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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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의 말이 글보다는 쉬울 줄 알았다. 보르헤스의 책이라고는 20여년 전 <픽션들> 한 권 읽어본 게 전부였지만, 내 독서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책이었으니. 대체로 인터뷰집은 가벼운 마음으로 슬렁슬렁 읽을 수 있는 게 미덕 아닌가.
착각이었다. 해체주의, 기호학, 후기 구조주의에 막대한 영항을 끼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이자, 5개 국어에 통달한, 도서관이라 할만한 전설적인 기억력을 가진 대가가 하는 말이 쉬울 리가 있나. 보르헤스는 인터뷰어가 질문 중에 어느 작가를 언급하면 즉시 그 작가의 작품을 각종 언어로 암송한다. <픽션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머리를 다친 후 자기가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소유하게 된다. 나뭇잎 하나, 개미 한 마리까지도)의 모델이 보르헤스 자신이라니 뭐. 이런 천재의 머릿 속을 들여다보는 게 어렵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시자이지만 역설적으로 보르헤스는 자신을 19세기의 고전적인 작가에 가깝다고 말한다. 실제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월트 휘트먼, 프로스트, 에드거 앨런 포, 에밀리 디킨슨, 단테 같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자신 고대 영시와 노르드어 문학을 깊이 연구했다. 인터뷰 내내 이러한 작품들이 인용되고 논평된다.
악몽, 미로, 죽음, 시간, 기억. 보르헤스 작품의 핵심 키워드들과 카발라, 영지주의, 범신론 같은 개념이 계속 등장하니 인터뷰 한 줄도 쉬이 넘길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꿈 속에서 난해한 책들로 꽉 찬 도서관의 미로를 헤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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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빵파랑 - My Favorite Things
이우일 글.그림 / 마음산책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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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엔 어느 날 밤 천둥 소리에 놀라 하나 둘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줄리 앤드루스가 노래를 불러주는 대목이 있다. 노래의 제목은 <My Fovorite Things>. 슬프거나 무서운 일이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생각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내용의 노래.
저자 이우일이 DVD로 이 장면을 보다가 떠올린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이 책은 책 제목인 옥수수빵파랑(Dodgerblue라는 파란색이란다)부터 <사운드 오브 뮤직>까지 저자가 좋아하는 것들 55가지를 소개한다.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듯, 그가 좋아하는 물건의 목록은 그의 내면이 장난기와 자유로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글만 놓고 보면 그의 만화(도날드닭!) 만큼이나 썰렁하지만, 글에서 드러나는 삶의 여유로움은 샘날 정도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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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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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미국과 영국은 동베를린에 위치한 소련군 사령부 지하로 터널을 파고 들어가 통신선을 따서 도청한다는 담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작전명 골드. 이 작전에 참여하게 된 스물 다섯 살의 영국 체신국 직원 레너드 마넘이 주인공인 소설 <이노센트>는 존 르 카레를 연상케 하는 냉전 시대 첩보물이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약한 영국 청년 레너드는 동료들과 같이 간 무도장에서 독일 여자 마리아를 만나고, 그 순간부터 그들의 삶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첫 사랑의 열정과 번뇌, 다툼, 비밀, 갈등. 이를 묘사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글귀들, 그리고 그보다 더 빛나는 스토리텔링. 주인공들의 앞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책의 제목 <이노센트>는 어떤 의미일까? 이 걸작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이언 매큐언의 작품을 더, 더 많이 읽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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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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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여행기는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 이후 참 오랜만이다. 콘탁스 G1, 그리고 롤라이35라는 필름 카메라의 강한 개성과 하이델베르크, 도쿄라는 대도시의 특징을 절묘하게 엮어낸 김영하의 재능에 적잖이 감탄했었다. 내가 필름 카메라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던 때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김영하가 두 달간 시칠리아를 여행하고 쓴 글이다. 내가 무뎌진 걸까, 아니면 이 여행기에선 김영하의 문재가 발휘되지 않은 걸까. 성공한, 하지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대한 중년의 환멸이 모티브가 된 여행은 좀 많이 식상하다. 김영하의 소설이나 산문 중엔 의아할 정도로 레벨이 떨어지는 게 가끔 보이는데, 이 책도 그 중 하나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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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원전 - 다 빈치에서 파인만까지
존 캐리 엮고지음, 이광렬.박정수.정병기.이순일.방금성.김문영 옮김 / 바다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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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부터 시작되는 근대 과학기술의 연구 기록과 저술들을 한 꼭지씩 따서 모은 책. 저자 존 캐리가 과학자가 아닌 옥스포드 영문학 교수라는 점도 놀랍지만, 이 수많은 과학 저술들을 뒤져 대중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발췌하고 편집한 그의 노력이 경이롭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챕터는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어느 탄소원자 이야기>로, 수억 년의 세월을 석회암 속에 갖혀 있던 탄소원자가 우연한 기회에 이산화탄소가 되어 겪는 모험을 상상한 이야기이다. 탄소가 대기를 떠돌다 이태리 어느 농장의 포도나무 잎으로 들어가 포도송이로 자라고, 와인이 되어 사람 몸 속으로 들어가 간을 거쳐 근육에서 젖산으로 분해되고, 호흡을 통해 다시 대기로 돌아가 레바논의 삼목나무 줄기 속 셀룰로오스가 되고, 나무벌레의 일부가 되고, 미생물에게 먹혔다 어쩌다 우유가 되어 프리모 레비의 몸 속에서 뇌를 구성하는 세포의 일부가 되어 이 글을 쓰게 되는 긴 여정. 우리가, 우리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곧 우주의 일부이자 우주 그 자체라는 걸 윤회라는 종교적 언어를 빌리지 않아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증명한 아름답기 그지 없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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