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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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기가 싫어. 피가 뚝뚝 듣는 새빨간 덩어리들이 무서워. 고기와 시체가 어떻게 다른 거지? 그 벌건 덩어리들이 정형되어 포장되면 순식간에 맛난 고기로 이미지가 탈바꿈해. 왁자지껄 즐겁게 고기를 굽고 맛있게 먹는 사람들. 하지만 내 손엔, 내 옷엔 아직 피가 묻어 있어. 나는 내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어떻게 이 덩어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먹어 온 걸까?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어.


한강의 소설을 읽는 동안엔 그녀가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한다. 편히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밀도를 지닌 한강의 글에 짓눌려 며칠을 앓는다. 그래서 다른 작가와 달리 한강의 작품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읽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선 약간의 자신감이 솟아났다. 그녀의 소설을 연달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그래서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한참 전부터 집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몇 년 전 맨부커 상을 탔을 때도 차마 읽지 못했던 그 책을.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의 시선으로 쓰였고, <몽고반점>은 영혜의 언니의 남편, 즉 형부가 사건을 이끌어 가며,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가 주인공이다. 세 편 중 어느 것도 영혜가 주인공인 적은 없으나 우리 모두 영혜가 진짜 주인공임을 안다. 세 작품 모두 영혜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그녀 주변 세 사람의 시선으로 조망하는 것이니까.

<채식주의자>는 소름끼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선언한 적도 없고, 선택한 적도 없다. 어느 날 꿈을 꾸고 나서부터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죽음과 연결된다. 채식도 식물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다를 바 없지 않냐고 할 수 있겠으나, 고기를 먹기 위해선 생명에 대한 잔인하고 무도한 폭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으로 너무도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를 영혜는 그 꿈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마트 정육 코너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고기를 사기 때문에 그 폭력을 실감할 틈이 없다. 정육점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세로로 반토막나 커다란 갈고리에 매달린 돼지를 보며 끔찍함을 느낄 때를 빼고는.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았다는 영혜의 아버지는 폭력을 상징한다. 가부장제의 폭력, 권위주의 시대의 폭력, 남성우월주의의 폭력. 숨쉬듯 폭력이 행해지던 시대를 살았기에 그는 영혜가 고기를 거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혜는 그 숨막힐 듯한 폭력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의 이미지를 연결한다. 그래서 그녀는 폭력에 저항하며 육식을 거부한다.

영혜의 남편은 어떠한가. 스스로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지극히 평범한 삶을 원하는 남자.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영혜와 결혼했다는 남자. 그가 원한 것은 고분고분 그의 말을 듣고, 아침 상을 꼬박꼬박 차려 주고, ‘내 귀가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관여하지 않‘는 아내였다. 아내의 의견, 취향, 개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것이 아내에게 어떤 폭압으로 작용하는지는 관심도 없다.

영혜는 저항한다.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서. 가슴을 열어 젖힘으로서. 고기를 거부하기 전에도 집에 있을 땐 브라를 하지 않았다는 영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집에서 브라를 입지 않는 소극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영혜는 이제 어떤 자리에서도 더 이상 브라를 하지 않는다. 급기야는 병원 뜰에서 환자복 상의를 벗어 버림으로써 그녀는 과거의 순종적인 그녀, 폭력을 말없이 받아들였던 그녀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린다.

<몽고반점>은 기괴하다. 영혜가 손목을 그은 날, 그녀를 엎고 정신없이 병원에 데리고 가느라 피범벅이 된 영혜의 형부는 그 후로 불가해한 이미지에 시달린다.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후, 문득 그의 뇌리엔 나신의 남녀가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엉겨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예술가였던 그는 그 이미지를 현실로 구현하고 싶은 욕망, 그 주인공이 자기와 처제였으면 하는 욕망,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금기를 어기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조바심, 불편함, 불안, 고통스러운 의심과 자기검열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라고 자책하면서.

인간은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영혜는 몸에 꽃을 그려넣어 식물이 되고 싶은 욕망에, 형부는 머릿 속의 강렬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체현하고 싶은 욕망에 결국 금기를 넘어 버린다. 둘의 관계는 각각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타인의 시선에서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추잡한 짓거리다. 그래서 영혜의 언니, 인혜는 구급대를 불러 두 사람을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다.

