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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따로 팝니다
롤리 윈스턴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의 첫장을 펴보기도 전에 신랑이 먼저 이 책을 개시(?)했다.
내가 잠깐 컴퓨터에 빠져있는 사이, 책에 이쁘게 둘러진 분홍색 띠지에 우리 신랑의 땀과 침이 얼룩져서 그 이뻤던 띠지가 찢겨지고 구겨져 책을 읽기도 전에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500페이지에 가까운 두툼한 책이 우리 신랑한테는 푹신한 베개쯤으로 보였나보다. 한창 삐걱거리고 있는 엘리너와 테드 부부 이야기를 읽고 우리 부부 생활의 문제점도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또 고쳐나가는 소중한 기회로 만들고 싶었는데 말이다. 표지에 그려진 엘리너처럼 우리 신랑을 향해 소리쳤다."아직 난 이 책 첫장도 펴보지 않았다~~구~~~" 사과는 커녕 오히려 "그럴 수도 있지? 왜 화를 내고 그래?" 라고 같이 버럭대는 신랑을 보니 주인공 엘리너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갔다. 엘리너가 테드에게 화가 났던 건 바로 남자들의 이 무신경함 때문이다.아내 엘리너를 위해 저녁상을 손수 차려주고 아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따라주는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남편이지만 정작 엘리너가 진정 원하는 일엔 반응이 영 시큰둥해서 불임치료도, 유산도, 입양도 엘리너와 테드 즉 우리가 아닌 엘리너 혼자만의 고민인 듯 해서 엘리너의 화를 돋운다. 어쩔 수 없이 엘리너의 말에 몸은 따르고 있지만 정작 거기엔 테드의 마음은 담겨있지 않아 엘리너의 빈정이 상했다고 할까~ (사실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남자들이 입으로만 미안하다는 말을 해서 안그래도 화가 난 여자들의 화를 더 돋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아기를 진짜 갖고 싶은 엘리너와는 달리 테드는 아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유산을 한 후 더이상 고통스런 불임치료를 받느니 입양을 해보자고 진지하게 고려해보는 엘리너와는 달리 테드는 입양은 다음으로 미루고 엘리너와 둘만의 시간을 당분간 갖길 바란다.물론 테드는 착한 남편답게 이런 자기 생각을 입밖으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다.하지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오감에 직감이라는 6번째 감각까지 갖고 있는 여자 중 한명인 엘리너가 테드의 이런 본심을 모를리 없다.
그래서 서운하고, 그래서 원망스럽고, 그래서 테드한테 사사건건 짜증 부리고 툴툴댄다. (실은 테드도 이쁜 딸을 갖고 싶어했단걸 뒤늦게나마 엘리너도 알게 되지만 말이다. )툴툴대는 엘리너의 화를 풀어줄 길이 없다고 생각한 테드는 헬스클럽에서 몸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하고 그곳에서 엘리너와는 전혀 다른 매력의 헬스클럽 트레이너 지나를 만나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만다. 사장에게 실리콘 밸리 최고의 국제고용법 변호사로 인정받는 엘리너는 유능하고 지적이고 아름답다기보단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아담 사이즈의 여자인 반면 트레이너 지나는 허리까지 늘어뜨린 긴 머리에 탄력있는 몸매, 잘록한 허리까지 갖춘 남자들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미인이다.냉소적인 유머로 테드를 즐겁게 해주고 테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줬던 엘리너는 2년동안 이어진 고통스런 불임치료와 유산으로 이제 테드에게 짜증만 부리기 일쑤지만 지나는 좀 무식하긴 해도 순수하고 주변사람을 잘 배려하고 요리를 못하는 엘리너와는 달리 요리도 잘해주고 엘리너와 더이상 잠자리를 못하게 된 테드의 성적욕구까지 꽉 채워주는 아주 뜨거운 여자다.하지만 테드가 지나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엘리너는 테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지나는 테드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인 양 떠받들어주고 테드를 필요로 한다는거다.나의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여자가 남자 위에서 군림하기보다는 남자가 약한 여자를 감싸주고 보호해주는데서 희열을 얻는것 같던데 여자인 내가 봐도 결단력 있고 능력까지 출중한 엘리너는 우유부단한 테드가 보호해줄 대상이 아니라 테드가 기대고 싶은 대상이라 정이 좀 덜 가는 것도 사실이다.