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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ㅣ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4년 7월
평점 :
"헤르만 헤세는 생전에 이미 나이를 떠나 기성 세대의 경직된 생활방식에 저항하는 젊은 작가였다(9)."
헤세의 작품을 좋아하는 층은 사회에 잘 적응한 기득권의 연령대보다 반항하는 10대나 은퇴 후 진정한 자아를 찾는 노년층이다. 10대에 헤세에 열광하였다가 다시 은퇴하고 나면 꺼내 읽게 되는 것이 헤세의 작품이겠다.
이 책은 헤세(1877-1962)의 시, 편지, 일기 등을 엮은 책이다. 자연과 신, 인간, 언어, 예술, 정신분석 비판, 종교, 전쟁, 행복과 사랑, 노년의 관조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엮은이는 독일문학 전문 편집자로 헤르만 헤세의 유고집을 출판하고, 20권의 헤세 전집을 발간하고, 헤세 박물관 건립을 담당하였다. 누구보다 헤세에 대해 잘 이해하는 사람이 엮은 책이니 기대된다.
헤세를 소설로만 접했다면, 이 책은 헤세의 시, 편지, 엽서, 일기처럼 아주 개인적인 자료를 통해 그를 한 개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헤세는 개인의 본성을 덮어버리는 군국주의를 표방한 독일 사회와 보수적인 기독교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회운동이나 투쟁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려면 그저 각 개인이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스위스로 망명한다. 기독교에 관해서는 초교파적으로 브라만교의 아트만이나 노자의 무위자연, 부처의 윤회와 열반같은 사상에 매혹된다.
헤세는 인생을 고통과 괴로움으로 느끼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나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자연의 뜻에 따라 삶을 긍정하고, 고통도 좋게 여기면서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유머와 예술을 사랑하는 방식을 택한다.
예술가로 작품을 내는 것에 관한 고백이 진지하다. 자신의 작품을 읽고 자살을 했다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원망의 편지를 보낸다. 반면 어떤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작품 속 인물과 같은 인생관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이렇게 상반된 반응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 헤세는 자신의 작품이 젊은이를 죽이거나 깨달음을 주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가가 작품을 품고 있지 않고 세상에 내는 이유를 그림형제의 두꺼비 동화를 비유로 든다. 두꺼비가 금관을 물고 나오는 것을 그대로 두었으면 소녀는 더 많은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나의 금관을 얻자 바로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두꺼비는 죽어버린다. 세상이 예술가가 작품을 계속 내도록 둔다면 금은보화같은 작품이 더 많이 나올텐데 이를 비판하거나 추종하면서 예술가는 더이상 작품을 생산하는 것을 멈출수도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헤세는 굉장히 섬세하고 생각이 깊고 많은 타입인 듯하다. 세상에 동화되는 것을 원치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본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살았던 작가다.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시켜 문명의 발전을 이룬 합리주의 사상이 폭력과 전쟁도 불사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자연을 경외하면서 예술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동양의 사상에 매료되고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본성을 찾는 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사는 일과 부딪칠 때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현대인에게 헤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책의 구성이 아쉽다. 장을 나누지 않은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장르별로 모으거나 시기별로 모으거나 주제별로 모았다면 더 좋았겠다. 어떤 작품들이 모여 있겠구나하고 예상하기보다 느닷없이 바뀌는 주제와 장르에 조금 당황스럽다. 각 작품의 배경설명이 전혀 없어서 어느 맥락에서 쓴 글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점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