<나무 불꽃>은 비감하다. 인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생 영혜를 버릴 수 없었다. 자기 남편과 몸을 섞은 동생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가족 모두가 연을 끊어버린 영혜를 그녀는 끝까지 보호한다. 입원비를 대고, 주말이면 면회를 가고, 점점 가라앉아 가는 영혜를 끌어올리려 애쓴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아는 타고난 천성 덕분인지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영혜를 은밀히 미워했다.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식사 자체를 거부해 버린 동생을 보며 그녀는 문득 깨닫는다. 여섯살 난 아들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녀 또한 영혜처럼 변해 버렸을지 모른다고. 남편과 영혜의 그 사건 이후 지내온 수많은 불면과 고통의 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건 아들이 지워준 엄마로서의 책임이었다. 이인성의 소설 제목처럼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인혜의 삶은 그 자체로 천형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다만 견뎌왔을 뿐.

12년 전, <바람이 분다, 가라>의 서평을 쓰면서 한강을 ‘우리 시대 한국 문학의 마녀‘라 이름 붙였었다. 처절하고 여리고 가냘픈 모습을 하고 광기와 슬픔, 고통을 마력적으로 변주해 내는 마녀. 이제는 그녀를 마에스트로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강은 이제 어둠, 슬픔, 고통, 낯설음, 고결함을 개인을 넘어 사회와 시대의 차원으로 확장한 감정의 교향곡을 세심하게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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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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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이었다. 이 책을 산 건.
한강의 소설은 늘 힘들었다. 타협 없이 독자의 마음을 파고 들어 마구 휘저어대는 한강 특유의 아름다운 비수 같은 문장 때문이었다. 8년 전 읽었던 <소년이 온다>는 그 절정이었다. 슬픔, 분노, 부끄러움, 아픔, 안타까움 같은 수많은 감정이 밀려드는 폭풍 속에서 나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서 책을 내려 놓고 괜히 하늘을 바라보기가 여러 번. 그래서 두려웠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그런 소설이 아닐까. <소년이 온다>와 쌍둥이 같은 소설이 아닐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환희로 가득 찼던 마음이 잔잔해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이젠 한강의 작품이 주는 지극한 슬픔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어느 기자의 말처럼 한강의 노벨문학상은 문학에 감염된 이들이 믿어 온 문학의 가치가 실현되고 있는 거대한 경이의 순간이기에, 그 자리에 동참하여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이 감격스러움을 한껏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었지만 이 <작별하지 않는다>는 의외로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감정선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장면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을까. 현실과 꿈(혹은 환상)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이 소설의 특징 때문이었을까. 작년에 읽었던 리사 시의 <해녀들의 섬>에선 4·3의 참상이 무척이나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페이지를 넘기기가 두려웠었다.

사실 이 책의 초점은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는데 맞춰져 있지 않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한서림을 공유하고 서사로 남김으로써 치유 - 절대 화해가 아니다 - 를 모색하는 것이다. 혈육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 수 년에 걸친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승만의 후예들이 정권을 잃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망자들을 묻어야 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더미 속에, 모래밭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리는 드센 밀물 속에.

하지만 그들은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끔찍한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짐승을 도축하듯 도민들을 학살한 무도한 국가를. 구제역이 유행할 때 소떼를 산채로 땅에 파묻듯이, 이승만 정권은 국가의 폭압에 저항한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절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인선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희생자 유족들은 그렇게 묻힌 이들과 작별할 수 없었다. 아니 작별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인선의 어머니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요 밑에 실톱을 깔고 잤지만, 그 악몽은 유해가 발굴되고 진실이 규명되어야만 사라졌을 것이다. 오빠가 언제 죽었는지, 어디 묻혔는지도 모른 채 조용히 늙어가고 죽음을 맞은 인선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책은 그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레퀴엠이자 어둠을 희미하게 밀어내는 작은 불꽃이다. 소설 마지막에 주인공 경하가 간절히 켜냈던 성냥불처럼.

어린 시절을 제주에서 보냈던 나에게 <작별하지 않는다> 속 제주 사투리는 새로운 차원의 추체험을 선사했다. 작중 할머니들의 ‘육지‘ 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을 머릿 속에서 또렷하게 재생하여 그네들의 단단히 묵힌 슬픔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요즘 유행하는 농담과 같이 노벨 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은 경험이랄까. 경하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새를 구하러 가는 길에 겪는 폭설도 제주의 중산간에 내린 어마어마한 눈을 보아왔던 나에겐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듯 선했다.