반면 지나는 여리고 순수하고 결혼도 안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열살짜리 아들 토비까지 떠맡게 돼서 말썽쟁이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으니 안그래도 아이가 안생겨 속상한 테드가 매력적인 지나와 안쓰러운 토비를 돌봐주고 싶은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같은 여자니까 불임과 유산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내를 남겨두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테드가 미울 법도 한데 짜증내는 엘리너를 받아주느라 힘들었을 테드를 생각하니 엘리너가 그랬듯 나도 테드에게 슬며시 연민이 생긴다.유부남인줄 뻔히 알면서 테드를 유혹하고 아들 토비의 수학과외까지 테드에게 떠맡기는 뻔뻔스런 지나야말로 내가 마르고닳도록 미워해야할 대상이지만 매력은 넘치면서도 이제껏 결혼한번 못해보고 지나를 필요로 하는 남자친구는 많지만 변변한 사랑 한번 받지 못한채 박봉에 시달리고 졸지에 말썽쟁이 아들 양육까지 떠맡게 된 지나도 너무 안쓰러웠다.엄마를 무식하다고 사사건건 무시하고 어른들한테도 입바른 소리만 해대고 유부남인줄 뻔히 알면서도 테드가 자기 아빠가 돼주길 바라는 버르장머리 없는 토비는 어른으로서 정말 이해도 안되고 뭐 저런 아이가 다 있냐고 순간순간 화도 났지만 나중엔 열살 아이다운 대책없는 순수함에 슬며시 동정이 갔다.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지만 원하는 아기는 안생기고 남편은 바람까지 피우는 엘리너의 심정은 뭐 말할 것도 없이 백분 이해되고 말이다."속수무책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등을 토닥여주고픈 충동을 느낀다." 는 박아람님의 역자후기에 담긴 글처럼 이 책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그 우유부단함과 짜증, 질투, 연민 등등 때문에 모두 지긋지긋하고 넌덜머리나지만 한편으론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고 인물 하나하나, 내 작은 품으로나마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싶을만큼 모두 여리고 안쓰럽다. 한편으론 등장인물 모두 그런 숱한 일을 겪으면서 멍해있기보다는 저렇게 잠시도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생각할 수도 있단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엘리너와 지나,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면서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바람에 두 여자와 지나의 아들 토비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줬던 테드가 지나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청산하고 엘리너에게만 충실했다면? 혹은 엘리너와 이혼을 하고 지나와 토비를 돌보는데 주력했다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렇게 빠른 결정을 내렸다해도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섭섭함은 그래도 평생 두고두고 남을 것 같다. 엘리너의 불임치료, 유산, 남편의 불륜 등등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가보지 못한 길, 영원히 가지 못할 길에 미련을 두기보다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이쪽저쪽 살피고 뒤도 돌아보고 찬찬히 앞도 살피면서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아야겠단 생각이 들게 만들어준 책이다. 자상한 테드의 손길을 거부하고 테드에게 짜증만 부려 미안했다는 엘리너의 마음이, 늘 무뚝뚝한 말과 행동으로 내게 상처를 주지만 둘째 사위인데도 친정 대소사엔 늘 발벗고 나서주는 고마운 우리 남편을 떠올리게 해줘서 나한테는 더없이 고맙고 좋은 책이었다. 나 역시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이 책을 통해 만족의 미덕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어 참 좋았다. 아홉을 가 있는 동안 하나만 가진 사람은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 나같이 평범한 사람한테도 허락된 사치이기에 참 다행이다 여기게 해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