난 것이다. 나에게 드디어 제자가 생기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나 홀로시골에 쳐박혀 첩거를 하며 글을 쓰고 있던 나는 입이 심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고독과 가난은 당연히 인문자주의자가 감수해야할 (경외스럽기까지한 ) 다소 낭만주의적인 세계관 속에서 빠져 멩랑꼴리한 상태를 예찬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지내고 있었던 것게 당시 나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 뒤 우린 그렇게 얼추 썩 괜찮은 듀엣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불온한 정신세계를 내 심오한 사상을 통해 개도를 하게 된 것처럼, 나또한 그가 가져온 먹을거리를 통해 실제로 결핵을 면하게 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처음 3년 동안 나는 신나게 자본주의를 비판해주었다.  

    허풍같은 학력으로 잡동사니 책이나 읽는 나는 나의 내공을 총동원해서 그를 꼬드겼다. 수 많은 죽어버린 명사들이 그의 앞에서 패대기쳐졌고, 그는 어느새 친자본주의자에서 안티초울트라 반자본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가 내 말에 감동을 받을 때 마다 나는 공산당선을 외치는 맑스의 열정적인 표정을 지은 채로, 그 미친 니체와 같은 광기어린 눈알을 부라린 채로  더욱더 자본주의와 주식시장의 악질성을 강조했다. '알겠어? 나쁜 것은 바로 이것이라구!'

    <실물경제와는 무관한 단순히 돈이 오고가는 시세차익만을 노리는 금융경제의 무의미성(주식을 거래하는 일이 기업을 살리는 이이라니, 도대체 어떤 근거로 ? 단순히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증자와 같은 수단이라서 말인가?)! 보람된 노력과 결실(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서 오는 뿌듯함과 같은) 이 없는 비정하고 탐욕만이 넘쳐나는 이기적인 주식시장이 지닌 잔인성에 대한 질타. 게다가 사채업자와 짜고 개미들을 우려먹는 회사대표들의 모럴헤저드. 더 나아가 주식시장이라는 괴물을 낳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거짓의 모습들(광고와 매체들의 스토리와 이미지들)과 그런 자본주의의 환상 뒤에서 고통받는 진실들. 그 환상들 때문에 추방당하게 되는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들>을 나는 잔인하게 비판해가면서 그를 개도해나갔다.  

   그는 실제로 나를 만나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안정을 되찾아갔다.  

    주식을 통해 큰 빌딩하나쯤은 가져야되지 않겠느냐는 그의 욕망은 이제 커피한잔을 즐길 수 있는 준중산층 수준의 작은 건물 하나와 여유로운 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자신의 욕망이 부질없음을 진심으로 회개를 했던 것이다.   

    아니 사실 그는 진심으로 회개를 하는 척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본주의는 악하다는 전형적인 인문자의 생각을 하는 와중에서도 큰 빌딩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을 삭여야 한다는 끓어오르는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기 위해 더더욱 내 말을 강박적으로 신뢰하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그는 자신의 큰 빌딩이라는 욕망을 죽이는 척 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이룰수 없는 큰 꿈과 현실이라는 괴리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자신의 무능력이 주었던 주식에 대한 공포감을 억압해서, 다시말해서 그럼으로써 자신이 일단 심리적으로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억업하려고 했던 것이다.  

   돈은 단지 허상일 뿐이다! 돈은 단지 허상일 뿐이다! 라고. 

     그러나  허상은 돈이 아니었다. 위의 말의 바로 허상이었다.   결국 그는 여전히 강하게 돈을 벌고 싶어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가 내 말을 믿으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그 욕망을 억제(주식거래에서 치자면 마인드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역설적으로 더욱더 돈을 못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말을 믿으려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돈을 벌고 싶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해야한다는 그 사실을 시인했다. 나는 그런 시인이 더욱더 자신을 강하게 한다고 말했고, 그는 그러자 자신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그 뒤 돈을 벌고 싶기 때문에 인문주의자가 되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에게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도구였던 철학과 문학 따위들이, 이제 그에게는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우스웠고, 묘했다. 뭐라고 할까. 이런 걸 꿩먹고 알먹고 라고 표현해냐 되나 아리송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나는 간단하게 그를 눌러 심리적으로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런 경우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발언이라고 했고,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리얼리즘에 대한 모더니즘같은 발언이라고 정의를 내려버렸다. 그는 결국 내 말을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당연히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만남이 그에게만 이득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도 소득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도 큰 소득이었다. 일단 나는 그를 통해 생리적으로 허기진 배를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올 때마다 과일이며, 빵이며 커피 따위의 먹을 것을 갔다주었다. 나는 그걸로 내 부족한 영양분을 얼마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근의 빈집으로 쫓겨난 상태였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통해서라도 어떤 음식도 주지 말고 타지역으로 나를 내쫓으려고 했기 때문에 제대로 밥조차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져온 그런 먹을거리가 내겐 큰 의미일 수 밖에 없었다. 친구가 오는 게 반가웠던 동시에 나는 그 친구의 손에 들려져오는 음식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얼마 뒤 부터 나는 긍지에 차서 경탄했다. 하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라면서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그를 점점 만나며 깨달아갔지만 내가 그를 가리키면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나의 멋진 말발이었다.  

     그렇다 말발. 그를 통해 나는 나의 탁월한 언어구사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가 정말 소크라테스 뺨치는 말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소피스트 앞에서 독배를 마시기전 군중을 향해 자신의 말발을 자랑하던 소크라테스의 언어 능력을 능가할정도의 화려한 말빨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그를 통해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주식에 미쳤던 그가 그는 나에게 그걸 불러일으켜주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니, 연기론이니, 니체며, 자연주의며, 그런 답은 없지만 근사한 말따위를 나불거리기만 하면 너 말 정말 잘한다고 내 말에 심취한 표정의 그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항상 지어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독배를 마시지도 않았고, 나는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그 앞에서만은 최고였고, 무죄였고,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기뻤다.

    나는 나의 화려한 말발을 통해 내가 어쩌면 천재이고, 교주를 해 남을 우려먹어도 될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10년 동안 독거하며 자본주의를 증오한 효과를 이제야 톡톡히 보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찬란한 노력한 보람의 대가인가 말이다. 자본주의를 증오하면서도 배까지 불릴 수 있다니 나는 묘한 성취감 같기도 한 야릇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그에게 설교를 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그를 만난지 5년 뒤부터 나는 어느새 주식거래자가 되었다. 내가 주식책을 읽고 직접 거래를 하게 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니 가만히 생각을 숨기고 있었던 것을 보니, 아니 다시 말해 정작 나 스스로도 나 자신을 숨기고 있었던 것을 새삼 말하고 보면 내가 결국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결국 그 소설 당선금이라는 돈 때문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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