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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다니엘 포르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남자다. 여자친구 마리 아녜스한테 차였다. 별 볼 일 없는 인간, 실패작, 거리에 나가면 지천으로 널린 남자라는 말과 함께. 앞으론 좀 더 자주 씻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도 받았다. 특히 겨드랑이를 신경 쓰라고 콕 집어주기까지 했다. 어찌어찌 여자친구 집을 나와 길을 건너는데 등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돌아보니 10초 전에 서 있었던 여자친구가 사는 아파트 정문을 어떤 차가 들이받은 상태였다. 운전자는 토마토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주변에서 처음 발생한 죽음이었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여자친구의 새 남자친구였다. 양다리였는지 새 남자친구가 생겨 차인 건지는 모른다. 아무튼 여자친구에게는 남자가 또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후로 주변에서 수많은 죽음을 만나게 됐다. 아버지, 친구의 여자,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친구, 관리인의 남편, 심지어 집에서 사용하던 전화기까지 죽었다. 죽음은 한 페이지에 하나씩 등장한다(원문에선 책 제목처럼 페이지마다 죽음이 하나씩 등장하지만 번역을 거치면서 거의 매 페이지마다 죽음이 등장하게 된다). 죽음은 지천에 널려 있다고, 그까짓 실연이 뭐 대단하냐고 말하는 것처럼.
심지어 신도 죽었다. 니체가 죽였기 때문에(46쪽).
'나'는 결국 전 여자친구 마리 아녜스와 다시 시작한다. 그동안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샀고, 스포츠센터에 등록하고 말린 생선과 알약과 술에 집중한 식단 덕분에 근육질 몸매를 갖게 됐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 모양도 바꿨다.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서 부자가 되겠다는 계획은 영감이 영 협조를 해주지 않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겠단 계획을 실천하다 성전환수술을 해 여자가 된 남자와 잠자리를 하게 되긴 했지만.
작가 다니엘 포르는 국제적인 광고 회사 M&C SAATCHI.GAD를 설립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인데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파리에서 생활한 사람답게 책 곳곳에 프랑스 작가, 배우, 문화에 대한 비유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번역가가 각주를 달아놓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론 작가의 비유를 이해할 수가 없어 솔직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검색하며 읽을 수도 없고.
번역의 아쉬움도 있다. 문어체 같은 대사들이며 우리말에선 쓰지 않는 '당신', '그녀', '그'라는 표현들. 작가가 원래 대사를 문어체로 쓴 건지는 모르겠는데 영 눈에 걸린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내 취향으론 한 마디로 딱 잘라 '재미있다'고는 못 하겠다.