한강은 책 끝 ‘작가의 말‘에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썼다. 그렇다. 이 책은 단지 슬픔과 분노로만 4·3을 해석하지 않는다. 왜 이 책이 다른 한강의 소설에 비해 덜 힘들었는지 이젠 알 것 같다. 작별하지 않기 위해 힘껏 애썼던 이들의 사랑, 그 지극함에 대한 소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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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 모든 영어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크 포사이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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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물이라고들 한다. 흔히들 인간의 사유가 말과 글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지만, 이 감옥은 쉼없이 분열하고 복제하며 변이한다. 이런 면에서 언어는 진화론적 존재다. 8, 90년대의 TV 자료 화면을 유튜브로 다시 볼 때면 그들이 쓰는 단어와 어투가 그렇게 생경할 수 없다. 고작 30~40년 사이에도 이만치 바뀌었는데, 수 백년 시간의 지층에 퇴적된 언어는 대체 어떠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 책은 언어의 지층을 파내고 먼지를 털어내어 단어의 계보를 추적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영단어와 관용구들의 유래가 무엇인지,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는지 밝힌다. 마치 화석 발굴을 통해 생물의 진화 과정을 나열하여 보여줄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절대 학술적이거나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무척이나 가볍고 유쾌한 책이다. hotdog가 어떻게 만들어진 단어인지, papillon과 pavilion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의 rolling stone은 구르는 돌이 맞는지, ‘The buck stops here‘는 대체 어디서 온 말인지. 이 책을 보면 이런 소소잡다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책은 짧은 챕터 수 십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어에 대한 책이니 만큼 첫 챕터는 ‘book‘과 관련된 단어들을 파헤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언어는 끝없이 이어지는 연결고리라고 웅변하듯 한 챕터의 끝과 다음 챕터의 시작이 곧바로 이어진다. 다소 억지스럽게 연결되는 챕터들도 없잖아 있지만,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모든 사람과 아는 사이가 된다는 케빈 베이컨의 법칙처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단어들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런 고로 이 책의 제목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라고 짓는 게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book‘에서 시작한 이 책은 수많은 단어와 숙어와 관용어구를 돌고 도는 기나긴 여행을 거쳐 다시 ‘book‘으로 돌아온다. 자기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전설 속의 뱀 우로보로스처럼, 저자는 언어가 영원히 생성하고 소멸하기를 반복하는 생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이 모든 걸 차치하고,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을까 싶다. 위키백과의 링크를 끝없이 타고 들어가길 즐기는 나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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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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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을 다루는 책들은 각자 고유한 서술 방법이 있다. 독소전 전반을 주욱 따라가는 책(<독소전쟁사>). 스탈린과 히틀러 두 독재자에 초첨을 맞추는 책(<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특정한 전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군인이나 민간인들의 증언에 의지하는 책(<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등.

그 중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었다. 상상하기 조차 힘든 거대한 규모로 사람을 갈아넣은 비정한 전쟁의 수레바퀴를 처절하게 묘사한 명저인데, 책을 읽는 내내 복잡미묘한 다양한 감정을 느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 꽤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동프로이센 나머지 지역은 소련군의 복수에 무방비 상태였다. 독일 주민에게 가해진 대접을 숨길 수 없다. 전쟁 초기에 자행된 일련의 야만 행위들이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1944년 10월에 점령한 첫 마을들에서 병사들이 젊은 여자든 늙은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강간하고 고문하면서 주민들을 살육했다. 피난민들은 포격과 폭격을 당하고 진격하는 탱크 궤도 밑에 깔렸다.˝

전쟁 말기, 불리했던 전세를 극적으로 뒤집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며 마침내 나치 독일의 영토까지 밀고 들어간 ‘대조국전쟁‘의 붉은 군대 병사들은 숭고하기만한 영웅이 아니었다. 복수심에 불타고 전리품을 탐하며 색욕에 눈이 뒤집힌 악귀가 그네들의 일면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 대목을 짧게 묘사하고 넘어갔지만, 그전까지 보여준 붉은 군대의 영웅 서사에 흠집을 내기 충분했다. 이 대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러고서 10년 넘게 지나서야 <베를린 함락 1945>를 찾아냈다. 이 책은 붉은 군대가 독소전 종반에 독일 영토로 진입하여 베를린으로 신속히 진격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 앤터니 비버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출간한 이후 주영 러시아 대사에게 받은 당혹스러운 대접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만큼 이 책은 소련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직까지도 러시아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서 행했던 갖은 만행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중상모략으로만 치부하고 있다. 고결하고 숭고한 붉은 군대가 200만명 이상을 강간하고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는 걸 러시아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을 테니까.

위에서 언급한 여러 책을 통해 나치가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저지른 끔찍한 악행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군이 복수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학살과 강간, 약탈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복수의 겉껍질을 쓰고 있었을 뿐, 소련군이 독일 점령지에서 벌인 행태는 인간의 원초적인 추악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결과였다. 최전선에서 싸운 선봉 부대보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2선 부대의 전쟁 범죄가 훨씬 심각했다는 점, 독일에 강제로 끌려간 러시아 여성들이나 해방된 유태인들도 강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 책은 또한 히틀러의 오만한 어리석음이 수많은 국민들을 어떻게 사지로 몰아넣는지를 잘 보여준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도 베를린 시민을 한 명이라도 더 피난시킬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벙커에 들어앉아 극적인 역전을 꿈꾸었다. 연합군이 자기들과 손잡고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실 이건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는데, 의심이 지독하게 많았던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이 소련을 견제하는 도구로 독일을 이용할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독일의 패망이 확실해진 시점에도 괴링과 힘러, 보어만 등은 히틀러의 뒤를 이어 제국의 지도자가 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범 재판을 받고 자살하거나 도피 과정에서 살해되는 최후를 맞는, 비참한 죽음의 운명이었는데도 말이다.

판데모니움이라고 해도 좋을 이 가공할 만한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고 또 한없이 고결해질 수 있는가를 실증하는 무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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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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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은 무슨 핑계를 대서든 술을 마신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기쁜 일이 있어서, 슬픈 일이 있어서. 그네들은 기어코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그래서 이 에세이집의 제목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술꾼들의 그럴 듯한 핑계 같다. 하지만 정지아, 그녀의 삶을 가만 들여다 보면 꼭 핑계 만은 아닌 듯 하다.

학창 시절 부터 빨치산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아버지는 투철한 혁명 전사였지만 농사에는 젬병이었다. 당연히 생활이 넉넉했을 리 없다. 대학에서는 학생운동에 열심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빨치산 활동을 다룬 첫 책 때문에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국보법 위반으로 수배를 당한다. 3년을 그렇게 숨어 살다 자수해서 집행유예를 받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먹고 살기 위해 모교에 출강을 하고, 아동소설을 쓰고... 그러다 예순 가까운 나이에 자전적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정지아. 평생의 친구인 술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 오랜 시간을, 그토록 힘들었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닥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원체 천성이 낙천적이어서인지, 술이 사람을 푸근하게 만들어서인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술에 얽힌 에피소드 만으로 삼 백 페이지가 넘는 에세이를 써내려면 그녀의 삶에 수많은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을 터.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을 그녀는 툭툭 가볍게 풀어낸다. 술 한 잔으로 털어내 버릴 수 있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내로라하는 대기업 회장 앞에서도, 칼에 베일 듯 날카로운 야쿠자 앞에서도 그녀는 기죽지 않는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좋은 술이니까. 입에 맞는 술만 있다면 그녀는 당당하다. 특히 그게 조니워커 블루라면!

이 책을 통해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발자취를 좇았던 그녀의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사회주의자의 이상을 따라 평생을 살려고 노력했던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전남 구례 시골 마을에서 조니워커 블루에 탐닉하는 딸에게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딸이 큰맘 먹고 선물한 시바스 리갈을 소주 한 짝과 맞바꿔 먹는 아버지답게 ‘양놈들 술은 금테두리라도 둘렀다냐?‘라고 지청구를 놓았을까? 아니면 고등학생 딸이 친구들과 밤새 매실주를 홀짝이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대범한 유물론자답게 ‘지 하고 자픈 대로 하게 냅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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